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4화
부인들이 웃으며 자리에 앉자 여 부인이 입을 열었다.
“제 현주가 왕비 마마와 가깝다더니 현주도 마마를 보러 왔군요! 오, 이분은… 그렇지, 진 상서 댁 며느리 아니세요!”
“네.”
엽영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예전 진씨 가문이 한직에 있을 때는 아무래도 연회에 참석할 일이 많지 않았고, 진무가 승진을 한 후에는 임신을 하면서 부인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었다.
청유가 차를 내오자 엽연채가 농담 삼아 말했다.
“저희 고모와 제민이 온 걸 보고 부인들도 공짜 밥을 드시러 오셨나 봐요?”
세 부인도 따라 웃었다.
“왕비 마마의 조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뵈러 왔어요. 드릴 말씀도 있고요.”
유 부인이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요?”
“왕비의 품계가 저희 고명부인 중 가장 높으시잖아요. 새 황제가 즉위하시고 새 황후를 책봉하셨으니, 왕비 마마께서 저희 고명부인들과 함께 한번 황후 마마를 찾아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동안은 폐하의 옥체에 병환이 있고 왕비 마마도 아직 조리 중이니 황후 마마도 저희를 만나 주실 상황이 아니었지요. 이제 마마의 조리도 끝났으니 문안 첩자를 보내 내일 함께 궁으로 들어가 황후 마마를 뵙는 게 어떨까요?”
유 부인의 말에 엽연채는 멈칫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말씀이 맞아요. 지금 첩자를 써 보내 황후 마마의 대답을 기다려 보지요. 청유야, 첩자를 가져와라.”
청유가 진서왕부 첩자를 가져왔고 엽연채가 글을 써 바로 궁으로 보냈다.
엽연채는 식사를 준비시켜 제민, 엽영교, 세 부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서차간에 앉아 있는데 청유가 궁에서 돌아왔다.
“뭐라고 하십니까?”
첩자를 읽는 엽연채에게 유 부인이 물었다.
“허락하셨어요.”
“하하, 드디어 제대로 황후 마마의 얼굴을 뵙게 되었네요.”
엽연채는 억지로 웃었고 제민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심중이 편치 않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손님들과 얼마간 더 담소를 나누었다.
세 부인이 돌아가자 엽연채가 밖을 살펴봤다.
“몇 시나 됐니?”
“미시未時(오후 1시부터 3시 사이) 이각입니다.”
청유가 대답했다.
“아직 이르네. 교외를 다녀오려 하는데, 제민이도 같이 갈래?”
조앵기를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제민이 살짝 놀라더니 얼른 대답했다.
“좋아, 지금 바로 가자.”
엽영교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오후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녀는 말을 하던 도중 깨달았다. 내일 아침에는 새 황후를 만나러 궁에 들어가기로 정해졌으니, 그럼 새 황후를 먼저 만나고 조앵기를 보러 가는 게 된다. 조앵기가 상관운 뒤로 밀리는 것이다.
상관운이 황후이긴 하지만 따지자면 계후였다. 조앵기야말로 정황후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엽연채와 제민은 늘 조앵기 편이었으니 그녀를 섭섭하게 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지금 당장 서둘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럼 나도 갈게.”
엽영교는 얕은 한숨을 쉬며 이리 말했다. 조앵기와 가깝지는 않았지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외로운 사람이었으니 새 친구를 좋아할 성싶었다.
“아니에요, 고모. 오늘은 저와 제민이만 갈게요. 고모는 다음에 같이 가요. 오늘은 대신 아기를 좀 봐 주세요.”
“그래.”
엽영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유, 부군을 불러 줘.”
“네.”
청유가 나가고, 혜연은 조앵기를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선한 제수 용품을 준비하기 시작해 금방 구색을 갖추었다.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황량한 교외에 도착했다. 저 멀리 작은 무덤 하나가 보였다. 무덤에는 목비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조씨앵기지묘趙氏櫻祈之墓’. 신분도, 칭호도 없이 그냥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엽연채는 멀리서 보고 눈가가 벌써 촉촉해졌다.
절로 조앵기가 떠올랐다. 복숭아꽃이 수놓인 다홍색 비단 웃옷에 긴 분홍색 치마를 입고 팔보 영락 목걸이를 한 조앵기는 보석이 박힌 꽃신을 신고 머리를 양쪽으로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수놓은 붉은 띠를 나풀거리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연채야.’
활짝 웃는 조앵기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귓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여기 묻혀 있었다. 사무치게 애처로웠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둘이 가 봐요.”
이리 권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운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폐하도 오셨었습니다.”
“아…….”
엽연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만 제민과 함께 바구니를 들고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제민은 이미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너 이 토자포야, 어떻게…….”
엽연채는 향을 올리고 무덤 앞에 접시를 꺼내 놓았다. 접시 위에는 궁이 아닌 회미천하에서 가져온 토자포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본래는 내일 주운환이 입궁할 때 궁에서 신선한 것을 가져다 달라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되면서 시간이 없었다.
