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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783화 (783/858)

제783화

엽연채는 주 백야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혜연이 돌아오자 주 백야는 황급히 나 의정, 혜연과 함께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저녁 술시戌時(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무렵에 혜연이 진서왕부로 돌아왔다. 청유와 소월 등이 돌아오는 혜연을 보고 다가가 둘러쌌다.

“무슨 일이에요?”

혜연이 미간을 찌푸리고 차갑게 내뱉었다.

“무슨 일은,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벌 받은 거지. 목숨은 건졌지만 앞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다더라.”

몇이 놀라 탄식하자 청유가 말했다.

“벌 받은 거예요.”

“됐어, 그런 재수 없는 일을 계속 말해서 뭐 해. 우리 기분만 상하지.”

혜연이 일축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흘의 휴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나흘째, 백관들이 조정에 나갔으나 기해가 초조한 표정으로 나와 이리 안내할 뿐이었다.

“폐하께 병환이 생겨 사흘 더 쉬겠습니다. 시급한 정무는 진서왕 전하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조정 대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황제에게 문안을 가야 하지 않냐는 말을 주고받았고, 기해는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나 의정이 폐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 했습니다. 폐하도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계실 겁니다.”

주운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신들은 하는 수 없이 가져온 장계를 주운환에게 건네줬다.

주운환이 일을 마무리하고 조정을 나서며 기해에게 무언가 물어보려는데 언서가 다가왔다.

“전하.”

“언서, 폐하는 어떠십니까?”

언서는 이제 금위군 통령이었다. 그 자리는 늘 양왕 곁을 지키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양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런 줄 알고 주운환도 그에게 물은 것이었다. 기해가 양왕의 측근 환관이지만 가깝기로 따지면 역시 언서 형제를 따라올 수 없었다.

언서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주운환을 끌고 대전을 나와 입을 열었다.

“함께 가시지요!”

주운환은 언서를 따라 동화문에 도착해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두 사람은 성문을 나서 황량한 교외로 향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새가 울고 아름다운 화초가 자라는 사월의 들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주운환은 이 특별한 풍경을 즐길 새가 없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인지하자 가슴이 점점 옥죄어 왔다.

그리고 언서는 주운환이 예상했던 그곳에 멈춰 섰다. 주운환과 언서는 긴 풀을 헤치며 지나갔다. 봉긋 솟은 새 무덤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넓게 펼쳐진 보라색 망포는 잔뜩 더러워져 있었고 새까만 머리칼에도 진흙이 엉겨 붙어 있었다. 양왕이었다.

언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사흘을 엎드려 계셨습니다!”

주운환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깊이 내쉬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양왕비 조앵기의 묘였다.

조앵기의 시신을 수습할 때 주운환은 어디에 묻어야 좋을지 몰랐다. 한참을 생각하다 생모인 운 이낭의 묘에서 석 장丈 떨어진 곳에 조앵기를 묻었다.

주운환은 기구한 삶을 살다 간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조앵기도 기구한 삶을 살았단 게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조앵기는 엽연채를 무척 좋아했고, 엽연채는 운 이낭의 며느리니까 어머니도 조앵기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하여 주운환은 그 둘이 벗이 될 수 있도록 가까이에 묻었다.

주운환은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양왕을 보고 그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운환도 너무나 괴로웠으나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폐하,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아무리 생각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양왕은 엎드려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운환은 말을 이었다.

“폐하는 이제 더 이상 보잘것없는 황자가 아니라 일국의 제왕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과 흥망성쇠가 모두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좋은 부군은 되지 못하셨으니 현명한 군주라도 되셔야지요.”

양왕은 볼품없는 비목碑木을 꼭 끌어안았다. 너무 괴로웠다. 누군가 가슴을 후벼 파서 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폐하, 지난 세월의 인고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여섯 살 때 도성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20년 동안… 아니, 폐하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폐하는 일국의 군주가 되실 운명을 타고나셨으니 이를 이겨 내셔야 합니다. 아니고서 선황후 마마와 공주 마마의 영혼을 어찌 위로하려 하십니까?”

언서가 말했다.

노왕, 평왕, 모정건이 연달아 태어나자 소 황후는 자신도 적자를 낳아 대통을 잇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소 황후는 임신한 몸으로 동주로 쫓겨났고 양왕은 바로 거기서 태어났다.

어마마마가 세상을 떠나고 양왕은 누나와 둘만 남았지만 운하공주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저군이 알아야 할 예절과 지식을 가르쳤고 미래의 황제라는 기준을 가지고 그를 키웠다.

이 모든 것은 양왕을 이 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것이었다. 한데 이렇게 다 놓아 버리면 어떻게 어마마마와 누님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무슨 낯으로 마주하겠는가.

양왕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 했다. 하지만…….

“하하… 조앵기, 내가 배가 고파. 일어나서 나하고 밥을 먹자. 이번엔 무 완자와 붕어… 그리고 토자포도 주겠다.”

양왕이 목비를 힘껏 끌어안았다.

“폐하! 폐하!”

언서가 다가가 그를 잡아끌었다. 언서의 손길에 양왕은 휘청거리다 뒤로 쓰러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폐하!”

언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 *

언서와 주운환은 양왕을 궁으로 데려와 나 의정을 불러왔다.

