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89화 (789/858)

제789화

어서방을 나온 주운환은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일 점심에 들어간다는 서신을 여양을 통해 엽연채에게 전했다. 그리고 곧 언서와 함께 도성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경위영에서 2만 9천 명을, 금위군에서 천 명을 데려다 3만 규모의 금린위를 조직했다. 새로 짜인 금린위는 복장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언서는 이튿날 아침 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도성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날 아침 양왕은 대신들에게 금린위가 태자의 잔당을 추격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여전히 의아해했다. 폐태자를 따르던 주범들은 모두 죽었고 남아 있는 거라곤 중요하지 않은 잔챙이 몇뿐이었다. 각 주의 부윤들에게 지켜보고 있다가 잔당을 발견하면 보고하라고 하면 될 일을, 일부러 사람을 풀어 쫓을 필요까지 있을까? 설령 확실히 하기 위해 군사를 풀어 쫓는다 해도 3만 명이나 필요할까?

대신들은 양왕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금린위가 정말 도성을 떠났다지만, 이들이 평복으로 갈아입고 도성으로 돌아와 자신들 곁에서 잠복이라도 하면…….

조정 대신들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한편, 백성들은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들이고 금린위를 조직해 파견하는 새 황제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일부는 새 황제가 진시황처럼 불로초를 찾으려 사람을 풀었다고도 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돌았다.

이날, 주운환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정오였다.

들어가자 시종과 어멈들이 전쟁터처럼 바삐 들락날락하고 있었고 집에서 약 냄새가 물씬 풍겼다. 주운환은 가슴이 철렁해서 바삐 들어갔더니 아기를 안고 어르고 있던 엽연채가 그를 보고 살짝 웃었다.

“오셨네요.”

“네.”

주운환이 다가가 아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마가 뜨거웠다.

“왜 또 열이 나지?”

눈시울이 붉어진 엽연채가 코를 훌쩍였다.

“날이 추워서요.”

“약은요?”

“먹었어요.”

엽연채는 침상에 앉았다. 품속의 아기는 벌써 잠들어 있어 침상에 살살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었어요?”

“도성 밖에 다녀왔습니다. 폐하께서 3만 도성 병사를 선발해 금린위를 만들라 하셨어요.”

주운환은 엽연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요.”

엽연채는 조용히 탄식했다. 도사와 승려들을 궁으로 불러들이더니 그다음엔 황제의 친위대를 조직해 파병했으니, 조앵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좋은 황제가 되라고 말씀 좀 잘해 드려요! 왕비를 책임지지 못했으니 백성이라도 꼭 지켜 내야죠. 상관운이 황후이니 저렇게 버려두지도 말고요. 안 그러면 문제가 생길 거예요.”

“아직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을 한들 듣지 않으실 테니 좀 기다려 봅시다.”

엽연채는 냉소하면서 속으로 양왕이 하는 짓을 욕했다. 속에 원한과 증오뿐이어서 결국 그 사달을 내 놓고는 이제 와 무슨.

하지만 양왕의 행동은 엽연채가 보기에는 잘못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잘못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자 일가만 해도 그랬다. 식솔들 전원이 몰살당했다. 역모와 무관했을 후원의 여인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그들이 뭘 알겠나?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하나 태자와 함께 모두 죽임당하는 모습에 백성들은 환호했다.

토자포 역시 ‘반드시 죽여야 하는 사람’,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양왕에게 잘못이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니 조앵기와 가까웠던 엽연채도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뒤늦게 후회하는 양왕을 조소했다. 그래도 싸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백성들이 불행해져서는 안 되는데…….’

* * *

이튿날 주운환은 평소대로 조정에 나갔다.

그가 떠난 후 아기는 또 열이 났고, 온 집안사람들이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바빠졌다.

아기는 내내 울면서 엽연채가 먹여 주는 것을 모두 게워 냈다. 엽연채 역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황에서 혜연과 청유, 새로 온 요 유모는 바삐 움직였다.

“마님.”

소월이 들어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상관 부인이 왔습니다.”

“무슨 일로?”

엽연채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문안을 오셨다고 합니다.”

“세자께서 병이 나 온 집안이 정신없이 바쁘고 마님도 한시도 자리를 뜰 수 없는데, 쓸데없이 오긴 왜 왔단 말이야!”

청유가 버럭 짜증을 냈다가 엽연채를 향해 말했다.

“혜연 언니더러 대신 맞이하게 하시지요!”

청유는 이럴 때 도움을 줄 시어머니도 동서도 집안에 없단 사실에 새삼 속이 상했다.

“어쨌든 승은공 부인이고 황후의 생모인데 어떻게 그런단 말이냐. 내가 가 보마.”

그러나 엽연채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며 각자에게 분부를 내렸다.

“소월, 부인을 화청花廳으로 모셔라. 혜연, 요 유모, 세자를 잘 봐줘.”

“네, 안심하세요. 왕비 마마.”

요 유모가 대답했다.

엽연채는 옷을 갈아입고 한 번 더 아들을 달랜 다음, 시녀 둘을 데리고 나섰다.

화청에 도착하니 상관운과 많이 닮은 부인이 앉아서 기다리다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왕비 마마.”

