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86화 (786/858)

제786화

엽연채가 궁에서 멀어질 무렵, 상관운은 속이 상해 어머니 상관 부인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상관 부인은 불같은 성미를 가진 여인으로 아직도 새 황제와 상관운이 합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크게 화를 냈다.

“뭐 하는 짓이야? 아무리 계비라도 너는 정실부인인데 어찌 이리 내버려둘 수가 있는지!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오늘 진서왕비와 말씀을 나누었는데 폐하께서 양왕비를 잊지 못하셨다 합니다.”

녹향이 대신 대답했다.

“양왕비? 하하!”

상관 부인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양왕비는 양왕의 치욕이 아니었더냐? 양왕이 왕비를 싫어한 것은 온 도성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게다가 자기가 떠밀어 죽인 것 아니냐? 그런데도 왕비를 그리워한다고?”

상관운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녀의 자존심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맞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요. 어서 합궁해서 황자를 낳으실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녹향의 이 말에 상관 부인이 대답했다.

“방법이 무어 있겠느냐. 이젠 기다릴 수밖에. 우리 상관 가문을 보고 너를 황후에 책봉했지만, 이 자리는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자리는 아니다. 아직까지는 우리 상관 가문이 명예가 있다고는 하지만 예전만 못해.

더구나 진서왕이라는 기둥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 황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야. 우리는 그자를 이길 수는 없어.”

상관운이 붉은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돌려 버리니 상관 부인은 정색을 하고 탄식했다.

“뭐가 그리 급한 것이냐. 누가 알면 네가 못 참는 줄 알 게다.”

상관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하하, 틀린 말이라도 했니? 안심하거라. 죽은 사람인데 어찌 한평생을 그리워하겠니. 시간이 가면 흐려질 거다. 게다가 내 딸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엽연채 말고는 너에게 비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가라앉고, 부부 사이도 자연히 좋아질 테다.”

“네.”

상관운은 대답은 했지만 눈을 내리깔고 자기도 모르게 엽연채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직 조앵기를 그리워한다라……. 비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으나 상관운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언짢았다. 엽연채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그 평범하고 당연한 말 속에서 뚜렷한 악의가 느껴졌다.

‘엽연채는 조앵기와 사이가 좋았지. 하여 계비인 내가 총애를 받지 못하는 걸 내심 기뻐하는 건가?’

생각하니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이 큰 황궁에 갇히다시피 한 자신이 모욕당하고 있는데, 엽연채는 꾸미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는 아직 양왕비를 그리워한다고!

슬퍼하는 자신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난처해하는 황후의 모습을 보면서 친구 대신 원한을 풀어 줬다고 생각하는 걸까?

상관운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고, 왜 그러니? 걱정하지 말래도. 자, 이 어미를 위한 음식을 준비했다 하지 않았니?”

상관 부인은 성격이 급할 뿐,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상관운의 손을 두드리니 상관운도 그제야 웃어 보였다.

“네.”

상관 부인은 식사를 하고 궁을 나섰다.

상관운은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하여 잠시 생각하다 녹향과 함께 문을 나섰다.

어서방. 문을 지키던 금위군 둘이 상관운을 보고 다가와 인사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일어나라. 모두 있는 걸 보니 폐하는 안에 계시겠구나. 폐하를 뵈러 왔다.”

상관운이 웃으며 말하자 금위군은 곤란한 듯 대답했다.

“마마, 폐하께서 서재는 중요한 곳이니 마마를 포함한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소인이 대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상관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육 측비와 사람들이 궁에 들어왔는데 아직 작호를 내리지 않아 폐하께 어떤 작위를 내려야 좋을지 여쭈러 왔다.”

“기다려 주십시오, 마마.”

금위군 하나가 손을 모으고 대답하더니 들어갔다.

그는 곧 기해와 함께 나왔고, 기해는 웃으며 상관운을 맞이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기 공공.”

“폐하께서 마마의 말씀을 들으시더니 마마가 육궁六宮의 주인이시니 육 측비와 다른 분들의 품위는 마마께서 결정하라 하셨습니다. 폐하는 마마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신뢰하고 계십니다. 하하하.”

다른 황후였다면 황제의 이런 말에 굉장히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운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행동이 성의 없게 느껴져 더욱 속이 상했다.

“참, 오늘 저녁 본궁이 봉의궁에 음식을 준비할 테니 폐하께서 봉의궁에 와서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군.”

기해의 얼굴이 굳다가 금세 다시 펴졌다.

“소인이 지금 보고하겠습니다.”

기해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양왕은 책상에 앉아 있고 그 곁에서 언서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찾으시던 스님과 도사들이 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요공대사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양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땅을 석 자를 파더라도 찾아와라.”

“알겠습니다.”

언서가 손을 모으고 대답하는데, 발소리가 들리더니 기해가 양왕 곁에 와서 섰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오늘 저녁 봉의궁에 저녁 수라를 준비하신다고 걸음하시길 청하셨습니다.”

“안 간다.”

양왕의 눈빛이 차가웠다.

