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5화
이튿날 주운환은 묘시卯時(오전 5시에서 7시 사이) 반쯤 일어나 조정에 나갔다.
엽연채는 진시辰時(오전 7시에서 9시 사이)가 되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제민과 궁으로 들어갔다.
봉의궁에 도착하자 오품 이상의 고명부인들이 모두 와 있었다. 진시 반, 마흔 초반 정도인 마마가 웃으며 나와 부인들에게 들어가서 황후를 문안해도 된다고 했다.
엽연채와 제민이 앞장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금박으로 봉황 무늬를 새긴 단향목 평상에 열일고여덟 정도 된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금실로 봉황을 수놓은 배자를 입고 머리에는 날개를 펼친 봉황이 구슬을 물고 있는 모양의 금장식을 꽂고 있었다. 일국의 국모다운 아름다운 용모와 고귀한 기품을 갖춘 모습이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부인들이 예를 올리자 상관운이 손을 들었다.
“일어나시오들.”
이들이 일어나자 상관운은 엽연채를 보며 말했다.
“진서왕비의 산후조리가 끝났군요. 폐하의 즉위식이 끝난 후 바로 여러분을 만나려 했는데… 우선 폐하의 옥체도 편치 않으시고, 진서왕비도 아직 조리 중이어서 올 수 없으니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말이지요. 왕비가 없으면 부인들도 중심이 없는 것 같지 않겠어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마마. 고명의 중심은 당연히 마마이십니다.”
엽연채의 답례에 상관운은 잠시 멍해졌다. 고명의 중심은 분명 황후 자신이었다. 방금은 자신이 엽연채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어서 했을 뿐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심사숙고하여 현명하게 행동했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머리가 멍해져 말실수를 한 것이다.
상관운은 금방 웃으며 말을 받았다.
“본궁 밑으로는 바로 진서왕비라 그리 말했네요. 자, 왕비와 부인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엽연채는 유 부인을 비롯한 지위가 높은 부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뒤에 서 있었다.
상관운은 그들과 한담을 나누다 식사를 했다.
식사 후, 부인들이 물러나려고 인사를 올리자 상관운이 엽연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궁이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진서왕비는 남아 줘요.”
유 부인과 일행들이 나가자 상관운은 마음을 놓은 듯 한숨을 쉬며 다가와 엽연채의 손을 끌었다.
“다들 갔으니 이제야 우리끼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엽연채는 멈칫했으나 먼저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마마, 잘 지내고 계십니까?”
“연채,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 우리끼리 있을 때는 이름만 불러요.”
상관운이 엽연채를 끌고 대전을 나와 난각으로 가 평상 위에 앉혔다.
“우리 여기 앉아서 그간 못 한 얘기를 나눠요.”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그녀 곁에 앉았다.
“궁에서 지내는 건 괜찮으십니까?”
상관운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아직… 네, 그래도 괜찮아요. 한데… 힘든 게 있어요…….”
잘 차려입은 예쁜 궁녀가 차를 내오더니 상관운 곁에 섰다. 상관운의 심복인 녹향이었다. 상관운은 색색의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가… 날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입궁한 후 한 번도 내 처소에 오시지 않았어요…….”
옆에 있던 녹향도 말을 거들었다.
“혼례를 치르지 않은 것만 해도 마마께서 많이 섭섭해하셨는데 즉위식이 있던 날 폐하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셨습니다. 금위군 통령 방 대인께서는 폐하가 하시던 대로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마도 곁에서 보살펴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도 폐하는 마마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기 공공은 폐하가 심한 감기에 걸려 마마께 옮길 수 있으니 봉의궁에서 쉬라 하셨다고 합니다. 저희 마마는 이제 갓 시집을 와서 모든 것이 생소하고 부끄러우시니 폐하와 공공의 분부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속을 썩이셨는데, 얼마 전 폐하의 상태가 호전되어 등청하신 후에도 마마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상관운은 속이 상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난, 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왜…….”
엽연채도 새까만 눈썹을 째푸렸다가 입을 뗐다.
“폐하는 양왕비를 그리워하시는 겁니다.”
상관운은 잠깐 멍했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오랫동안 부부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내가 부인이에요, 나도 힘들어요.”
조앵기를 떠올리자 엽연채는 더욱 괴로워졌다. 조앵기의 남자에게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라 말해야 하는 이 마음은… 정말이지……. 하지만 상관운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엽연채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마, 우선 좀 기다려 보시지요. 이런 건 서두를 수 없는 일입니다.”
상관운의 눈이 새빨개졌다.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난 정말 그분을 사모한단 말이에요.”
엽연채가 어리둥절해졌다.
“그분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해요.”
상관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2년 전, 우리 같이 잡혀갔던 일 기억나요? 그분이 날 구해 준 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지만, 그때는 왕비도 있는데 어떻게 헛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분이 나에게 청혼을 하시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투였으나 그 속에는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이왕 이렇게 오래 기다리셨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엽연채가 같은 소리를 반복하자 상관운은 기분이 상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고인은 이미 떠났으니 연채가 폐하께 말을 잘해 주면 어떨까요. 진서왕이 폐하와 가까우니 연채가 폐하를 뵙는 게 제일 쉽지 않겠어요?”
