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78화 (778/858)

제778화

기해와 다른 환관 하나가 한편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이 양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허, 허허…….”

양왕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하하하하하핫……!”

다른 사람들의 시선만 막았을 뿐, 자신의 마음은 가릴 수 없었다.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섯 살, 누님이 세상을 떠났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었다. 그 후 20년 동안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 없다.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울지 않겠다, 맹세했다.

하지만 지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울고 싶지 않다. 눈물 흘리고 싶지 않다. 가슴 아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토록 굳건히 쌓아 올렸던 성벽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앵기! 조앵기…….

명쟁! 모명쟁…….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성루 위, 그녀의 날카롭고 참담한 목소리, 곧 무너질 것만 같은 목소리가.

“폐하… 괜찮으십니까?”

기해와 어린 환관이 어쩔 줄 몰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이제 갓 양왕의 시중을 들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양왕의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어떨지는 잘 몰랐다.

잠시 생각하던 기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황후 마마께는…….”

“썩 물러가라!”

침상 위의 새 황제가 차갑게 소리쳤다.

기해와 어린 환관은 깜짝 놀라서 황급히 물러갔다.

밖으로 나가자 언서와 언동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두 사람에게 금위군 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하사했지만 이제 명을 받았을 뿐 아직 직무를 넘겨받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군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보고 평소처럼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방 통령과 방 부통령을 뵈옵니다.”

기해와 환관이 인사를 올렸다.

“그리 예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공.”

언서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께서…….”

기해가 안의 상황을 알리고 황후 얘기를 꺼냈다.

“황후 마마께서 아직 봉의궁에 계십니다.”

“보셨다시피 폐하의 심기가 편치 않으십니다. 가라고 하셨으니 일단 돌아가시고 내일 다시 말씀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기해는 하는 수 없이 인사를 하고 물러가면서 어린 환관을 봉의궁으로 보내 상관운이 쉴 수 있도록 말을 전했다.

연회는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 파했다. 새 황제는 술에 취해 이미 용상에 쓰러진 후였다.

신하들은 할 말을 잃었다. 갓 즉위식을 마친 황제라면 당연히 이렇게 중요한 연회에서는 응당 단정하게 연회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다가 대신들을 배웅해야 했다. 그런데 인사불성이 되다니.

상관운이 침궁에 따라 들어가 양왕의 땀을 몇 차례 닦아 주자 그는 곧 잠에 빠졌다. 언서는 상관운에게 우선 봉의궁으로 돌아가고 양왕이 술에서 깬 후 다시 얘기하자 했다.

상관 가문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부친은 오히려 죄를 지었으니, 황후가 되었다고 해도 상관운에게는 힘이 없었다. 게다가 양왕의 성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터라 우선 언서의 말대로 봉의궁으로 돌아가 쉬고 있었다.

궁녀 한 명이 바깥을 살펴보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상관운을 모시던 신변 여종 절화였다.

“아가씨… 아니, 마마, 벌써 신시 반이 넘었습니다.”

상관운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짙은 남색 옷을 입은 환관이 들어왔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를 따르는 사람 아니더냐. 본궁이 기억하고 있다.”

상관운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의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마마께서는 먼저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알겠다. 절화야, 공공에게 술값을 좀 챙겨 드려라.”

상관운이 미소와 함께 대꾸했고, 절화가 곧 주머니 하나를 가져다 환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환관은 안도하며 밖으로 나갔다.

* * *

즉위식이 끝나고 새 황제는 교지를 내려 백성들의 세를 일 년 동안 면제하고 모든 관리에게 사흘의 휴가를 주었다! 순식간에 온 도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튿날 아침, 진서후부의 대문이 열리자 기해가 환관 몇을 데리고 들어가 성지를 낭독했다.

주운환을 왕으로 책봉하고, 엽연채를 왕비, 주요를 왕세자에 봉한다는 내용의 성지였다.

기해 뒤편의 환관이 편액을 하나 들고 왔다. 새 황제가 친필로 쓴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진서왕부.

미리 준비한 금책金冊(책봉 시 금편에 글을 새겨 엮은 문서)도 주운환에게 건넸다.

진씨와 주종과, 비 이낭은 주운환이 들고 있는 금책을 보자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속이 뒤집힐 듯 괴로웠다.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묘서도 어서 풀어 줘야 할 것 아니냐!”

진씨가 다가와 독촉하자 주운환은 슬며시 비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네, 풀어 주어야지요. 가시죠.”

주운환은 성큼성큼 대문을 나서더니 여양이 끌고 온 말에 훌쩍 올라탔다. 진씨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황급히 마차에 올라 주운환을 뒤쫓았다.

도성은 활기찬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태자부도 가산을 몰수하느라 한창 시끌시끌했다.

폐태자는 성루에서 화살에 맞았지만 죽지 않고 형부 감옥에 갇혔다. 황제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린 후 새로 부임한 금위군 통령 방언서가 군사를 이끌고 태자부를 수색하고 있었다.

