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90화 (790/858)

제790화

상관운은 ‘계비’ 두 글자에 화가 났지만 사실은 사실이기에 그저 잔뜩 굳은 얼굴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럼 진서왕부에서 오는 길이시라고요?”

“그래.”

상관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왕부에 선물을 가지고 갔는데 점심시간에 밥도 주지 않아요?”

보통 오전에 손님이 오면 점심을 대접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단다. 진서왕 세자가 병이 나서 왕비가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데 내가 가서 번거롭게 한 거야. 왕부에 주인이 하나뿐이니 왕비가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으면 나 혼자 먹어야 하는데 그게 더 보기 안 좋지 않겠니? 내가 그냥 나오는 게 낫지.”

모친의 부드러운 말에도 상관운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집이 가난해서 엽연채 혼자 애를 보는 상황이라도 된단 건가? 유모, 여종, 어멈이 그렇게 많은데 아기 하나를 못 본단 말인가?

‘어딜 가라는 것도 아니고 손님과 앉은자리에서 함께 식사나 하는 건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면 될 일 아냐. 아기를 보느라 바빠? 하! 다른 핑계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고 아기를 본다는 하찮은 이유로 황후의 친모를 돌려보내다니. 본궁의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해.’

이때, 궁녀가 들어와 고했다.

“마마, 노왕 측비와 종씨 가문 대부인이 왔습니다.”

상관 부인은 딸을 좋게 달랬다.

“됐다. 성질내지 말아라. 어서 손님부터 안으로 모시거라.”

“흥……! 안으로 모셔라!”

상관운은 널뛰는 마음을 조금 가다듬고 바로 앉았다.

종씨 가문 대부인은 상관운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로, 그녀보다 두 살 많은 귀족이었다. 반면 노왕 측비과는 별 교분이 없었다. 상관 부인이 의아하단 듯 물었다.

“그 노왕 측비는 어디 공주라고 하지 않았니?”

“네.”

대답하는 상관운의 눈에 조롱 어린 빛이 스쳤다.

“남만 공주 고원요.”

“그래, 생각난다. 겁 없이 날뛰던 남만인들이 진서왕의 공격에 항복하고 공주를 내놓아 화친을 맺었었지. 결국 부친뻘 되는 노왕의 측비로 들어가서 작년에 노왕의 아들을 낳지 않았던가? 그래, 말하다 보니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 그 아이의 만월연에도 갔었구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발소리가 들려 두 모녀는 입을 다물고 정면을 응시했다. 상관운은 기품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꽃다운 나이의 여인 두 명이 들어왔고, 시중 둘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노왕 측비와 종씨 가문 대부인이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두 사람은 중앙으로 와 인사를 올렸다.

“일어나세……?”

상관운은 인사를 받다가 흠칫 놀랐다. 그녀의 눈은 노왕 측비와 종씨 가문 대부인이 아닌 그 뒤의 여종에게 멈춰 있었다.

열일곱 정도 되었을까. 눈에 띄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곱고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상관운이 놀란 것은 그 시종이 조앵기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상관운은 가슴이 떨려 와 적을 만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마.”

상관 부인은 상관운의 정신이 딴 데 팔린 것을 보곤 급히 그녀를 불렀다. 상관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앉으시지요!”

두 사람이 자리에 앉고, 종씨 가문 대부인이 먼저 말했다.

“특별히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황후 마마께 문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하하, 자상도 하셔라.”

상관운은 차를 권하며 그들과 담소를 나누었지만 그럴 기분이 전연 아니었다. 그녀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이 차를 한 잔 다 마시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얼른 그들을 보내려 했다.

“하필 오늘 본궁의 몸이 좋지 않아서요. 오신 김에 태황태후께 인사드리러 가 보시지요.”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떠났다.

상관운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상관 부인은 그 속내를 알 리 없으니 손님 대접에 소홀하다며 그녀를 꾸짖었다.

“왜 그러느냐? 손님들과 식사도 같이 하지 않고. 지금은 저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할 때인데 잘하는 짓이다.”

“어머니, 따라온 여종의 얼굴을 보셨어요?”

상관운은 난데없이 동문서답을 했다.

“어떤 여종?”

“종씨 가문 대부인 뒤에 있던 여종이요.”

“응? 그저 여종 아니니. 보고 말고 할 게 뭐 있다고?”

“조앵기와 닮지 않았어요?”

상관운이 입술을 꼭 깨물었고, 그제야 상관 부인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닮았구나.”

“폐하가 조앵기를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데 만약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혹시…….”

상관 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세상에! 네 말이 맞다. 네 아버지만 해도 예전에 굉장히 좋아하던 이낭이 병으로 죽었더니 두 달 후에 똑같이 생긴 이낭을 데리고 왔더라. 그게 바로 정 이낭이다.”

상관운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정 이낭은 부친의 총애를 돈독히 받는 여인이라 자신들 모녀도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줘야 했다. 더구나 지금 자신은 어머니보다도 부부 사이가 소원한 상황이었다.

“녹향아, 어서 태황태후 처소에 가서 지켜보고 있어라. 절대 폐하와 마주치게 두어서는 아니 된다. 무슨 수를 쓰든지 어서 궁에서 내보내라.”

이 말에 녹향이 다급히 밖으로 나가자 상관 부인은 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말거라, 폐하는 태황태후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상관운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어찌 막는대도 다음번도 막을 수 있을까요…….”

“어휴, 그러니까…….”

‘우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황제의 마음을 잡아야지.’

하지만 상관 부인은 차마 이런 속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금은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참고 기다려야 할 때였다.