“안녕하세요, 부인.”

엽연채는 상관 부인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상석에 앉았다.

“어떻게 시간이 나셨나 보아요.”

엽연채와 상관 부인은 전에도 연회에서 인사만 했던 사이로, 제대로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세자가 만월이 지났다고 들었거든요. 국상 때문에 연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축하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축하 예물을 드리러 왔답니다.”

부인 뒤에 있던 여종이 여러 가지 함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제일 위에 있는 두 개의 함을 열자 위에 혈옥이 박힌 아기 은팔찌가 들어 있었다. 손으로 어루만지자 바로 따뜻해지는 것이 난옥이었다. 다른 함에는 팔보 장명쇄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앙에도 새빨간 난옥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혈옥은 흔히 볼 수 있지만 난옥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안목이 뛰어난 엽연채는 보자마자 진귀한 물건인 것을 알아봤다.

그러나 그 마음이 고맙지만은 않았다. 상관 부인이 왜 이렇게 후한 선물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친분을 쌓은 후 상관운 대신 양왕에게 말을 전해 달라거나 상관운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청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세자를 조산하셨다 들었어요. 이 북국에서 온 난옥을 가지고 있으면 온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고맙습니다, 부인. 소월, 받아 둬라.”

그래도 엽연채는 구태여 사양하진 않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 상관운을 돕지 않는대도 ‘진서왕’이라는 작위가 있으니 이 정도 선물은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은 상전이 부부와 세자뿐이라더니 과연 굉장히 조용하고 한적하네요. 황후 마마도 궁에서 몹시 여유롭게 보내고 있지요. 그런데 그 여유라는 것이 도리어… 아휴, 정말이지 복도 없지.”

상관운이 아직 합궁을 못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상관운과 상관 가문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소문만 나도 상관운과 상관 가문의 체면이 깎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관 부인도 상관운에게 참고 견디라고 했지만 소문이 점차 불어나자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황제에게 합궁을 권유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황제는 제멋대로인 사람인지라 그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고작 진서왕, 주 선생 그리고 언서 형제뿐이었다. 한데 주 선생과 언서 형제는 다른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라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운환과 엽연채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제일 나았다.

엽연채는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부인.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황후 마마와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으니 무슨 고민을 하시는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대답은 지난번과 같아요. 서두를 수 없는 일이니 기다리시지요!”

“하나… 왕비 마마, 밖에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상관 부인이 다급하게 말을 보탰다.

“그러니 기다리시는 게 더 맞습니다! 부인도 곤란하시고 상관 가문도 난처하겠지만, 폐하가 아직 힘들어하시니 황후 마마께서 부인으로서 부군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시지 않겠어요?”

엽연채가 단호한 얼굴로 일관하자, 상관 부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폐하는 황후를 책봉하기 전에 이미 부인을 맞이하셨었어요. 모두 조앵기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나요! 하니 계비로서 참고 견딜 것은 참아 내야지요. 신하인 여러분이 조금 억울해도 참아야지요. 폐하도 힘들어하고 계시는데, 여러분 마음이 편하자고 폐하가 불편하실 일을 할 수는 없지 않나요?”

황제를 불편케 한다니! 얼굴이 벌게진 상관 부인이 벌떡 일어나 부정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됐어요.”

엽연채가 웃으며 일어났다. 소월이 문가에서 이쪽을 두리번거리는 게 저를 찾는 모양이었다.

“부인의 성의는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어젯밤부터 열이 나서 아직까지 울며 보채고 있어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상관 부인이 흠칫 놀라더니 대답했다.

“왕비 마마의 시간을 빼앗았네요, 어서 가서 일 보세요.”

“네.”

마음이 급한 엽연채는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상관 부인은 진서왕부에서 나와 궁으로 들어갔다.

상관운은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져 턱이 뾰족하다 못해 날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상관 부인은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조용히 평상에 기대고 있던 상관운이 눈을 흘기며 말머리를 틀었다.

“어머니, 마침 잘 오셨어요. 함께 식사라도 해요.”

“그래.”

상관 부인은 대답을 하고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진서왕부에 만월 선물을 보내고 오는 길…….”

“거긴 뭘 하러 갔어요?”

상관운의 표정이 변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모친은 자신의 합궁 소문 때문에 엽연채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었던 게 분명했다.

“너 이 녀석, 왜 이러는 거니! 네 일이 아니면 우리가 그 집에 선물도 못 한단 말이야? 왕래하지 말아? 주운환은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가 아니더냐.”

상관 부인은 화가 나서 이마를 짚었으나, 상관운은 그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를 악문 채 빈정대며 대꾸했다.

“맞아요, 하하. 그래서 엽연채가 뭐라고 하던가요?”

상관 부인은 딸이 엽연채에 대한 편견 때문에 말을 곡해할까 걱정이 됐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더구나. 너도 괴롭겠지만 폐하라고 마음이 편하시겠니. 부인 된 몸으로 이럴 때는 네 넓은 아량을 보여 줄 때야. 어쨌든… 듣기 거북하긴 하지만, 네가 황후이지만 어쨌든 계비인 것은 사실이지 않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