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7화
상관운이 난각에서 기보를 보고 있는데 궁녀가 들어왔다.
“마마. 혜비와 사람들이 왔습니다.”
상관운은 눈썹을 움직였다.
“들여보내라.”
궁녀가 나가고도 그녀는 기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손에 든 기보를 완성하고 나서야 일어났다.
녹향은 그녀를 재촉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도로 삼켰다. 상관운이 그 여자들을 싫어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조앵기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옛 여인들이었다. 상관운이 그녀들을 불편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상관운은 황후다. 위엄을 보여야 마땅했다.
육 측비와 여인들은 안내를 받아 정청正廳에 들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관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솟구쳤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황후 마마 납시었습니다.”
금실로 봉황을 수놓은 다홍색 배자를 입은 상관운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리따운 외양의 그녀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행동이 침착하여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육 측비와 여인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일어나게.”
상관운이 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혜비와 숙비가 어쩐 일인가?”
육 측비는 제 품위에 다시금 굴욕을 느끼며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억지로 웃었다.
“방금 책봉을 받아서 특별히 마마를 뵈러 찾아왔습니다.”
반면, 육 측비보다 솔직한 진 측비는 곧바로 반감을 드러냈다.
“이번 책봉은 황후 마마께서 정하셨다 들었습니다. 저희는 오랫동안 폐하를 따른 사람들입니다. 특히 육 측비는 그동안 왕부를 극진히 보살피느라 노고가 많았습니다. 전에도 이품 측비였는데 폐하께서 보위에 오른 지금도 이품 비로 책봉받았으니 품계가 하나도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육 측비는 자신을 끌고 넘어지는 진 측비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꼭 이쪽이 불만이 많은 것처럼 앞에 내세우는 그 속이 빤했다. 이러면 만약 벌을 받아도 자신이 제일 먼저 그 벌을 받을 것 아닌가.
육 측비가 상황을 수습하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좌의 상관운이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 내가 쓰긴 했지만 결국 결정하신 것은 폐하이니 그게 폐하의 뜻이지.”
비빈들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진 측비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하나… 이 작위는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습니다. 관례대로라면 측비는 대부분 귀비 책봉을 받았습니다.”
상관운이 비웃었다.
“본궁이 벌써 폐하께 말씀드렸는데, 다들 오랫동안 폐하를 따랐으면서 아직까지도 황손을 보지 못했잖나. 누구든 나중에 황손을 낳는 사람은 다시 한 품계 올려 줄 것이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아무렴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여인들이 딸 하나 낳지 못했지 않습니까.”
녹향이 먼저 한마디 했다. 육 측비를 비롯한 여인들은 흠칫하더니 답답한 마음에 서로만 쳐다보았다.
육 측비는 더더욱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 자신들이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양왕이 아이를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거늘! 잠시 생각하던 육 측비는 눈빛이 달라지더니 빙긋 웃었다.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녹향 소저의 말씀은 맞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황제 폐하의 자손을 가지고 싶었습니다만… 하하, 임신을 해 본 사람은 양왕비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양왕비의 몸이 좋지 않아 계속해서 아기를 놓쳤지요.
마마는 모르시겠지만 우리 여인들 중 뭘 모르는 아이들은 몰래 임신을 했다 폐하께 들켜서 바로 맞아 죽었습니다! 마마는 저희를 오해하시는 겁니다.”
육 측비는 말과는 달리 ‘너도 알잖아?’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관운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항탁 위의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육 측비의 말은 그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새 황제는 조앵기 때문에 저를 냉대했다. 그런데 육 측비와 여인들은 그런 자신 앞에서 황제가 얼마나 조앵기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말하고 있었다. 상관운은 제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듯했다.
육 측비는 충격을 받은 상관운의 모습을 보자 아주 통쾌했다.
‘쯧쯧, 그러게 누가 나를 만만하게 보래?’
황후가 먼저 사람을 함부로 찍어 누르지 않았다면, 자신도 황후를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마마,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진 측비의 물음에 녹향이 상관운의 마음을 알고 대신 대답했다.
“마마께서 아까부터 머리가 아프시다 하셨습니다. 마마, 좀 괜찮으세요?”
상관운이 머리를 짚었다.
“좀 어지러워서. 다들 이만 물러가게.”
“네.”
진 측비와 여인들은 인사를 올리고 나갔다. 비빈들은 봉의궁을 나와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우리가 폐하를 따르며 갖은 두려움에 떨 때 한가롭게 상관 가문의 대소저 노릇이나 하고 있던 사람이. 폐하가 황위에 오르신 이제야 황후 자리를 꿰찼으면서 어딜 거저먹으려고! 그리고 우리를 고작 비에 책봉하면서, 뭐? 우리가 딸 하나도 못 낳았다고? 하하, 황후는 낳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진 측비가 씩씩대며 불만을 쏟아 냈고 주변에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황후를 냉대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들도 벌써 들어 알고 있었다. 황제의 괴팍한 성격을 생각하면, 흥! 지금에야 황후라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누가 알겠나.
