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7화
양왕은 언서와 언동 형제를 보았다.
“방언서를 정일품 금위군 통령에 봉하고 방언동을 정삼품 금위군 부통령에 봉한다.”
금위군 통령은 상관수였지만 양왕이 도성에 들어올 때 큰 잘못을 저질러 자연히 자리에서 파면되었다. 그래도 상관 가문은 유서 깊은 학자 가문이라 상관 가문의 태노야는 학자들의 대부로 그 제자들이 여기저기 퍼져 있었고, 유 재상도 그 제자들 중 하나였다.
즉 양왕이 상관운을 황후로 책봉한 까닭은, 하나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또 금위군의 마음을 얻어 언서 형제에게 자연스럽게 넘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언서 형제와 주 선생 모두 여기까지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다. 황위의 대업을 이루는 데 함께한 것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하배를 정삼품 경위영 부통령에 봉한다.”
양왕은 하배를 바라보며 다시 봉작을 내렸다. 일 년 후면 주운환은 응성으로 갈 것이니 경위영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양왕의 눈에 그 적임자가 바로 하배였다.
양왕은 뒤이어 그를 따르던 부하 몇몇에게 작위를 내렸다. 무인은 금위군에, 문인은 여러 문신들 사이에 집어넣어 폐태자 잔당을 소탕하며 생긴 빈자리를 채웠다.
그 외의 기존 대신들의 작위도 조정하여 올라간 사람도, 내려간 사람도 있었다.
진무는 호부시랑에서 호부상서로 올라갔고, 그의 아들인 진지항까지 한림원에서 나와 정오품 병부 원외랑에 봉해졌다.
선황제가 수녀 간택을 할 때 주운환을 도와 소소한 도움을 준 예부시랑도 전도가 유망한 호부로 옮겨 갔다.
모든 작위를 내린 후, 뒤쪽에 서 있던 기해가 헛기침을 하더니 다가와 양왕에게 속삭였다.
“폐하, 황후를 책봉하셔야 합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유 재상 곁에 선 노인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자가 바로 상관 가문의 수장, 상관도였다. 상관운의 조부인 그는 여든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새 황제가 혼담을 꺼냈을 때, 상관 가문에서는 당연히 예물 등 정식으로 대혼을 치를 것을 요구했지만 새 황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상관 가문으로서는 당연히 체면이 깎인 셈이었다. 하나 자신들이 명문세가라고는 해도 최근 몇 년간은 상황이 좋지 않았고, 상관수도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조정에 남은 몇몇 인맥뿐이었다. 황후 자리가 너무나 절실한 탓에 결국 뜻을 굽히고 응했다.
황후 책봉만 한다 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황후를 책봉하기도 전에 논공행상부터 하다니!
주운환이든 누구든 새 황제가 어좌에 오른 후에는 곧장 황후부터 책봉한 다음에 작위를 내려야 했다. 주운환이 새 황후 앞에 무릎을 꿇어야 상관 집안의 체면이 설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상관도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하지만 논공행상을 먼저 한다고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도 없었다.
기해가 귀띔을 하자 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를 책봉한다!”
기해가 목소리를 높여 외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웅장한 관현합주가 연주되고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양쪽으로 늘어선 대신들과 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열일고여덟 정도 된 여인이 금홍색의 중후한 황후복을 입고 머리에는 봉황관을 쓰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등 뒤로 치맛자락이 땅에 끌렸다.
연꽃처럼 아름답고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얼굴에 딱 알맞은 정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자로 잰 듯 걸음걸이마저 대단히 단정했다.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감탄을 마지않았다. 상관운, 한때 도성 제일의 미인이었다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황후의 차림을 하니 국모다운 기품을 보여 주었다.
양왕은 상석에 앉아 한 걸음씩 다가오는 상관운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길러진 최고의 규수, 자신이 진작에 아내로 맞이했어야 할, 자신이 늘 원했던 배필은 바로 이런 여자였다. 신분, 용모 모두 자신에게 걸맞은 사람!
상관운이 양왕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기해가 성지를 꺼냈다.
“하늘의 뜻을 받아 황제의 명을 전한다. 상관 가문의 적장녀 상관운은 지혜롭고 정숙하며, 신중하고 예의 바르며 품행이 단정하다. 그리하여 황후에 봉하니 어머니의 마음으로 백성을 아끼도록 하라. 이상!”
“감사합니다, 폐하!”
상관운이 웃으며 예를 올렸다.
“올라오시오.”
상관운은 부축을 받고 올라가 양왕 곁 황후의 자리에 앉았다. 대신들과 귀족들 모두 황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상관운은 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시오.”
양왕은 땅에 엎드린 조정 대신들을 보며 조용히 상관운을 살짝 돌아봤다. 이제야 제대로 된 정실부인을 얻었는데, 어쩐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폐하.”
