제798화
이튿날. 주운환은 아직까지 앞당겨서 관인의 봉인을 풀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보아하니 예정대로 정월 스무날에나 봉인을 풀 것 같았다.
양왕이 저를 경계한단 생각에 주운환은 여전히 우울했다. 다만 지금까지 모든 군주가 그러했으니 양왕을 탓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과 양왕 사이에 막상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나니 받아들이기 힘들 따름이었다.
주운환은 이럴 때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재주를 숨기고 조용히 행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신매매꾼의 일에는 아무래도 신경을 끌 수 없었다. 노왕의 능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왕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자신만 생각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더구나 상관수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노왕이 해낼 수 있을까.
마침 오늘은 강왕부에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많은 귀족들이 연회에 참석했다. 주운환도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다가 적당한 때에 은밀히 강왕을 작은 누각으로 불러내 의논했다.
인정 많고 정의감이 넘치는 강왕도 이번 일을 노왕에게 맡긴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일은 자네가 제일 적임자인데, 자네에게 맡기지 않을 거라면 하배인지 배하인지 하는 사람에게라도 맡겨야 할 것 아닌가. 하아……. 폐하가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하지만 어쨌든 폐하의 뜻이 아닌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
강왕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주운환을 보았다. 주운환이 옹립한 황제가 그를 경계하고 있으니 말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폐하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주운환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인신매매꾼의 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또 노왕은 이런 임무를 맡아 본 적이 없으니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강왕 전하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분이 아니시니까요.”
“하하하! 산전수전을 다 겪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자네를 따를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강왕 전하께서 노왕 전하께 많이 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주운환의 이 말에 강왕이 짙은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하하하, 당연하지!”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의견을 얼마간 더 나누었다. 인신매매꾼들이 어디쯤에 숨어 있을지, 어떤 대책을 써야 할지 등을 의논했다.
주운환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연회가 파하자마자 강왕은 바로 술 주전자 두 개를 들고 노왕부를 찾아 노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 하려 하는가?”
노왕도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다니요? 휴, 형님, 저는 정말이지 형님이나 진서왕을 찾아가서 가르침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노왕이 강왕을 형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건 강왕의 부친이 공주의 아들이니 강왕에게도 황실의 피가 흐르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일대一代가 영녕군주였는데 성이 강씨라서 그때부터 사람들이 ‘강왕’이란 호칭을 썼다.
강씨 집안은 이름난 무관 가문으로 대대로 서북쪽을 지켜 왔고, 선황제가 강씨 가문의 용맹함을 기리기 위해 강왕 대代까지 작위를 강등하지 않아 아직까지 왕의 작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르침은 무슨, 같이 의논하는 거지!”
강왕은 이렇게 말하고 주운환과 나눈 이야기를 모두 노왕에게 전했다. 하지만 주운환과 함께 상의한 바라고는 밝히지 않았다. 노왕은 입이 가벼운 편이라 자칫 주운환이 의견을 냈다는 말이 새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되면 황제는 주운환을 더욱 멀리하게 될 것이다.
* * *
주운환이 집에 돌아오니 내실의 탁자에 물건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옥이며 귀한 분재며… 정말 많은 물건이 쌓여 있었다. 주운환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폐하가 내리신 거예요.”
엽연채의 이 말에 주운환은 움찔하고는 웃었다.
“아, 잘 챙겨 둬요.”
그날 서재에서 언쟁이 있은 후에 양왕도 말이 너무 심했던 것을 후회하여 물건을 잔뜩 내린 것 같았다. 사과인지 보상인지, 그게 아니면… 얼음장같이 차가운 군신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번 변하면 아무리 붙잡으려 노력해도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주운환은 양왕과 저를 묶어 주던 무수한 실들이 툭, 툭 끊어져 이제는 겨우 한두 가닥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부군, 이 물건들은 어떡할까요?”
엽연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어오자 주운환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곧 응성으로 떠날 텐데 그때 다시 정리해야 하잖아요. 그냥 두었다 가지고 가요.”
“좋아요.”
엽연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아, 집에 있는 상자들을 가져오렴.”
혜연이 곧 단향목이나 배나무로 만든 예쁜 상자들을 가져왔다. 엽연채는 주운환과 물건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상자에 담아 꼼꼼하게 봉했다.
* * *
노왕의 인신매매꾼 수사는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주운환은 아이들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여양을 시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에게 귀띔하라고 했다. 어떤 장소나 어떤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 후 노왕에게 언질을 주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노왕이 며칠이나 바쁘게 쫓아다녀도 여전히 어떤 소식도 없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정월 스무날이 밝았다.
오랜만에 열린 조회에서 대신들은 인신매매꾼 일로 마음을 졸였지만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황제가 이미 충분한 병력을 풀어 수사케 했고, 노왕이 수색에 나선 지 이제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 시점에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면 황제의 판단에 의심을 갖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그래서 정 부윤 역시 노왕의 소식을 간략하게 보고하고 곧 춘절 기간 동안 밀린 일로 화제를 돌렸다.
