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9화
녹지와 춘산은 황급히 일어나 주묘서를 부축해 마차에 올라탔다.
백여언과 전 서비 등 다른 첩들은 누군가 이 호랑이 굴에서 벗어나자 소리 높여 통곡하면서 주묘서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주 측비… 우리도 구해 줘요! 진서후… 우리들도 살려 주세요!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비구니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하지만 주운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돌아서 언서에게 인사했다.
“고맙소, 방 형.”
그러고는 그대로 떠났다.
“아악! 아니, 안 돼! 살려 줘요! 죽고 싶지 않아요!”
백여언과 여자들은 주운환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목 놓아 우짖다 다시 금위군에게 사정했다.
“대인들, 우리 좀 풀어 주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 금위군들 중 누구도 동정심을 비치지 않고 그들 모두를 묶어 버렸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나는…….”
백여언은 우느라 목이 다 쉬어 버렸다.
쇠락한 귀족 백씨 가문의 딸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괄시당하며 자랐고, 그렇기에 저 꼭대기까지 날아오르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었다. 끝내 미모를 이용해 세 명의 측비 후보를 떨어뜨리고 태자 측비 자리를 차지하고 나자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났음을 증명해 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참수당해 사람들 앞에 목이 전시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울고 있던 백여언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맞은편 주루의 창문 너머,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바로 장만만과 포모였다!
백여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년 전 칠석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날은 양왕의 생일 축하연이었다. 자신은 그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포모 앞에서 이렇게 말했, 아니, 선포했었다.
“내가 한낱 백씨 가문의 여식이라고 만만하게 보나 본데 ‘가난한 젊은이를 업신여기지 말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그런 후에 보란 듯이 그녀들의 태자 측비 자리를 빼앗았다. 측비가 된 후에는 또 한 명의 후보였던 장만만의 집에도 쫓아가 그녀를 한껏 비웃어 주었다. 그쪽은 못생겨서 태자 눈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은 사람을 움직일 만큼 아름답고 팔자가 좋아 태자 측비가 되었다면서.
그리고 지금은 죄인이 되어 여기 엎드려 있었다.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백여언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저 여자들이 저기서 뭘 하는 거지? 나를 비웃고 있는 걸까? 분명히 아주 통쾌해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백여언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온몸이 떨렸다. 고래고래 악을 쓰고 싶었지만 창피하단 생각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여자들 앞에서 더 망신을 당할 수는 없었다.
한편, 장만만과 포모는 백여언의 생각대로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백여언이 태자부로 시집간 후 포모와 장만만 등 후보 세 명은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제 백여언의 처참한 꼴을 보니 마음속의 가시를 드디어 뽑아낸 것 같았다!
“하하, 정말 그때 백여언이 그 자리를 채어 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포모가 속이 시원하단 듯 웃었다.
“이제 그만 가요!”
장만만도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요.”
포모는 앞에 놓인 차를 마저 마시고 자리를 떨쳤다.
“참, 혼인이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앞으로 만만은 밖에 나오지 말아요.”
“알았어요.”
장만만은 조만간 포모의 친오라버니와 혼인해 장국후부 세자의 후처가 될 것이었다! 온씨가 주선해 준 혼사였다. 맹씨는 온씨가 며느리를 보기 전에 혼사를 치르려 유월 초사흘로 날을 잡았다.
그 날짜가 엽균의 혼례식 바로 며칠 전이라 온씨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채 마마가 선물을 준비하라 알려 줬다. 그게 아니었으면 온씨는 모르고 지나쳤을 뻔했다.
날짜 얘기를 들은 온씨는 맹씨의 속내가 빤히 읽혀 픽 웃었다. 고작 며칠 빠르든 늦든 무슨 차이가 난다고.
* * *
주운환이 떠나자 언서 형제는 금위군에게 태자부의 모든 사람을 전부 형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폐태자는 이미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 감옥에는 그의 원수, 요씨 집안 사람들이 수감돼 있었다!
명줄이 긴 요양성은 갈란군주의 간계에 빠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는 입이 비뚤어진 채로 맞은편 감옥에 갇힌 폐태자를 조롱했다.
요 노부인은 하루 종일 폐태자를 향해 온갖 조롱 섞인 말을 쏟아냈다.
“하하하, 애초에 주묘서 같은 저급한 것을 아내로 맞아 우리 연이를 괴롭히고 말려 죽이더니! 아이고, 저거 봐라. 아주 잘났군그래. 대단한 태자 전하가 감옥에 갇혔네! 하하하!”
폐태자는 화가 나서 넘어갈 것 같았다.
주묘서를 아내로 들이지 않았으면 그토록 주운환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주묘서가 베갯머리에서 바람을 넣어 반역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하하, 애초에 우리 연이에게, 우리 요씨 집안에 잘해 줬다면 주묘서를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직까지 그 높은 태자 자리에 있지 않겠어! 아니, 저 어좌에 앉은 사람도 당신이었겠지! 금수만도 못한 놈,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는 게 당연하지. 하하하! 으하하하하!”
요 노부인은 쉬지 않고 폐태자를 욕하면서 웃고 또 웃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이미 살아갈 희망이 없는 그들이 죽기 전 폐태자의 말로라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폐태자가 여기 갇힌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요 노부인은 폐태자가 고통스러워하며 곧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은 표정을 보는 것을 유일한 위안이자 낙으로 삼아 매일 그를 괴롭혔다.
