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3화
“하하, 주요라고 했지? 정말 사랑스럽구나.”
옆에 있던 상관운이 웃으며 주요의 손을 잡았다.
엽연채는 자연스레 상관운을 보았다. 상관운과 자신 사이에는 이미 깊은 골이 생겼으니 상관운은 주요를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관운의 태도에서는 별로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총애를 받더니 정말 마음이 누그러진 건가?’
그들은 궁에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까지 함께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태황태후가 엽연채와 이야기도 하고 아기도 보고 싶다며 사람을 보내 말을 전했기에 엽연채는 상관운과 함께 수안궁에 갔다.
태황태후까지 만나고 엽연채 부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신시申時(오후 3시~5시)였다.
* * *
칠월도 거의 끝나가니 날씨는 점점 시원해졌다. 곧 팔월이고, 중추절이 지나면 사람들은 옷을 더 껴입기 시작할 것이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내년 오월에 응성에 가기로 날짜를 미뤘지만, 엽연채는 미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들을 모두 목록으로 정리하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 추가했다. 빠뜨리는 게 있으면 안 되니까.
그러는 동안, 초가을은 한겨울이 되었다. 새해가 다가오고 관아를 봉인하기 전, 양왕은 돌아오는 오월이면 주운환이 응성으로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엽학문은 온 식구를 데리고 진서왕부로 찾아왔다.
운연거의 서차간.
바닥에 부드러운 깔개가 깔려 있었다. 엽연채와 혜연이 자리에 앉아 아기를 보고 있었고 주요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었다.
“마님, 어르신이 오셨어요.”
입구에서 소월이 소리쳤다.
“안으로 모셔라!”
엽연채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주요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리 오렴.”
주요가 까르륵 웃으며 기어가 엽연채에게 안겼다.
혜연과 청유가 바닥의 깔개를 정리하는 동안,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엽학문이 어두운 얼굴로 뒷짐을 지고 들어왔다.
“응성에는 왜 간다는 말이냐?”
엽연채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보며 되물었다.
“폐하께서 보내시는 건데 왜 제게 물으시나요, 할아버지?”
엽학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리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뒤따라온 묘씨가 그를 한번 흘겨보며 면박을 주었다. 웬일로 엽균과 원남옥 부부도 묘씨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왕비 마마.”
원남옥이 엽연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제야 엽연채의 신분을 다시 한번 자각한 묘씨와 나씨도 따라 웃으며 엽연채에게 인사를 올렸다.
“예는 무슨요, 괜찮아요. 할머니, 새언니, 어서 앉으세요.”
엽연채가 그들에게만 자리를 권하니 엽학문은 얼굴이 벌게져서 가슴이 들썩들썩했다. 그는 앉지도 않고 뒷짐을 진 채로 옆으로 돌아서 엽연채를 보며 또 한마디 했다.
“설마하니 폐하가 보내시는데 미리 언질도 주지 않으셨단 말이냐?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못 했는데.”
엽연채가 가면서 미리 그들에게 알리지 않은 걸 탓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할아버지. 저희는 오월에 떠나고 지금은 연말이니 반년 전에 알려 주셨는데 이게 미리가 아니란 말씀이세요? 그리고 저희가 가는데 할아버지가 무슨 준비를 하신다는 말씀이에요?”
엽학문은 조금도 저를 존중하지 않는 엽연채에게 몹시 화가 났지만 묘씨와 나씨, 원남옥이 모두 단정하게 앉아 있으니 차마 성질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에 그저 툴툴대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도 당연히 준비를 해야지. 너희가 가면… 우리도 선물을 준비해야 할 것 아니냐.”
“네, 그럼 그러세요.”
엽학문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세요.”라니? 사양하는 말조차 없었다. 이런 때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미리 할아버지께 해 드릴 일이 없는지 물어보는 게 맞지 않은가!
“아가. 하하, 펄쩍 뛰어 보렴.”
엽연채는 얼어붙은 엽학문에게서 신경을 끄고 주요와 놀아 주기 시작했다.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끼어 일으켜 세우자 아기는 작은 발로 어머니의 다리를 밟고 서서는 그 힘에 의지해 펄쩍펄쩍 뛰며 까르륵 웃었다.
“아기가 정말 잘생겼네. 볼수록 우리 연채랑 참 많이 닮았어.”
묘씨가 웃는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자 엽학문은 마음이 급해졌다. 몇 마디 더 이어졌다가는 자기가 하려던 이야기의 맥이 끊어질 것 같아 냉큼 입을 열었다.
“네가 가면 집안이 온통 뒤죽박죽 어지러워질 게다.”
엽연채가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럴 리가요! 여기에도 집 볼 사람을 남겨 둘 텐데 뒤죽박죽은요.”
“여기 말고, 우리 집 말이다.”
“나리, 뒤죽박죽은 뭐가 뒤죽박죽이란 말이세요.”
묘씨가 편을 들어 주기는커녕 쏘아붙이자 엽학문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지금 네가 힘이 있으니 이 기회에 하나밖에 없는 네 오라버니를 도와야 하지 않겠냐?”
이 말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모두 엽균을 바라봤다. 역시 깜짝 놀란 엽균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엽연채가 그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뭘 하고 싶은 게 있으세요? 엽승덕처럼 벼슬이라도 사고 싶어요?”