엽연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마마, 무슨 말을 하라는 말씀이신지요?”
녹향이 얼른 주인 대신 나섰다.
“그야 별말이겠습니까. 왕비 마마가 연회에 양왕비를 부르시는 것을 소인도 여러 번 봤습니다. 양왕비는… 친한 사람이 없어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진서왕비와 잘 지냈던 것을 보면 두 분 사이가 좋았다는 거겠지요. 온 도성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 아니셨습니까?
폐하께선 양왕비를 그리워하시지만 양왕비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니 왕비 마마는 그저 폐하께 양왕비는 본처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황제를 보살피지 못했던 점을 늘 자책했고 누군가 대신 폐하를 잘 보필하기를 바랐었다고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참, 진서왕 전하가 양왕비의 시신을 수습하셨다 하니 양왕비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전하에게 ‘폐하를 원망하지 않고 그저 황후와 백년해로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라고 말했었다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얼른 마음을 접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듣는 엽연채는 가슴이 답답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관운도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며 엽연채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엽연채는 온 힘을 다해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 말씀이야 드릴 수 있지만, 어떻게 죽은 사람을 두고 없었던 일을 거짓으로 고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연채.”
미간을 찌푸린 상관운이 다급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저 폐하께 말이나 해 달라는 거예요. 선의의 거짓말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요. 양왕비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착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으니 폐하를 원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폐하가 저보다 더 잘 아세요. 누가 그분보다 양왕비 성격을 더 잘 알겠어요? 제가 그런 거짓말을 한들 폐하가 믿으실까요?”
엽연채가 거듭 거절하자 상관운은 그대로 굳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채… 난…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있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리시면 됩니다. 폐하께서 직접 황후로 책봉하셨으니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런데 위험을 감수하고 저더러 없던 일을 꾸며 내라 하셨다가 폐하께서 마마를 의심하시기라도 하면, 득보다 실이 크지 않겠습니까?”
상관운은 아무 말도 없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왕비 말이 맞아요, 내가 조급했군요.”
“마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마의 것은 마마에게 올 것입니다. 폐하께 말씀을 올리라고 저도 부군에게 전하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아이가 찾을 수도 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요, 가 봐요.”
엽연채가 일어나며 인사하자 상관운도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엽연채는 공손하게 돌아 나갔다.
엽연채가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자 상관운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했다. 뻣뻣해진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마…….”
녹향이 난처해하며 입을 뗐다. 상관운은 입술을 꽉 깨물고 수치스러운 얼굴로 소리를 쳤다.
“이런 망신이 없다!”
“그럴 리가요.”
“어딜 봐도 그렇잖으냐.”
상관운은 화가 나서 눈까지 새빨개졌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은 봉황 무늬가 들어간 치마를 꽉 잡고 있었다.
자신은 황후다. 그런 자신이 체면을 내려놓고 엽연채와 언니 동생 해 가며, 심지어 자신의 약점까지 드러내며 도움을 청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엽연채에게 뭘 시켰길래? 사람으로서 못 할 큰일을 시킨 것도 아니다. 그뿐인가. 엽연채가 도우면 자신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서로 도우며 지내는 것이다. 이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굳이 본궁을 난처하게 하고 거리를 벌리는 이유가 뭐란 말이냐.’
한편, 봉의궁을 나선 엽연채는 동화문으로 걸음했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제민과 혜연이 다가섰다.
“연채야.”
“어머, 아직 안 갔어? 간 줄 알았는데. 자, 집에 가자.”
엽연채는 저를 반기는 제민을 끌고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서 제민이 봉의궁 일을 물었다.
“왜 너만 따로 부른 거야?”
엽연채는 못 할 말 없이 가까운 사이인 제민에게 상관운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제민과 혜연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제민은 흥분한 채 황궁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욕을 했다.
“나쁜 년!”
“쉿!”
엽연채가 바로 진정시켰다.
“흥분하지 말아.”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어. 참, 연채야. 너 그 사람이랑 정말 그렇게 친해?”
“그럴 리가. 너랑 그 사람 사이하고 비슷하지 뭘.”
“제민 소저…….”
얼굴이 창백해진 혜연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래도 황후 마마십니다.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황후 마마도 혼인 후 합방을 못 하고 있으니 곤란할 것이고, 이 일이 새어 나가면 망신 아니겠어요.”
그러나 제민은 여전히 차갑게 내뱉었다.
“예전에는 밉지 않았는데 지금은 정말 미워. 가엽지도 않고. 난 이기적인 사람이라 동정심이 없거든. 황후가 된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지만, 난 저 여자가 싫어. 어떻게, 토자포의 남자를 차지하려고 안달이 나 있단 말이야!”
엽연채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도 마음이 한쪽으로 쏠린 평범한 사람이라 상관운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낼 수 없다는 건 알았다.
어쨌거나 황후이니 공경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어차피 조만간 응성으로 가고 나면 만날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