조회가 끝날 무렵, 양왕은 강왕을 불러 한시바삐 서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 이튿날에는 강왕을 위한 고별 연회를 열어 주었고, 강왕은 다음 날 부하들을 데리고 도성을 떠났다.
여드레가 흘렀다. 실종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다시 관아 앞에서 울부짖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도 요원해지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 부윤은 문을 나설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너무도 처량한 울음소리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시켜 이야기를 전하도록 했다.
“이 사건은 벌써 노왕 전하에게 넘어갔소. 여기 와서 울어도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없소!”
포졸들은 떠나지 않으려는 이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이튿날 조회에서는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노왕이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며 탄핵했다.
양왕은 노왕을 불러 질책한 후, 현 금위군 통령 방언동을 보내 함께 수색하게 했다.
다시 나흘이 지나고 도성 밖 작은 마을의 숨겨진 집에서 인신매매꾼 열댓을 잡았단 희소식이 마침내 들려왔다. 양왕은 범인들을 모조리 형부로 보내 처리하도록 했다.
붙잡힌 자들은 모두 자신이 인신매매꾼이라 자백했다.
“위에서 한 명에 스무 냥씩 주겠다며 도성의 아이들을 잡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래 작년 칠월에 벌써 한 무리를 데려갔고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하지만 요번엔 정말 턱 끝까지 추격해 오고 우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도망갈 수 없을까 무서웠지요.
일주일 전, 위에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부하를 보내 아이들을 데려갔습니다. 찾아온 이들에게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마을을 벗어날 것이냐고 물어보니, 데리고 마을을 나갈 게 아니라 죽일 거라고 했습니다. 며칠 내내 폭우가 내리고 있었으니 아이들을 큰 돌에 묶어서 천수하 하류에 던져 버린다고요. 저희에게는 잘 숨어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천수하는 도성에서 제일 크고 이 나라의 반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도성을 지나는 부분은 푸른 물결이 아름답게 일렁여 뱃놀이하기 좋지만, 반면 하류는 물살이 세고 물도 탁하다. 특히 폭우가 내리면 아무리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라도 들어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물살이 험해졌다.
하니 폭우가 내릴 때 아이들을 모두 거기에 내던졌고 게다가 뜨지 못하게 돌덩이까지 매달았다면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인신매매꾼은 모두 잡았지만 아이들은 결국 구하지 못한 셈이었다.
형부에서는 이 인신매매꾼들이 누구와 얽혀 있는지 찾으려 했지만 실낱같은 흔적도 찾지 못했다. 결국 인신매매꾼들은 모두 사지 거열형을 받았다.
노왕은 이 사건을 해결했지만 제때에 목숨을 구하지 못했기에 공도, 과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노왕에게 계속 인신매매꾼들의 윗선을 수사하라고 시켰다.
아이를 영영 잃어버린 부모들은 천수하 하류에서 울면서 향을 피웠다.
어떤 사람들은 시체라도 건지러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물살이 워낙 급하고 물이 탁해 물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러다가 떠내려가 실종된 사람도 있었다.
인신매매꾼 사건은 결국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정월이 지나고 꽃피는 봄이 성큼 다가왔다.
이월 초하루 저녁. 엽연채가 아기를 재우면서 말했다.
“내일이 초이틀인데 궁에 가야 해요?”
작년 팔월 초이틀, 양왕이 주요를 보게 한 달에 한 번씩 궁에 들어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양왕이 점점 주운환을 경계하고 멀리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다.
엽연채는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주운환이 자신들 사이에 누운 주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죠. 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그래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궁으로 향했다.
봉의궁에 가서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눴지만 엽연채는 확실히 양왕과 주운환 사이가 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또 태황태후에게 불려 수안궁으로 갔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이월 중순이 되었다. 엽연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왕부에서는 떠들썩하게 연회를 열었다.
이 무렵, 엽연채는 조앵기의 기일인 사월 열하루를 특별히 더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날이 지나면 그녀의 묘를 좋은 곳으로 이장할 것이었다.
주운환은 벌써 사람을 찾아 길일을 골랐고, 삼월 중순 궁에 첩자를 보내 양왕에게도 물어봤다. 궁에서는 금방 그리하라는 답신이 돌아왔다.
엽연채는 대답을 전하러 온 환관을 보았다. 왠지 마음이 시려 왔다.
엽연채는 작년 양왕이 즉위한 후 며칠이나 앓아눕고, 조앵기 무덤에 엎드려 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조앵기의 무덤을 옮기는 일에 양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게다가 기 공공도 아니고 그저 어린 환관 중 하나를 보내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폐하께서 모든 것을 전하께 맡기신다 하셨습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어깨를 맞대고 문가에 서서 멀어져 가는 어린 환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엽연채의 머릿속에는 그저 네 글자만 떠다녔다. 인생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