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2화
이튿날 오후, 소월이 갑자기 들어왔다.
“마님, 백야가 오셨습니다.”
엽연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응?”
왜 또 오셨냐고 묻기도 전에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주 백야가 얼굴이 새하얘져서 들어왔다.
“셋째, 셋째야!”
“부군은 일이 있어 경위영에 갔어요. 무슨 일이세요, 아버님?”
“태의원 나 의정을 불러오게 진서왕부의 패를 다오. 우리 주씨 집안의 패로는 나 의정을 부를 수 없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모두 한 가족인데!”
주 백야의 눈이 붉어졌다.
엽연채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무슨 일인데요?”
“묘서가… 네 큰시누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혼절을 했다. 다른 태의를 불렀는데 모두들… 틀렸다고 하는구나!”
엽연채가 뒤에 있던 혜연에게 일렀다.
“혜연, 태의원에 가서 나 의정에게 정국백부로 방문해 달라 해라.”
“네.”
혜연이 즉시 길을 나섰다.
주 백야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앉아 있질 못했다.
“아버님, 우선 앉으세요! 지금 마음 졸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엽연채는 주묘서가 아기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청유가 차를 들고 왔다.
“차 좀 드세요. 무슨 일인가요?”
주 백야는 그제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통탄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독한 것… 에이!”
어제 진서왕부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주묘서는 울며불며 아기를 낳을 수 없다. 진씨 또한 낳아서는 안 된다고 동조했다.
주 백야는 그들의 판단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폐태자가 죄인이 된 상황이었다.
새 황제가 관용을 보여 주기 위해 아기를 낳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정말 낳았다가 나중에 미움을 살지도 모를 일. 그러다 불똥이 주씨 집안으로 튀면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새 황제가 정말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어쨌거나 죄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다. 그 아이가 세상에 얼굴을 비치면 주묘서가 어찌 다시 재가하겠는가? 죄인의 아기를 낳은 여자를 누가 원하겠나?
어느 모로 보나 아기를 살려 두는 데 찬성할 수야 없었다. 하지만 주 백야는 차마 아이를 지우라고 할 수는 없어 진씨와 주묘서가 울부짖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진씨는 집에 오자마자 태의를 불러 어떻게 유산을 시킬 수 있을지 완곡하게 물었다. 태의가 맥을 짚어 보더니 거의 육 개월이 다 돼서 태아가 너무 커져 유산은 위험할 것이라 했다. 또 주묘서의 어디 어디가 안 좋으니 유산을 하면 목숨까지 위험하단 말을 덧붙였다.
태의의 말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고, 진씨는 되레 흥분에 차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이오?”
“몇 달 기다렸다가 낳아야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낳다니?”
주묘서가 침상에서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럴 수 없어요! 이런 죄인의 씨를 낳을 수는 없어요! 나는 주씨 가문의 존귀한 적장녀이자 진서왕의 친여동생입니다. 난… 난 아직…….”
이런 신분이라면 재가가 가능하다! 하지만 죄인의 아이를 낳으면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유산은 정말 안 됩니다. 본인의 몸만 상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태의는 말을 하며 약상자를 챙겼다.
“어쨌든 저는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럼 이만.”
태의는 곧 나가 버렸고 진씨는 화가 나 다른 태의를 불렀다. 하지만 불러오는 태의들마다 모두 같은 말만 했다. 주묘서의 몸 상태로는 아기를 떼 내려다 본인 목숨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 백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낳아야지!”
자칫 본인마저 죽는다니, 낳는 수밖에 없다. 주 백야는 그 말을 남기고 곧장 방을 나가 버렸다. 같이 있는다고 뭘 어찌해 줄 수 있겠는가.
“아니요… 낳지 않을 거예요……!”
주묘서가 소리쳤다.
진씨는 조급한 마음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춘산과 녹지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으나 도울 방도가 없으니 옆에서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정 마마가 진씨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니면… 우선 낳은 후에…….”
말끝을 흐리는 정 마마의 눈에 살벌한 빛이 어렸다.
진씨는 흠칫했지만 곧 정 마마의 말뜻을 이해했다. 우선은 낳고 없앨 방법을 찾으면 된다! 춘산이 창백한 얼굴로 거들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 수밖에 없어요.”
“아니, 난 싫어……!”
주묘서가 울부짖자 녹지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편이… 안전하긴 하지만… 아가씨가 정말 죄인의 아기를 낳는다면 사람들이 아가씨가 아이를 원했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아기가 죽어도 황제는 저희가 아직도 폐태자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누가 그런 사람을 부인으로 맞이하겠습니까?”
진씨의 안색이 변했다.
폐태자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 이미 큰 오점인데 그 죄인의 자식까지 낳게 된다면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심지어 폐태자를 잊지 못했다는 꼬리표까지 달게 될 테니 사람들은 딸아이가 역심을 품었다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어쨌든 그녀를 원하는 집은 없을 것이다!
“안 된다! 그렇게 끝낼 수 없어……! 흠이 있으면 좋은 가문에 시집도 갈 수 없는데, 살아 봐야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죽는 게 낫다! 그냥 죽어 버리겠어……. 나를 왜 살려 놓은 거야!”
주묘서는 하염없이 울며 슬퍼했다.
진씨도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폐태자가 죄인이 된 후, 비 이낭과 백 이낭 그 천한 것들은 예전처럼 자신을 공경하지 않았다. 특히 비 이낭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니, 비 이낭은 그렇다 쳐도 백 이낭은 정말 두고 볼 수 없었다.
