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7화
양왕의 눈길이 아래쪽의 상관수와 정 부윤을 스쳤다.
“짐도 알고 있다. 인신매매꾼이 또 나타났다지. 이렇게 됐으니 최선을 다해 잡아야지.”
너무나도 원론적인 얘기에 대신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는 참을 수 없던 여지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지난 칠월 인신매매꾼이 나타났을 때부터 정 부윤과 승은공이 반년을 쫓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습니다. 이래서야 백성들이 어떻게 믿고 따르겠습니까?”
새파랗게 질린 정 부윤이 털썩 꿇어앉았다.
“소신이 무능하여…….”
상관수도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져 함께 꿇어앉았다.
“소신도 최선을 다하였으나… 실마리를 찾을 때마다 계속 끊어졌습니다. 인신매매꾼이 보통의 잡범이 아닙니다. 소신, 소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폐하를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소신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자 합니다.”
주운환이 말했다.
“맞습니다, 폐하. 진서왕을 보내십시오! 작년 그 교활한 비적도 진서왕이 일거에 소탕했습니다. 설마하니 이번 인신매매꾼이 그 비적보다 더하겠습니까?”
주 선생이 반색했다.
“소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유 재상과 여지도 동의했다.
지금 상황에서 조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조정에 크게 실망할 것이다.
상석에 앉은 양왕은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살짝 두드리며 주운환을 바라보다 눈길을 들어 올려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노왕이 금위군 천과 경위영 군사 2천을 데리고 수색하라.”
노왕?! 주운환, 주 선생은 물론이고 다른 대신들도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폐하? 소신 말입니까?”
노왕 역시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걸어 나왔다.
“폐하, 소신은 진서왕이야말로 제일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얼굴의 여지가 말했다.
“소신도 진서왕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 선생도 여지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양왕의 차가운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용히 하라! 짐이 보내겠다면 보내는 거지, 너희들의 의견에 따라야 한단 말이냐? 노왕은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하니 분명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양왕의 눈빛이 주운환에게 닿았다.
“얼마 후면 진서왕은 응성으로 가야 한다. 도성에 무슨 사건이 생기면 그때마다 응성으로 달려가 진서왕을 불러다가 수사케 할 것이냐? 진서왕에게는 더욱 엄중한 임무가 있다. 바로 응성을 지키는 것이다!”
유 재상과 여지는 말을 잃었다. 황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나 주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든 일을 진서왕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다만… 노왕 전하는 이런 사건을 도맡은 경험이 거의 전무하시니 염려가 되옵니다. 하니 이리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진서왕은 얼마 후면 도성을 떠날 것이니, 도성 수호의 중대한 책무는 방 통령과 하 부통령이 맡아야 합니다. 하 부통령이 경위영 부통령직을 맡은 지도 상당히 되었고,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 도성까지 호위한 경험이 있으니 폐하도 하 부통령의 능력을 아실 것입니다. 소신 생각에 이 사건은 하배 부통령이 맡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 같습니다.”
“주 태부의 말이 맞습니다.”
여지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찬동했으나 상석에 앉은 양왕의 얼굴은 대번에 어두워졌다.
“하배는 이 일을 맡지 않는다! 짐은 노왕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만 물러가라!”
여지와 대신들은 서로의 얼굴만 힐끔대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 황제의 언동이 너무나 독선적이었다. 주운환에게 맡기면 금세 인신매매꾼들을 잡을 수 있는데! 그리고 이번 기회에 진서왕이 하배를 데리고 함께 수색하면 범인도 빨리 잡고 하배도 뭔가 배울 수 있을 테니 일거양득 아닌가.
그런데도 황제는 굳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진서왕을 묵혀 두고 눈에 띄지 않는 노왕을 기용했다! 물론 노왕이 기대보다 유능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기회를 줘서 확인해 볼, 그런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뭐 하자는 건가?
어떤 대신들은 황제가 진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조정의 수색이 성과를 내지 못하니 백성들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진서왕부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지 않았는가. 신하가 큰 공을 세우면 군주가 위협을 느끼는 법. 황제가 진서왕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 대신들이 하나둘 물러나고 주운환도 무거운 마음으로 어서방을 나섰다. 그는 다른 대신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다시 어서방으로 돌아갔다. 문 앞에 시립해 있던 환관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외쳤다.
“전하!”
“아뢰어라.”
주운환이 조용히 말했다. 환관이 하는 수 없이 안에 알리자 곧 기해가 뛰어나왔다.
“아이고, 아직 안 돌아가셨군요. 전하, 어서 들어오십시오.”
주운환은 기해를 따라 어서방으로 들어갔다.
“폐하.”
양왕이 그를 보며 먼저 물었다.
“주운환, 짐이 너를 중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냐?”
“아닙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신은 곧 응성으로 떠날 것이니 늘 폐하의 곁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은 하배가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배의 직무는 도성을 지키는 것이다. 하배가 도성을 벗어나 죄인을 추포하러 다니면 누가 짐의 명을 대기하고 있단 말이냐?”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하배가 위험한 일이 생겨 도성을 벗어나 적을 추적해야 할 일이 없으리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역신逆臣이 도성을 공격한다면 하배에게도 추적과 정탐 능력이 있어야 도성을 더욱 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담담한 설명에도 주운환이 물러나지 않자 양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훈련은 필요 없다! 하배에게는 이미 그런 능력이 있다!”