‘앵기야. 궁의 것은 아니지만 모양과 맛은 제일 비슷해. 세 개면 돼? 모자라면 다음에 또 가져올게. 그 남자가 후회하고 있어. 너도 그 사람이 우는 것 들었지? 아직도 미워? 아니다, 미운 게 당연하지! 다음 생이 있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그러지 마. 너무, 너무 아프잖아…….’
산들바람이 불어와 무성한 풀잎들이 살짝 누웠다. 오월의 날씨는 따뜻했지만 얼굴에 닿는 바람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일행은 제사를 치르고 진서왕부로 돌아왔다. 엽연채는 제민에게 집에 가지 말고 전에 머물던 객사에서 자고 다음 날 함께 입궁하자고 했다. 제민은 흔쾌히 응했고,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그녀와 여종들은 모두 쉬러 갔다.
엽연채는 무거운 마음으로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주운환에게 말을 걸었다.
“부군은 다음 생이 있다고 생각해요?”
주운환은 아기를 안고 물을 먹이다가 그녀를 위로했다.
“분명히 있습니다. 왕비는 착한 사람이었으니 다음 생에는 분명 좋은 집에 태어나서 많은 복을 받을 거예요.”
하나 엽연채가 생각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만약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앵기는 어떻게 할까요?”
주운환은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대꾸했다.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어요?”
“아니… 다음 생이 있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는 건 알아요.”
엽연채는 긴장한 듯 주운환을 보았다.
“네?”
주운환은 살짝 웃음 지으며 고개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걱정 말아요, 왕비는 분명 좋은 집에서 다시 태어날 겁니다.”
“아니요,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난… 난…….”
엽연채는 창백한 얼굴로 진지하게 주운환을 바라보았다.
“만약 전생에 내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했었다면 싫을 것 같아요?”
주운환은 엽연채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살짝 놀라 아기를 그녀 품에 건네고 그들 모자를 품에 안았다.
“그럴 리가요. 전생은 전생이고 현생은 현생입니다. 부인은 지금 내 사람이에요.”
엽연채는 행복해하며 그의 품에 안겼다.
“난… 긴 꿈을 꾼 것 같아요. 전생에선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었어요…….”
주운환이 깜짝 놀랐다.
엽연채는 그에게 전생의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해 줬다.
주운환은 얼떨떨한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엽연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지만, 이렇게 기묘한 일을 어찌 쉬이 믿을 수 있겠는가.
믿지 못하는 듯한 주운환을 보자 엽연채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만약 겪어 보지 않았다면 적성대에서 제민이 질 것을 어떻게 알고, 은정랑의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 후의 많은 일들을 막지 못했지 않습니까.”
주운환은 놀라워하면서도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때는 이미 외진 별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에요.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난 일 년도 되지 않아 죽었거든요.”
주운환은 그녀가 그리 허무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장박원과 은정랑 두 사람이 당신을 죽게 한 겁니까?”
엽연채는 움찔했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때문인 것도 있고 나 때문인 것도 있어요. 다시 살면서 나는 나의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성실한 사람과 혼인하고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주운환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실한 사람? 그게 바로 나예요? 하하하하!”
주운환이 침상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자, 엽연채는 정색을 하고 눈을 흘겼다.
“이렇게 성실하지 않은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전생에서 내가 시집을 간 후 이채는 당신과의 정혼을 취소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하며 집을 나가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고 했어요.”
푸훕! 입바람을 터트린 주운환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됐다면 분명 서북으로 가서 강왕의 수하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게 원래 계획이었다. 신분을 숨기고 강왕 밑으로 들어가 뜻을 이루고자 했었다.
주운환이 엽연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문질렀다.
“내가 지금 전생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부인을 얻지 못할 뻔했군요.”
엽연채의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따뜻해져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낭군, 부군, 운환…….”
“네.”
주운환은 그녀를 꼭 껴안으며 웃었다.
엽연채는 그 품에 안겨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다시 살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아마도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역겨운 짓들을 벌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 세상에 다시 온 데에는 그 밖에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 성싶었다.
바로 눈앞의 이 남자와 혼인하는 것이었다.
“나도 다시 태어났는데 조앵기는 어떨까요?”
엽연채는 희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주운환이 흠칫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그런 일이 정말로……. 그는 엽연채가 긴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생한 꿈을 꿨거나, 아니면 어쩌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주운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의했다.
“분명 그럴 거예요.”
“응.”
엽연채가 활짝 웃었다. 주운환도 따라 웃었다. 만약 그녀가 말한 전생이라든지 하는 말들이 한바탕 꿈이었다면 지금 조앵기의 일도 꿈인 건 아닐까?
“으앙……!”
그때 침상 위의 아기가 울기 시작했고 엽연채는 서둘러 아기를 안았다.
“그래그래, 이 어미가 재워 주마.”
아이를 달랜 후, 부부는 함께 누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