그때 밖에서 호통 소리와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곧 포졸들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끌고 들어왔다. 모두 태자부 사람들이었다. 포졸들은 남녀도 구분하지 않고 그들을 몽땅 폐태자 옆의 감옥에 밀어 넣었다.
“전하! 전하!”
백여언과 전 서비 등이 창살을 부여잡고 그를 보며 울부짖었다.
폐태자는 그들을 보더니 물었다.
“주묘서 그 망할 것은?”
“그, 그게…….”
전 서비가 통곡을 했다.
“그 여자는 주운환이 데려갔어요! 아아… 같은 태자부 사람인데, 우리 모두 측비인데 왜 그 여자만 살려 주나요! 왜요!”
원망, 증오, 두려움, 이런 감정에 휩쓸려 그녀들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폐태자는 이를 악물고 눈을 굴렸다. 자신의 두 딸과 서자가 뒤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러나 주묘서 배 속에 하나 더 있었다! 주묘서가 살아남는다면, 모명쟁 그 천한 것은 자신의 인자함을 자랑하기 위해 아이를 낳게 할지도 모른다.
선대에도, 지난 왕조에서도 이런 일은 있었다. 아직 희망의 날개가 모두 부러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혈육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다!
폐태자는 더 이상 주묘서를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주묘서가 자신의 혈통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생각했다. 주묘서는 매일매일 제게 죽도록 사랑한다 했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자신의 혈통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폐태자는 온 힘을 다해 주묘서가 얼마나 자신을 절절히 사랑했었는지 떠올렸다.
* * *
주운환은 태자부에서 나와 바로 진서왕부로 돌아왔다. 대복이 모는 마차는 주묘서 일행을 싣고 주운환 뒤를 따라왔다.
주운환이 수화문에서 내리자 주 백야가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진씨는 밖을 보고 진서왕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주묘서가 이 꼴이 났으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참담한 신세인데 누군들 보고 싶겠는가. 저 빌어먹을 서자 놈이 왕으로서 떵떵거리는 모습이야 오죽하겠나.
‘이 죽일 놈의 대복이 녀석! 얼마나 멍청하면 주운환 집으로 마차를 끌고 온 거야.’
하나 주 백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내리시오! 묘서가 거기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있어 기운이 다 빠졌는데 아직도 마차에 틀어박혀 뭐 하는 거요?”
진씨는 어두운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주묘서를 부축하며 차갑게 일갈했다.
“어서 손님방을 준비하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주운환이 차가워진 얼굴로 입을 열려 하는데 저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사돈 기세가 대단하시네요, 셋째가 염치 불고하고 주 측비 목숨을 구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큰소리를 치시다니요.”
진씨가 안색이 변해 돌아보니 온씨가 채 마마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머님.”
주운환이 다가가 인사했다.
“그래, 우리 착한 운환이. 어서 일어나거라.”
온씨는 주운환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주운환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씨가 엽연채를 보러 온 것이다.
“어머님, 부인을 보러 오신 것이지요? 왜 벌써 돌아가시려고 하십니까, 더 계시잖고.”
온씨가 웃으며 가는 게 아니라고 대꾸했다.
“마차에 뭘 두고 내려서 찾으러 가는 거야. 어떤 아이가 넣어 놓았는지 채 마마가 도통 못 찾아서 내가 직접 가는 거란다.”
온씨는 싱글싱글 웃으며 진씨를 보았다.
“안사돈, 주 소저를 우리 사위가 구해 온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계세요? 아무리 자기 아들이라도 이런 경우는 없지요! 더구나 문턱을 넘으면 손님이라는데 다른 사람 집에서 어떻게 그러세요?”
진씨는 코웃음을 쳤다. 과부 주제에 누구에게 잔소리를 하는 건가?
“난 이 아이 어미입니다.”
주 백야는 짜증이 나서 진씨를 노려봤다.
“됐소, 그만 좀 투덜거리시오. 사돈 말씀이 맞소. 셋째가 살려 줬는데 어디서 큰소리를 친다는 말이오. 묘서도 시집을 간 몸이지 않소. 비록 지금은…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지. 묘서야, 어서 네 작은새언니한테 가 보거라.”
주묘서의 안색이 홱 변했다.
“거기를 가라고요? 새언니가 날 위해 뭘 했는데요?”
어떻게 엽연채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말인가!
주운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게 새언니를 대하는 태도냐? 널 위해서 한 게 없다고 해도 이 문을 들어섰으면 당연히 새언니에게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 거 아니더냐? 윗사람도 몰라보고, 그렇게 여기 있기 싫으면 썩 나가라! 다시는 왕부에 한 걸음도 들이지 말아라!”
“내가……!”
오고 싶어서 왔을까! 대복이 마차를 여기로 몰고 와서 그렇지! 주묘서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 지금 이게 무슨 태도니? 윗사람을 몰라본다니? 그러는 너는 지금 윗사람을 알아봐서 이러는 거냐?”
진씨가 앞으로 나섰다.
주 백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저 엽연채에게 가서 인사나 하라고 했을 뿐인데 그 때문에 이렇게 싸울 줄은!
“됐다. 그만 싸워라…….”
하지만 주운환도 진씨도 모기만 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