“비슷한 사람이 어디 그리 많겠니. 넌 그저 네 몸이나 잘 챙기고 본분을 지켜라. 많이 생각해 봤자 도움 될 것도 없어.”

그때 궁녀가 식사를 준비해 오자 상관 부인은 딸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궁을 나섰다.

* * *

주요는 며칠을 앓고 겨우 열이 내렸다.

금위군이 도성을 떠난 후, 새 황제도 심신의 안정을 얼마간 되찾았는지 매일매일 정무를 처리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유월 초가 되어, 엽균이 아내를 맞이했다. 드디어 아들을 장가보낸 온씨는 정말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혼례도 순조롭고 도성에도 좋은 기운이 돌고 있으니. 다 잘 정리됐구나.’

하지만 이 평온은 한 달도 가지 못했다. 유월 말부터 새 황제가 시름시름 앓았기 때문이었다.

칠월 초하루가 되고 나서야 새 황제는 건강을 되찾았다. 여름, 날은 점점 더워져 엽연채는 아기를 안고 뜰의 해당화 나무 아래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엽영교도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아기를 바꿔 안고 있었다.

“왕비 마마.”

소월이 황궁 첩자를 들고 왔다.

“황후 마마가 보내신 황궁 첩자입니다.”

“그래.”

엽연채가 받아서 읽어 보고는 곧 접었다.

“왜? 뭐래?”

“칠월 초이레가 황제 폐하의 만수절이라고 큰 연회를 연대요.”

엽연채는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엽영교에게 사정을 들려주었다.

“큰 연회라니? 법도대로라면 선황제의 국상 기간이니 즉위식 말고는 황족이나 작위가 있는 사람들, 관직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일 년 동안은 혼인도 예식도 할 수 없잖아? 그래, 얼마 전에 균이가 신나서 혼인한 것도 작위도 관직도 없는 백성이라 할 수 있었던 건데. 다행히 정해진 혼례식이 서거 한 달 후이기도 했고. 여하간, 지금까지 즉위 직후엔 역대 황제들의 탄신연도 궁에서 조촐하게 했었는데…….”

“첩자에는 폐하께 병이 나셔서 경사스러운 일로 액땜을 한다고 하네요. 양기로 음기를 몰아낸다고요. 권세가 국상을 넘어서나 봐요.”

“흐음… 참, 폐하와 황후 마마 사이가 좀 좋아졌다며.”

주요에게 우유를 먹이던 엽영교가 무언가 떠올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운을 띄웠다. 그녀는 비밀스럽게 속삭여 왔지만 실은 엽연채도 벌써 들은 이야기였다. 엽연채는 조앵기를 생각하면 속이 상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좋게 대꾸했다.

“네! 백성들에게 좋은 일이죠. 정국이 안정되고 후궁도 안정되고요.”

“으앙……!”

엽연채 품에 안긴 진시용이 울음을 터트렸다. 주요가 들고 있는 대나무 호랑이 장난감으로 손을 자꾸만 뻗는 게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하, 염염이 이거 줄까?”

엽연채는 고개를 숙여 활짝 웃고는 엽영교 품에 안긴 주요에게 말했다.

“아가, 당고모에게 줄까?”

주요는 꼭 쥔 손을 놓지 않고 크고 동그란 눈으로 엽연채를 보며 옹알댔다.

“아야아…….”

“그래그래, 싫구나. 그럼 안 줄게.”

엽연채는 청유를 불렀다.

“염염이 가지고 놀게 방에 있는 장난감들을 가져오렴.”

엽영교가 웃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구나. 나는 다른 아이들이 놀러 와서 염염이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그냥 두는데.”

“어쩔 수 없어요. 아끼는 장난감이라 가져가면 우는걸요. 그리고 고모 말씀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는 지켜야겠지만 우리 아기를 속상하게 할 수는 없죠.”

엽연채는 고개 숙여 주요에게 입을 맞췄다.

“하하, 네 말도 맞아!”

엽영교도 크게 웃었다.

* * *

칠월 초이레, 만수절.

주씨 가문도 초대를 받았지만 진씨와 주묘서는 참석하지 않았다.

진씨는 주묘서의 처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망신스러워서 본인도 참석하지 않고 주비양, 주종과, 주묘화 모두 못 가게 했다. 결국 주 백야 혼자 참석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에는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본래 아버지가 죽으면 삼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했지만, 황실은 국가 차원의 연회나 다른 나라와의 왕래가 있으니 상복을 일 년만 입었다. 그런데 새 황제는 반년도 못 참고 흥청망청 즐기고 있었다.

도리에 어긋난다고 내심 흉을 보는 이들도 적잖았지만, 신이 잔뜩 오른 사람들도 많았다. 적어도 상관 가문 사람들은 대단히 즐기고 있었다. 최근에 황제와 황후가 금슬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상관 가문은 순식간에 기를 펴고 살게 된 것이다.

엽연채는 주운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자리는 천자와 가장 가까운 두 자리 중 하나인 좌측 상석이었다. 고개를 들자 한층 더 위에 앉은 양왕과 상관운이 보였다.

양왕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예전처럼 음침해 보이지는 않았다. 상관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엽연채는 자기도 모르게 조앵기가 떠올랐다. 예전에 궁중 연회에 참석했을 때는 양왕과 조앵기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조앵기는 자신에게 여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본인 앞에 놓인 토자포 세 개 중에 두 개만 먹고 하나는 몰래 숨겨 나한테 가져다주기도 했지…….’

엽연채는 괜히 속이 상해 고개를 숙이고 탕을 마셨다.

상관운은 엽연채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양왕 쪽에 놓인 화려한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 신첩에게 몇 개 집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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