기해는 난색을 표했다. 치통에 고생하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상황이었다. 양왕의 성정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고 들었는데 과연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폐하…….”

언서는 양왕에게 몇 마디 간언하려 했지만 송장보다 못하던 며칠 전 양왕의 모습을 떠올리고 곧 입을 다물었다. 이제 겨우 조금 괜찮아졌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상심하지 말아라.’, ‘그만 내려놓아라.’ 등은 원래도 남에게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 스스로 행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애초에 감정이라는 것은 정리하겠다고 금방 그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시간이 약일 테니 지금은 폐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게 두는 게 상책이다.’

한편, 어서방을 나온 기해는 아직 기다리고 있는 상관운을 보고 황급히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마마.”

“뭐라시던가?”

“마마의 호의는 폐하께서 잘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정무로 바쁘시고 저녁에도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관운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본궁 대신 안부를 전해 드리고, 건강에 유의하시라고 당부드리게.”

“알겠습니다.”

기해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그를 뒤로하고 상관운은 돌아서서 걸음을 떼었다. 저 멀리 화원 뒤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기해는 웃음을 거두고 이마에 잔뜩 난 땀을 닦았다. 정말 모시기 어려운 주인이었다. 양왕의 곁을 따르다 보니 벌써 수명이 몇 년은 줄어든 느낌이었다.

봉의궁으로 돌아온 상관운은 평상에 누워 아무 말도 없었다.

녹향이 그녀를 위로했다.

“주인마님께서도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억지로 하려면 반감만 살 뿐이에요. 마마는 묵묵히 후궁만 잘 다스리고 계시면 돼요.

오늘 말씀하신 저녁 수라 같은 것도 폐하가 오시지 않으면 마마는 그저 어선방에 탕이라도 준비시켜 서재로 보내시면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정성을 보이시면 폐하께서도 어찌 마마를 몰라보시겠어요?”

상관운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날카롭게 소리를 내질렀다.

“싫다!”

“마마……!”

녹향은 얼떨떨했다.

“그렇게 하면, 본궁이 뭐가 되는 거냐! 작년에 유곡요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과 혼인했을 때, 데릴사위로 들인다고 비웃었잖아. 그 남편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내가 지금 유곡요와 다를 게 뭐가 있어.”

자신이 입궁한 후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서 눈이 벌게졌었다. 한데 혼례도 없이 책봉만 한 건 그렇다고 쳐도 아직 합궁도 하지 못했다. 유곡요 같은 이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배를 잡고 웃겠냔 말이다!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명문세가 출신이라는 신분과 선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중신이 아버지라는 것, 도성 제일 미녀라고 불리는 자신의 출중한 외모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부군은 저를 냉대했다.

그래 자존심도 버리고 엽연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황제를 찾아갔지만 또 거절당했다. 반가워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매번 먹을 것까지 바친다면 자신은, 자신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그런 짓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망신스러웠다. 오늘 낮에 엽연채 앞에서 자신이 어려운 처지라는 약점을 알렸지 않은가. 그런데 음식을 서재에 들여보낸다는 얘기까지 듣게 되면 엽연채가 얼마나 우스워하겠는가.

상관운의 성질을 알고 있는 녹향은 결국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곁을 지켰다. 상관운은 평상에 누워 한참 괴로워하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육 측비와 사람들의 명부를 가져와라.”

“네.”

녹향은 한숨을 내쉬며 나갔다.

그녀가 곧 화명책花名冊을 가지고 돌아오자 상관운은 명부를 열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 후궁을 잘 다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가 마음을 정리하면, 분명 자신이 좋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봐 줄 것이다.

상관운은 육 측비와 다른 여인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육 측비는 혜비에, 진 측비는 숙비에 봉했고, 나머지 첩들에게는 모두 비 아래의 작위를 내렸다.

그런 후, 어서방에 봉비封妃 명부를 보내자 양왕은 보지도 않고 그렇게 하라며 기해를 통해 명부를 봉의궁으로 돌려보냈다.

기해는 상관운에게 명부를 바치며 웃었다.

“폐하께서 마마가 아주 적절하게 작위를 내렸다 말씀하셨습니다.”

상관운이라고 해서 기해의 말이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지만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예부에서 준비해 책봉하도록 하지.”

이튿날 아침 모든 일을 마치고 기 공공이 직접 육 측비와 여인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곳에 가서 이들을 책봉하고 거처를 안배했다.

육 측비와 진 측비는 자신들의 작위가 비에 불과한 것을 보고 화가 나 뒤로 넘어갈 뻔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양왕과 함께한 여인인데, 비라니, 고작 비!

특히나 육 측비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앵기 같은 것은 황후가 될 수 없으니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설사 조앵기가 황후가 된다 해도 그 권력은 자기 손에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양왕이 덜컥 새로운 황후를 얻은 것이다.

새 황후가 생긴 것은 그렇다고 쳐도 자신이 얼마나 온갖 고생을 하면서 왕부를 다스렸는데… 고작, 겨우 비라니!

이 책봉을 황후가 결정했다는 말을 듣자 화가 더욱더 치솟은 그녀는 봉의궁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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