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0화
주운환은 껄껄 웃으며 진씨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머니가 저 아이를 살려 달라 해서 제가 황제 폐하께 사정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저 아이를 데리러 가라 하셔서 직접 데리러 갔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은 게 뭐가 있나요? 예의 없게 구는 여동생을 몇 마디 꾸짖으면 제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은 겁니까? 대체 어머니는 어떤 공경을 원하시는 겁니까?”
“만약 우리 연채가 이렇게 예의를 몰랐다면 저는 벌써 매질을 했을 텐데 안사돈은 딸을 감싸시는군요. 호호호.”
온씨가 웃으며 주운환을 거들었다. 능력 있는 사위와 한 번에 아들을 낳은 딸, 게다가 바로 왕세자로 책봉된 손자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온씨는 목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진씨는 어떻게 해도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온씨도 진작 알았다. 그러니 체면 같은 건 내버려 두고, 이치에 따라 달랠 수 있으면 달래고 책망을 할 수 있으면 책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씨는 화가 나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어서 묘서를 데리고 가십시오, 어머니. 저는 이런 여동생은 없는 셈 치겠습니다!”
“너, 너……!”
화가 난 진씨가 부들부들 떨었다.
“왜요? 어머니는 제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하다 하시면 제 무능함을 용서하세요. 저는 도저히 어머니를 만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영원히 어머니 눈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저희 집안도 앞으로는 정국백부와 왕래하지 않겠습니다.”
주운환이 가족과 연을 끊는다고 선포하는 순간, 진씨는 눈앞이 팽글팽글 돌며 그만 쓰러질 뻔했다.
“마님!”
정 마마와 춘산이 비틀대는 진씨를 부축했다.
“지금… 저희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정 마마는 황급히 진씨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주비양은 아무것도 아니고, 주묘서도 버림받았다. 게다가 폐태자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정국백부는 벌써 글렀다. 주운환까지 연을 끊으면 가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셋째 말이 맞소! 계속 그렇게 삐딱하게 굴고 셋째와 셋째 며느리를 무시할 테면, 성질낼 일 없이 여길 오지 않으면 될 거 아니오!”
주 백야까지 제게 호통을 치자 진씨의 눈앞이 빙빙 돌았다. 따끔하게 한 소리 한 후, 주 백야는 주운환을 돌아보며 말했다.
“묘서도 너무 힘들어서 저러겠지. 한 달 가까이 두려움에 떨었고, 또 하루 종일 꿇어앉아 있지 않았니. 너도 네 동생을 이해해 주거라.”
“네, 이해합니다. 그래서 왕부에 있는 게 그렇게 억울하면 돌아가라는 겁니다! 앞으로는 올 필요 없다고요. 그러면 영원히 어머니와 묘서의 눈에 거슬릴 일이 없을 겁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어째 그렇게 화를 내느냐? 내 말은, 묘서와 네 어머니 모두 너무 놀라 얼이 빠져서 저러는 것 아니겠더냐. 네 마음도 안다. 네가 살려 준 건데 저리 나오니 나라도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오해일 뿐이다.”
주 백야는 좋게 다독였으나 속으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맞습니다, 셋째 나리, 모두 오해입니다! 저희는 태자부에서… 아니, 폐태자부에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잡혀가서 목이 잘리는 건 아닌지 매일 겁에 질려 있었어요. 측비… 아니, 아가씨… 저희 모두 손님입니다. 그리고 잘은 몰라도 셋째 마님도 분명 뒤에서 많이 고생하셨을 거예요. 저희도 감사 인사를 해야지요!”
춘산이 엉엉 울면서 뛰어나왔다. 녹지는 더없이 원통했지만 상황이 불리하니 자신도 뒤에서 주묘서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잡혀 있던 시간 동안 정말 풀려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했다. 물론 엽연채와 연을 맺어야 다시 시집갈 수 있단 말도 했었다.
하지만 주묘서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엽연채는 시집오던 날부터 자신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자신보다 신분도 높고, 자신보다 아름답고 혼수도 많았다. 그 때문에 매번 엽연채를 통해 움직여야 했고, 심지어 엽연채를 통해 혼처를 찾아야 했다. 집안에서 다른 사람보다 늘 높은 자리에 있던 자신이!
그나마 태자에게 시집가면서 해방된 줄 알았다. 전세가 역전된 줄 알았는데, 태자에게서 뺨을 맞고 꿈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황후만 되면 엽연채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위로 올라가지 못했고, 꿈도 산산조각 나 버렸다.
태자부에서 춘산, 녹지와 이야기할 때는 바짝 엎드려서 조용히 지내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정말 나오고 주운환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그러나 녹지와 춘산이 재차 일깨워 주자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상기되었다. 주묘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말했다.
“제가, 지금 너무 겁이 나서… 미안해요. 아버지 말이 맞아요. 가서 작은새언니를 찾아봬야죠.”
주운환이 차갑게 웃었다.
“놀랐다니 손님방에 가서 쉬어라. 우리가 너를 괴롭힐 수는 없지 않니. 유 마마, 측비를 손님방으로 안내해.”
수화문을 지키고 있던 유 마마가 바로 다가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마님, 측비, 가서 쉬십시오.”
진씨와 주묘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주운환은 이미 성큼성큼 가 버렸고, 온씨도 서둘러 뒤따라갔다.
진씨와 주묘서는 난감하고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운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두 모녀의 얼굴은 뭐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그 꼴을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주 백야는 옷깃을 세차게 휘두르며 주운환을 뒤쫓아 가 버렸다. 진씨와 주묘서는 하나씩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들이 미움을 단단히 샀다고 느꼈다. 순간 두 사람만 고립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두려웠다.