육 측비와 사람들이 나가자 상관운은 찻잔을 깨부쉈다.
봉의궁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음장같이 냉랭해졌다. 궁녀들은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마.”
어린 환관이 무언가 고하기 위해 들어왔으나 상관운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는 차마 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느껴지자 상관운은 꼭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못난 모습을 훔쳐보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어 어색한 분위기를 쫓았다.
“무슨 일이냐?”
“마마께서 폐하의 동향을 지켜보라 하셔서 소인이 멀리서 보니 방 통령이 도사와 승려들을 이끌고 어서방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녹향이 깜짝 놀랐다.
“어서방은 몹시 중요한 곳입니다. 폐하께서 정무를 보시는 곳이 아닌가요. 어떻게 도사들이 들어갈 수 있답니까? 도사는 얼마나 되는데요?”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니 이삼십 명은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상관운은 자신이 어서방에 갔을 때 밖에서 가로막아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망신만 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방금 육 측비를 비롯한 그의 여인들이 또 조앵기를 입에 올렸다.
예민해진 상관운은 황제가 하고 있는 일이 조앵기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소가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듯 그의 마음을 얼결에 맞힌 셈이었다.
* * *
어서방.
양왕이 책상에 앉아 장계들을 뒤적이고 있는데 언서가 들어왔다.
“폐하, 고승과 도사들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라.”
양왕은 몹시 반색하며 들고 있던 장계를 집어 던졌다.
법화사 주지 요명대사 뒤로 스무 명의 승려가 뒤따라 들어왔고, 또 백발의 노인이 스무 명의 도사들을 이끌고 줄지어 들어섰다. 그들은 중앙에 서서 양왕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어서 오게.”
“감사합니다, 폐하.”
요명대사가 일어나 입을 뗐다.
“폐하, 어쩐 일로 저희 빈승들을 부르셨습니까?”
한 달 전 이들은 정선제의 장례를 주재했고, 법사가 끝나고 각자의 절이나 사원으로 돌아갔다. 그랬다가 며칠 전 새 황제의 소환을 받고 다시 한번 입궁한 것이다. 그들은 새 황제가 또다시 도성과 주변에서 유명한 고승과 도사들을 전부 불러들이자 당연히 놀라고 의아해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마 국운과 관련된 일인가?
“짐… 짐의 본처가 세상을 떠났네.”
요명대사와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일을 직접 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폐태자가 성루에서 밀쳐 떨어져 죽지 않았던가.
“아미타불. 악몽을 꾸십니까, 폐하? 빈승들이 최선을 다해 망자를 제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요명대사가 탄식하며 염불을 읊조렸다.
다른 승려와 도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양왕비가 비참하게 죽었으니 새 황제가 악몽에 시달려서 악귀가 된 그녀를 제도하려고 그들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하나 양왕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뜻밖의 말을 꺼냈다.
“짐은 자네들이 그녀를 부활시켜 줬으면 하네.”
“네?”
요명대사와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부활? 어디가 아픈 건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승려들과 도사들 모두 미친 사람을 상대한단 듯이 황제를 보았다.
“악귀를 쫓는 것이나 혼을 위로하는 것까지, 못 하는 것 없는 우리 대제 제일의 고승들이니, 분명 짐을 위해 그녀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네.”
이 말에 요명대사가 난처한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폐하……. 죽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양왕은 어두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하, 요명대사는 무능하군. 지난번 갈란군주 망부의 일처럼 말이야.”
요명대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게… 빈승, 빈승은…….”
“선황제는 그때 오씨 가문에 요명대사를 보내 상황을 살펴보라 하셨지. 대사는 갈란의 망부가 갈란의 혼인을 원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실은 갈란군주가 모두 꾸민 일이었지!’
양왕은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요명대사의 체면을 생각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그 일이 갈란군주의 간계에 불과했다고 밝히면 혼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귀신이나 혼령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는다. 그녀가 아직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있다면 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 혼을 잡아 둘 수는 있을 터.
“그때는… 빈승이 잘못 보았습니다.”
요명대사는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사죄했다.
그 일로 그의 명성도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양왕이 이름난 중과 도사들을 모두 부르겠다 하자 언서가 생각하다 요명도 빠지지는 않는 것 같아 함께 부른 것이다.
“폐하.”
백발 도사가 한 발짝 나섰다.
“요명대사가 지난번에는 실수를 한 것은 맞지만, 요명대사의 말이 맞습니다. 죽은 사람은 부활시킬 수 없습니다.”
양왕은 온몸에 한기가 들며 버럭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 승려들과 도사들은 매일 득도해서 신선이 된다, 영생을 얻는다, 선경으로 날아간다 하지 않는가? 우화등선은 믿으면서 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말인가? 사람 하나 살리는 것이 신선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