엽승덕 이야기를 꺼내자 엽균의 얼굴도 어두워져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관직이 뭐가 좋다고.”
엽학문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게 사 오는 한직이 뭐가 좋겠니. 그런 자리 말고. 이제 네가 왕비이고 운환이 진서왕이니 네 오라버니에게 제대로 된 관직을 하나 줄 수 있지 않느냐? 호부 원외랑이 잘못을 저질러 파직됐다던데 자리가 비어 있으니 네가 좀 힘을 써서 네 오라버니에게 맡기도록 해라.”
“나리! 이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묘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허, 이 여자가! 점점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이 집안 주인이 누구요?”
엽학문이 소리쳤다.
“할아버지,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관리가 되고 싶지 않아요.”
엽균의 얼굴도 핏기가 가셨다.
엽학문은 어깃장을 놓는 엽균 때문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저 변변치 못한 녀석! 그는 이번에는 원남옥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균이 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남옥이 조용히 웃었다.
“부군이 싫다면 하지 않는 게 맞지요. 그리고 부군은 자유롭게 지내던 사람인데 갑자기 관리가 되면 탈이 날 수도 있어요.”
원남옥은 혼인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오히려 엽균이 높은 관직에 올랐다가 지금의 안정적인 부부 사이가 틀어질까 봐 걱정만 되었다.
엽연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괜찮은 새언니다! 원남옥이 그때 엽균을 선택한 것만 봐도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들으셨죠? 오라버니와 새언니 모두 관리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오라버니 다리도 불편하잖아요. 몸이 불편하면 관리가 될 수 없어요.”
“고작 조금 불편한 것 아니냐! 이젠 눈에 띄지도 않아.”
엽학문은 화가 나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잘나가는 손녀를 두면 뭐 하나. 제 친오라비조차 돕질 않는데.
“할아버지. 설사 오라버니가 몸이 건강하고 또 관직을 원한다 하더라도, 제 한마디로 오라버니를 그 자리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엽연채는 기가 막히단 듯 웃으며 묘씨를 보았다.
“할머니, 지금 작은고모부의 관직이 뭐였죠?”
“병부 원외랑이지.”
사위 이야기를 꺼내자 묘씨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것 보세요. 탐화 출신 고모부도 십 년 동안 힘들게 공부해서 과거를 봤고 한림원에서 일 년을 공부한 후에야 원외랑에 올랐어요. 오라버니에게 어떤 공적이 있나요?”
아무 공적도 없는데 청탁으로 조정 요직에 넣어 달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이 주운환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할아버지도 과거 출신 진사시잖아요. 거기에 수십 년 동안 궁에서 관리 생활을 하시고도 관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두 잊으셨다는 말씀이세요?”
엽연채가 놀랍다는 듯 물어오니 엽학문은 화가 나고 수치스러웠다. 마음 같아서야 확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지금 결론을 내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는가 싶어 한참을 참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균이가 공적이 없어도 나는 있다! 내가 수십 년이나 조정에 나갔다 하지 않았냐. 지난번에는 상관수도 다시 발탁되었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끌끌 혀를 찼다. 이거였군. 앞서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던 거다. 엽학문 본인이 다시 조정에 입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관수는 이제 겨우 마흔이에요.”
엽연채가 조리 있게 안 되는 이유를 밝혔다. 묘씨도 거들고 나섰다.
“하나 나리는 칠순을 앞두셨죠! 정말 힘을 써서 조정에 돌아간다 한들 몇 년이나 관직에 더 계시겠어요? 그냥 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세요.”
“맞아요. 그리고 할아버지, 그건 부군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자리는 벌써 사람이 정해졌어요.”
엽연채의 이 말에 여태 조용히 있던 나씨가 궁금하단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구?”
“황후 마마 오라버니요. 부군, 고모부와 같은 과거 기수였는데 회시에서 떨어졌었죠. 원래 후년에 다시 보려고 했는데 황후 마마가 직접 천거했어요. 내년에 바로 임명될지도 모르지요. 이런데도 할아버지는 아직도 제 부군이 힘을 써 주길 바라시나요?”
엽연채가 차갑게 엽학문을 바라보았다.
엽학문은 하려던 모든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주운환에게 처가를 위해 자리를 하나 얻어 내라고 고집을 부릴 작정으로 쫓아왔는데, 하필이면 그게 황제가 자신의 처가를 위해 남겨 둔 자리라니! 어디 싸움이 되겠나!
“어머, 벌써 점심이네요. 청유, 어서 식사를 준비해라.”
천거 이야기가 이렇게 일단락되자 엽연채는 활짝 웃으며 청유를 불렀다. 그러고는 묘씨와 원남옥을 살가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할머니, 새언니,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준비시킬게요.”
“아무거나 괜찮다.”
묘씨는 환히 웃으며 손사래를 쳤고 원남옥도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는 엽연채 옆으로 와 앉더니 주요를 안아 보려 팔을 뻗었다. 하나 아기는 엽연채의 품을 파고들며 낯선 이에게 가려 하지 않았다.
원남옥이 웃었다.
“낯을 많이 가리네요. 그래도 정말 귀여워요.”
“내년에는 새언니에게도 분명 귀여운 아기가 생길 거예요.”
“하하하!”
“호호.”
집 안에 뭇웃음이 크게 울려 퍼졌지만 원남옥과 엽균만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엽학문은 어색하게 의자에 앉아 혼자 화를 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