“마님, 그러지 말고 지금 같이 가시지요! 온 부인도 있고 사람이 많은 틈을 타서 몇 마디 하면 됩니다. 정말 손님방부터 가서 쉬시면 더 힘들 겁니다. 저녁이나 내일 운연거에 따로 가실 거예요?”
춘산의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확실히 지금 주 백야와 같이 운연거에 가는 게 나았다! 손님방에서 쉬면 일이 커질 테니까. 엽연채는 분명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들이 운연거를 찾아가면 엽연채보다 낮아 보일 것이다. 그야말로 엽연채를 ‘찾아뵙는’ 꼴이 된다!
더구나 지금 주운환의 태도를 보니 나중에 아무리 앓는 척, 죽은 척을 한다 해도 봐주지 않고 자신들을 정국백부로 쫓아낼 테니 그럼 체면이 더 깎일 것이었다. 깎일 체면도 어디 남아 있다고!
진씨와 주묘서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님, 측… 아가씨… 가시지요!”
춘산이 나서서 주묘서를 부축했다. 주묘서는 세상 억울했지만 뭐가 더 손해인지는 알고 있어서 그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가자꾸나! 누가 겁나나!”
그렇게 주운환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갔다.
진씨 모녀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래도 발걸음은 빨라서 금방 주 백야를 따라잡았다.
그녀들이 따라오자 주 백야도 남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부인과 딸이 주운환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조금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한집안 식구들이니 화목하게 지내야지 않겠나.
걸음이 제일 빠른 온씨와 주운환은 벌써 운연거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아기를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품속에서 옹알거리는 주요가 퍽 귀여웠다.
“부인.”
주운환이 들어가 엽연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몸을 낮춰 아기를 보는 주운환의 두 눈은 기분이 좋아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예쁜 우리 아가, 아버지가 보고 싶었구나. 자, 어디 한번 안아 보자.”
주운환은 아기의 작은 손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도성에 돌아와 치료한 후에 열은 내렸지만 주요는 여전히 많이 허약했다. 그에 태의가 마구 입이나 손을 대지 말라고 주의를 줬으니, 주운환은 차마 아기의 얼굴에는 입을 맞추지 못하고 그 작은 손에 입을 맞췄다.
온씨는 엽연채를 아끼고 아기를 사랑하는 주운환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안심했다. 하지만 손주가 저렇게 작으니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됐다.
“아이고, 이…….”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주 백야가 들어왔다.
주 백야는 아기를 안고 앉아 있는 엽연채를 보고 놀라서 멈칫했다. 참, 셋째 며느리가 아기를 낳았지! 며칠 전, 새 황제가 도성에 돌아올 때 엽연채가 조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도성이 워낙 어수선했고, 주묘서의 일도 있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 백야는 엽연채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반가웠다.
“셋째의 아들이구나, 우리 손자.”
진씨와 주묘서도 들어왔다. 엽연채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아니, 주 측비 아닙니까?”
‘측비’ 두 글자가 귀에 꽂히자 주묘서의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떨려 왔다. 당장이라도 엽연채에게 달려들어 그 뺨을 때리고 싶었다.
측비! 측비! 얼어 죽을 측비! 폐태자의 측비라고 불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예전에는 명예였지만 이제는 치욕에 불과했다! ‘측비’, 이 두 글자는 그녀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
진씨도 화가 나서 입을 열려 하는데 엽연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런. 예전에 부르던 게 습관이 되어서 그만 튀어나와 버렸네요. 하하, 미안해요, 큰아가씨.”
엽연채가 바로 사과하자 진씨는 턱 밑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래서야 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우우…….”
품에 안긴 아기가 갑자기 칭얼거리니 엽연채는 더는 진씨 모녀를 상대하지 않고 주요를 가만히 토닥거렸다.
“음, 우리 당이 착하지.”
주요는 그녀의 품에 폭 안겨 도로 잠이 들었다.
주묘서는 엽연채의 배가 쑥 들어가 있고,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깜짝 놀랐다.
“아니, 벌써 낳았어요?”
어째서? 엽연채는 칠월쯤에 낳을 것이고, 자신은 한 달 늦은 팔월에 낳을 예정이었다. 아직 사월 말인데!
예전에 엽연채의 산달이 재수 없는 달이라서 날짜가 나쁘다며 비웃었었다. 모든 것이 갖춰진 팔월에 태어날 자기 아이랑 달리 복이 없다고!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주묘서를 쳐다봤다.
“아기가 갑자기 일찍 태어나서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우리 마님은 단번에 아들을 낳으셨지요.”
청유가 차를 들고 오면서 주묘서의 배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폐태자에게 힘이 있던 때, 주묘서가 쫓아와 자신의 아이는 분명 사내아이이니 엽연채가 딸을 낳으면 앞으로 혼인을 맺자고 했었다. 주묘서의 아기는 앞으로 태자가 될 아이이니 엽연채의 딸은 태자비가 될 거라고 했다.
쯧쯧쯧……. 속으로 혀를 찬 청유가 조롱하듯 주묘서를 보며 다시 말했다.
“다섯 달은 넘었죠? 얼마 남지 않았네요, 하하.”
주묘서는 그제야 자신의 달수를 떠올리더니 표정이 굳어 배를 가렸다. 예전에는 배 속에 있는 아기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천한 죄인의 씨일 뿐이다! 어떻게 이런 천한 씨를 낳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