폐태자는 만문초참萬門抄斬(모든 가산을 몰수하고 참형에 처함)의 형벌을 받았다. 그래서 태자부의 모든 사람들, 주인이든 하인이든 사흘 후 모두 참수하여 머리를 성문에 걸어 효시할 것이었다.

태자부는 이미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금위군이 태자부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고 그들을 다시 수많은 백성들이 둘러싸고 있어 거리는 사람들로 물 샐 틈이 없었다. 구경꾼들은 태자부 안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연신 숙덕거렸다.

태자부 입구에서는 곱게 치장한 여인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들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꽂이 하나 꽂지 못한 산발이었다.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있으니 머리에 꽂은 장식품도 다 빼앗긴 것이다.

그들은 태자 후원에 있던 첩들과 태자의 두 딸, 그리고 계급이 높은 하인들이었다. 그 뒤에는 평범한 종들과 노비들이 있었다. 모두 참담하고 비통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열예닐곱 정도 된 젊은 부인이 끼어 있었다. 다섯 달 정도 된 부른 배를 안고 바닥에 앉은 채로 놀라서 울고 있었다. 주묘서였다.

‘지난번 어머니가 나를 구해 주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구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구해진다 해도 천한 주운환과 염치도 모르는 엽연채의 도움을 받아… 차라리 죽고 싶다!’

그 곁의 춘산도 겁에 질린 채 입을 뗐다.

“측비 마마, 울지 마세요. 마님이 분명 저희를 구해 주실 거예요……. 악!”

별안간 주묘서가 ‘짝’ 하고 춘산의 뺨을 때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측비는 무슨 측비냐! 누가 망할 측비라는 거야……!”

너무나 갈망했었던 신분이고 또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제일 큰 약점 아니던가.

“우리를 풀어 주세요, 우리 측비… 아니, 우리 아가씨는 진서후 나리의 적통 여동생입니다.”

춘산은 철푸덕 바닥에 쓰러졌고 그 옆에서 녹지가 애걸했다.

“저리 비켜!”

그러나 금위군은 녹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여기, 가서 오라를 가져다가 이 여자들을 다 묶어 버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금위군들이 낄낄거렸다.

여자들은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여자들, 특히 귀한 집안의 여자들이 제일 겁내는 것이 바로 이런 외간 남자들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목소리가 들렸다.

“진서왕이 도착하셨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길을 터주었다. 갈색 말을 탄 주운환이 부하 네 명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마차 한 대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언서와 언동이 달려가 손을 모아 인사했다.

“후야… 아니, 전하를 뵈옵니다.”

주운환은 금위군 통령의 복장을 한 형제를 바라보았다. 원래도 준수했던 두 형제는 관복을 입자 훨씬 귀티가 흘렀다.

주운환은 말에서 내려 그들을 일으켰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소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 전하가 오실 때까지 그 여자를 남겨 두었습니다!”

언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들은 방금 전 주묘서의 애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운환이 직접 와서 주묘서에게 망신을 줄 때를 기다린 것이다.

뒤따라 오던 마차가 멈춰 서자 진씨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주 백야도 창백한 얼굴로 따라 내려 진씨를 붙잡았다.

“천천히 가시오.”

주 백야는 이렇게 망신스러운 일에 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씨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대 주운환과의 사이가 더 나빠질까 봐, 차마 쫓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이 그렇게 틀어지면 주묘서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 아닌가. 묘서는 자신의 딸이다! 딸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묘서야!”

진씨가 주 백야를 힘껏 밀쳐 내고 비틀거리면서 주묘서에게 뛰어갔다.

주묘서는 태자부의 여인들과 함께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금위군이 그 주변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주묘서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뭐 하는 짓이냐? 비켜라!”

금위군이 진씨를 막고 보내 주지 않자 화가 난 진씨는 악을 썼다. 그러나 금위군은 미동도 하지 않다가 언서가 주운환과 함께 다가가자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주 측비도 원래 참수형에 처해야 하지만 진서왕께서 폐하께 간청하였습니다. 폐하는 진서왕 전하가 불세의 공을 세우신 것을 생각하셔서 이혼장을 내려 주셨으니, 주묘서는 더 이상 모씨 가문 사람이 아닙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언서의 말에 주운환은 주묘서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예를 갖췄다.

진씨는 새파랗게 질려 주묘서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걱정 말아라, 묘서야. 집으로 가자.”

주묘서는 이미 진씨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두 모녀의 모습에 언서가 소리 내어 비웃었다.

“주 측비… 아니, 주 소저와 백 부인은 얼굴도 참 두꺼우시군요. 전하께서 살려 주셨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고.”

문밖의 백성들도 모두 그녀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주묘서는 언서의 비아냥에도 여전히 진씨의 품에 기대 훌쩍이기만 했다. 충격에서 도통 빠져나오질 못하는 모습이었다.

“얘야!”

주 백야가 황급히 다가서서 주묘서를 진씨 품에서 끌어냈다.

“묘서야, 울지만 말고 셋째 오라버니에게 감사 인사를 해라.”

주묘서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마지못해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셋째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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