주운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폐하는 하배의 능력을 믿으시면서 왜 직접 나서지는 못하게 하시는지요? 하배를 내보내시면 더욱 빨리 죄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습니다!”
주운환 자신이 아직 경위영 통령을 맡고 있었다. 하배를 보내도 자신이 도성을 지키고 있을 테니 양왕의 말엔 어폐가 있었다.
더구나 인신매매꾼들은 작년 부윤과 상관수의 손을 벗어났을 만큼 교활하니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정에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주운환도 있고, 하배, 언동, 심지어 강왕도 있었다.
모두 쟁쟁한 무장들이니 누구를 보낸다 해도 노왕보다 성과를 내기 쉬울 터였다! 그런데도 황제는 굳이 노왕을 선택했다!
만약 노왕이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유괴된 아이들은 도성 밖으로 보내질 것이고 그리되면 행방은 묘연해지고 만다.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사라진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위해 범인들을 잡는 것 아닌가?
양왕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이번 일은 짐에게 계획이 있다. 주운환, 너는 네 일만 잘하면 된다.”
“폐하!”
주운환도 물러서지 않았다.
“운환!”
양왕이 어두운 얼굴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감히 짐에게 반기를 드는 거냐?”
주운환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절대 아닙니다! 소신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품어 본 적 없습니다. 그저…….”
“그저 뭐냐?”
양왕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높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네가 큰 공을 세웠다고 짐을 우습게 보는 거냐? 백성들이 너를 우러러보고 네 집 문 앞에 몰려와 사정을 하니 네가 정말 그들의 신이라도 된 것 같으냐?”
주운환은 가슴이 시려 왔고, 이내 그 마음은 깊숙이 침전했다. 그는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폐하, 소신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짐도 너를 믿는다. 물러가라!”
“네.”
주운환은 뒤돌아 나갔다. 멀어져 가는 주운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양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관아에 모여 있던 백성들과 진서왕부 문 앞에 모여 있던 백성들 모두 궁에서의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정에서도 이번 일은 중히 여겨 반드시 진서왕을 내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과연 얼마 후, 정 부윤과 그 수하들은 그들을 쫓아 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벌써 3천 명을 풀어 도성을 수색하게 하셨으니 다들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사람들은 드디어 한숨을 돌리고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몇몇이 황제가 이 일을 진서왕이 아니라 노왕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 곧 온 도성 안이 들끓었다.
“왜 노왕을 보낸 거지?”
“그러게, 진서왕이 나서야 하는 거 아니야?”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일이든 진서왕을 불러? 황제 폐하가 사람을 쓰고 병사를 내보내는 것만 봐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노왕 전하도 괜찮아.”
실종자의 부모들은 걱정이 되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힘없는 백성들이 감히 무슨 말을 하겠나. 그저 집에서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주운환이 집에 돌아가니 엽연채가 주요를 안고 수화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주운환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모자에게로 서둘러 걸음하니 옹알거리는 주요가 버둥대며 그의 품으로 넘어왔다.
“하하하, 아가.”
주운환이 낮게 웃으며 아기를 받아 안고 그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엽연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추운데 뭐 하러 나왔어요.”
엽연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나도 아기도 당신이 보고 싶어서요.”
주운환은 마음속의 짙은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평정심을 얼마간 되찾은 그는 모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아기의 목욕을 시켰다. 수건으로 아기를 깨끗하게 닦고 침상에 눕혀 재웠다. 주운환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엽연채는 주운환의 기색을 살폈다. 그의 기분이 내내 안 좋은 걸 보니 오늘 궁에 다녀온 일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기야 인신매매꾼 사건을 노왕에게 맡겼다고 했으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게 당연했다.
“우리가 응성에 가면 다 좋아질 거예요.”
주운환이 고개를 들어 엽연채를 보았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그분이 그럴 줄은…….”
“그럴 줄 몰랐어요?”
엽연채가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분은 황제세요.”
이 말에 주운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늘 양왕의 행동에 큰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양왕은 그냥 군주가 아니었다. 지위와 공명을 바라고 따른 사람이 아니었다. 양왕은 스승이고 아버지였으며 친형제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이 너무 커져 군주를 위협하는 지경이 되었더니, 끝내 양왕 역시 저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피하기 시작했다…….
“마님.”
이때, 주렴 밖에서 청유가 불렀다.
“어제 찾으라시던 작은 활을 내일 쓰실 건가요?”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대답했다.
“새도 없는데 필요 없어. 치워 둬.”
“네.”
청유가 뛰어나가는 기척에 주운환은 평상에 기대고 있다 소리 내어 웃었다.
“뭐 하는 겁니까?”
엽연채가 까르륵 웃으며 그 품에 안겼다.
“새를 잡으면 좋은 활도 필요 없어져요. 조심하라고요!”
가슴 가득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주운환이 그녀의 허리에 두 팔을 감쌌다.
“당연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침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