백 이낭은 아무 짓도 안 하고 이쪽을 위로했지만 그 말들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속으로는 통쾌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백 이낭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비록 서녀의 신분이지만, 적녀인 주묘서의 팔자가 꼬인 지금은 깨끗한 서녀가 형편이 더 나았다.
진씨는 속이 뒤틀리고 한이 맺혔다. 천박한 이낭들, 비천한 서녀와 서자들… 이들이 하나, 둘… 적모의 머리 꼭대기를 밟고 서서 잘난 척을 해 대니 너무나 가증스럽고 괘씸했다.
주비양은 이미 끝났는데 묘서까지… 이래서는 정말 끝이다!
“어머니, 싫어요… 낳지 않을래요…….”
주묘서의 감정이 격해지자 배 속에서도 그걸 느꼈는지 태아가 계속해서 움직였고 주묘서는 그게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의원을 불러 줘요. 싫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뭐 그렇게 어렵다고요? 도성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하는데 어느 집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단 얘기를 들어본 적 없어요. 죽었다는 사람도 없잖아요?”
주묘서가 울부짖자 진씨도 멈칫했다.
아내와 첩들이 많은 가문에서는 확실히 흔한 일이었고 오륙 개월에도 애를 떼려고 했다. 들어 본 적 없단 주묘서의 말과 달리 죽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았다.
녹지가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2년 전쯤… 생신 연회 때문에 민주에 갔을 때 숙부님의 이낭 중 하나가 넘어져서 유산을 했잖아요. 그때가 여섯 달째였는데 지금까지도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춘산은 반대했지만, 그녀의 말은 주묘서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태의들이 농간을 부린 것이 분명해요. 그 천한 주운환과 엽연채… 그것들이 세력이 있으니 다들 그들의 말을 듣지 않겠어요? 아기를 떼지 못하게 하려고 태의들에게 시킨 게 분명해요.”
주묘서는 말을 할수록 점점 정말 그렇게 된 일 같았다.
진씨의 눈이 돌연 커졌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죄인의 씨를 낳는다면 주묘서의 인생은 그날로 끝날 것이고, 그리되면 제일 좋아할 사람들이 바로 그 천한 것들이다.
“녹지야, 동락 골목에 가서 구 의원을 불러와라. 출산은 그 양반이 제일 잘 본다.”
진씨의 말에 녹지가 급히 침실을 나섰다. 그녀는 은자 두 냥을 집어 들었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내려놓고 은정 세 개를 들고 뛰어나갔다. 족히 은자 서른 냥은 되는 돈이었다.
녹지는 동락 골목의 의관에 있던 구 의원에게 부인이 회임한 지 다섯 달이 좀 넘었는데 낙태를 하려 하니 같이 가 달라 청했다.
구 의원은 녹지가 가져온 은자를 보자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얼른 치료 중이던 환자를 다른 의원에게 맡기고 약상자를 챙겨 들고 녹지를 따라나섰다.
정국백부.
구 의원은 주묘서의 맥을 짚어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소? 떼어 버릴 수 있겠소?”
진씨가 다급히 물었다.
구 의원도 주씨 집안의 명성과 이 집 대소저의 일화를 알고 있었다. 도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성실한 서씨 집안 아들과 정혼을 해 놓고 주운환이 출세를 하자 그걸 기회 삼아 태자에게 접근해 정혼자를 차 버렸고, 일부러 정혼자에게 상처를 줘서 서씨 집안 일가족 다섯 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반성하기는커녕 신이 나서 태자에게 시집가더니 측비 놀이에 흠뻑 빠져 있던 여자!
그러고는 오히려 태자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도와준 서자 오라비와 그 새언니를 깔보고 화연을 열어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태자가 죄인이 되자 또 서자 오라비에게 살려 달라며 울고불고 사정했고, 서자는 이전의 앙금은 잊어버리고 구해 줬다.
이 주씨 집안 대소저는 바람 잘 날 없이 소동을 피워 대니, 온 도성의 골칫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도성 사람들은 그녀의 말로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주묘서가 죽어도 배 속의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저렇게 버티는 것은 염치없는 그녀의 성격에 딱 맞아떨어지는 행동이었다.
“구 의원, 구 의원!”
의원이 말이 없자 주묘서가 흥분해서 불러 댔다.
구 의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다섯 달이나 되었으니 아기도 많이 컸는데, 매일 몸에 좋은 것만 찾아 먹어서 다른 다섯 달짜리 아이들보다도 더 컸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몸 상태를 보아도 낙태를 강행하면 목숨까지 위험했다.
하나 품속의 은자 서른 냥을 돌려주려니 정말 아까웠다. 그리고 자신은 의술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굳게 믿으며 입을 뗐다.
“위험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진씨와 주묘서가 뛸 듯이 반색했다.
“정말이에요? 그럼 어서 해 주세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요.”
녹지와 정 마마도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직 춘산만이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녀가 무슨 힘이 있는가. 그저 입을 다물고 한편에 서 있었다.
구 의원은 약방을 써서 먼저 약을 쓰고 주묘서에게 침을 놓았다.
잠시 후, 남자아이를 떼어 내기 무섭게 주묘서는 엄청나게 피를 쏟아 냈다. 구 의원이 손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진씨는 나 의정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나 의정은 찾아온 녹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씨는 그제야 울면서 주 백야를 찾아갔다.
화도 나고 겁도 난 주 백야는 진서왕부로 달려와 엽연채에게 패를 달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