꾀병이 진짜 병이 되었으나 주운환은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 단 한 가지 일만은 꼭 오늘 처리해야 했다. 바로 폐태자 일가의 참형이었다!

주운환은 형부에서 폐태자 일가를 모두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폐태자 일가는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폐태자는 분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핏줄을 남겨 둘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아이가 앞으로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잣거리로 끌려 나오자 백성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쯧쯧, 하나도 도망 못 가고 일가가 참형을 당하게 됐네.”

“누가 그래요? 측비는 벌써 도망갔어요! 폐태자의 혈육까지 데리고.”

“측비는 벌써 이혼장을 받았어요. 진서왕이 큰 공을 세워서 살려 준 걸요. 측비 배 속의 아기는, 흐흥, 어제 벌써 떼어 냈어요!”

꽁꽁 묶여 바닥에 무릎 꿇은 비루한 몰골의 폐태자는 고개를 들어 그 말을 한 아낙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냐? 주묘서가 본궁의 아기를 죽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아낙은 죄인이 말을 걸자 깜짝 놀랐으나 바로 자신이 아는 바를 다 얘기했다.

“그럴 리가 없기는? 풀려난 바로 그날 태의를 집으로 불러다 애를 떼 달라 하니 태의는 달수가 너무 차서 둘 다 죽을 수 있으니 차마 못 하겠다 했답디다. 측비는 목숨을 걸고 밖에서 의원을 불러다가 아이를 떼 냈답니다! 그런데 피가 멎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길거리에서 그 의원에게 매질을 했고, 의원도 억울해서 그 집 사람들을 욕하다가 전부 까발렸다지요.”

폐태자는 화가 나서 어질어질했다.

“그럴 리가……! 어떻게… 본궁의 아이를……!”

“사내아이라더군요! 쯧쯧, 나올 때 울기까지 했다는데 측비가 깜짝 놀라 다 죽어 가는 아기를 침상 밑으로 걷어찼답니다.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일각이 채 되지 않아 숨이 끊어졌답니다.”

폐태자는 경악스럽고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이런 소식을 알려 준 것인가, 너무나 절망스럽고 증오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주묘서! 그 잡것! 아아아악! 본궁이 죽어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처형 시간이다!”

집행관이 크게 소리쳤다.

이내 놀란 백성들의 비명과 탄식이 들렸고 단두대에서는 강물처럼 피가 흘렀다.

이렇게 정선제와 폐태자의 시대에 마침표가 찍혔다.

그러나 새 황제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에 기해가 조정에서 말한 것처럼 이때부터 정무는 주운환이 대신 처리했다.

다행히 주운환은 병사를 이끌고 전쟁밖에 할 줄 모르는 무장이 아니라 천자를 도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인재였다. 주운환은 안정적으로 정무를 처리했고, 정선제가 집무를 볼 때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로워 조정의 모두가 탄복했다.

* * *

주운환이 바쁘게 지내는 동안 시간은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날이 점점 따뜻해졌고, 어느덧 오월 중순이었다. 엽연채의 산후조리도 드디어 끝났다.

주요는 무럭무럭 자라 벌써 일곱 근이 되었다. 만월인 다른 아이들보다는 가벼웠지만 정상적인 신생아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엽연채는 점점 활기를 띠는 아이를 보고 마음을 놓았고, 나 의정도 아이의 상태가 안정적이니 앞으로 잘 먹이면 건강해질 것이라 했다.

오늘, 제민과 엽영교가 엽연채를 보러 왔다.

엽영교는 자기 딸도 데리고 왔다. 이제 막 어머니가 된 고모와 조카는 특히나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두 사람이 아기를 바꿔 안자 제민이 말했다.

“이 눈썹 좀 봐, 연채를 꼭 닮은 것이 앞으로 절세의 미남이 되겠어.”

“당연하지. 모두 나와 한 틀로 찍어 낸 것처럼 닮았다고 하더라고.”

엽연채가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코는 날 닮았어요.”

주운환이었다. 아버지를 보자 주요는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착하지, 우리 당이.”

주운환은 웃으며 아기를 안아 들었다.

“부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요?”

“폐하의 건강이 좋아져 오늘은 조정에 나오셨습니다.”

“아.”

엽연채는 만감이 교차했으나 어찌 됐든 건강이 회복된 황제가 성군이 되겠다 하니 안도했다.

“참, 부군, 이제 조리 기간도 끝났으니 보러 갈래요.”

조앵기의 무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요. 내일 준비해서 같이 갑시다.”

주운환이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소월이 다가왔다.

“마님, 부인들 몇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부인들?”

“유 부인, 여 부인 그리고 자 부인입니다.”

엽연채는 유 재상, 여지, 자학전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소월이 나갔다.

“이야기 나눠요. 난 서재에 있겠습니다.”

주운환이 엽연채에게 아기를 돌려줬다.

“그래요.”

엽연채는 주운환의 뒷모습을 흘깃 보다 혜연에게 아기를 건네고 침실에 누이라고 일렀다. 엽영교도 상황을 보고 자기 유모에게 아기를 안겨 내보냈다.

곧 화려하게 차려입은 중년 부인들이 들어와 웃으며 인사했다.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어서 오세요, 부인들. 자리에 앉으시지요. 청유야, 차를 내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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