기해가 제때 뒤에서 불러 양왕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이 남았음을 상기시켰다.
“상관 가문은 충심이 가득하고 국구國舅(제왕의 장인)에게는 일국의 국모를 기른 공이 있으니 정일품 승은공에 봉한다.”
양왕의 말에 상관수가 연신 바닥에 고개를 찧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양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외쳤다.
“연회를 시작하라!”
조정 대신들과 귀족들이 하나씩 자리에 앉자 음악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곧 무희들이 들어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간식, 안주 등이 자리에 차려졌다.
“폐하.”
기해가 양왕에게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양왕은 주변의 소리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그저 혼자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독한 술을 삼키자 입맛마저 사라졌다.
황위를 빼앗는 것, 그의 어머니를 버리고 누님을 죽게 한 정선제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또 다른 원수인 폐태자와 정 황후에게 그가 즉위하는 것을 보여 줬다…….
참, 폐태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수족을 잘라 감옥에 가둬 놓았으니 시퍼렇게 눈을 뜨고 이 원수가 즉위하는 것을 보고 있을 터였다!
이보다 더 뿌듯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언제나 바라던 대로 명문가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운환을 왕으로 책봉했다. 밝힐 수는 없지만 공주의 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자리, 군왕의 자리를 주운환에게 준 것이다!
20년 동안 치욕을 참고 견딘 끝에 드디어 오늘, 모든 꿈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왜인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린 환관들은 계속해서 음식을 날랐고, 어느새 탁자마다 십이지신 모양의 전병이 놓여 있었다. 궁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간식이었다.
양왕의 시선이 그것들로 향했다. 너무나 익숙한 십이지신, 특히나 토자포는 그중에서도 평범해서 눈이 가지 않았다. 살짝 멍해진 양왕은 하얗고 동글동글한 토자포를 집어 들어 자기 앞으로 가져오며 중얼거렸다.
“이봐, 조앵기. 내가 황제가 됐다.”
말을 내뱉자 곧 충격과 슬픔이 물밀 듯 밀려왔다.
온 세상이 적막했다. 오로지 그의 마음만이 소용돌이쳤다…….
“폐하, 뭐라 하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운이었다.
양왕은 꽉 집어서 모양이 찌그러진 토자포를 보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녀를 그리워하겠는가! 어떻게 그녀를 좋아하겠는가!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겠는가!
그 바보 같은 여자, 천한 여자, 멍청하고 바보 같은…….
그녀는 결코 자신이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결코 그녀를 선택한 적이 없었다.
가끔 잘해 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스스로부터 속여야 했다.
그럼에도, 온 세상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것 같았다.
강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마음속 텅 빈 곳을 메울 수는 없었다. 구멍 난 그곳에서 색깔과 냄새가 모두 빠져나가고 온 마음이 무색무취로 변했다.
독한 술을 한 잔씩 넘길수록 정신이 흐릿해졌다.
언제 연회가 끝나고 어떻게 침궁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 채, 양왕은 용상에 누워 잠에 빠졌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즉위식이 끝났지만 꿈속에서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주 선생과 사람들이 평정소축 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실에선 기해가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옷을 정리해 주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조앵기가 있었다.
금홍색 황후복을 입고 찬란한 봉황관을 머리에 쓰고 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토자포와 엽연채로 가득하다는 것은 눈감고도 맞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릿속 귀퉁이에 자신이 있었다. 한 귀퉁이일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전부이고 그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란 걸 자신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아, 조앵기는 머릿속에서 그의 존재를 감춰 버렸다.
자신은 벌써 알고 있었다. 그러잖고서야 ‘내가 없으면 조앵기 너는 죽을 것이다.’ 같은 말을 했을까.
늘 바보처럼 웃는 그녀는 조금도 단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불쾌한 듯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봉황 장식이 늘어진 영락 목걸이를 걸어 줬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평정소축에서 걸어 나와 주 선생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들 부부가 십 년 넘게 지내 온 집을 나섰다.
어가에 올라 조정에 들어갔다. 조정 대신들과 모든 도성 사람들 앞에서 한 걸음씩 황제와 황후의 자리에 올라 절을 받았다.
조앵기는 모든 예식이 끝난 후에야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토자포 먹어도 돼요?”
자신은 짜증이 난 얼굴로 하나 집어 그녀의 그릇에 놓아줬다. 하지만,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이 강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 옆에 네가 없으면 빛나지 않는다.”
눈앞의 모든 것이 빛깔을 잃어버리고 오직 그녀만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는 아앙, 하고 토자포를 반쯤 깨어 물고는 뿌듯한 듯 돌아봤다.
“오, 그러고 보니 전하도 똑같았네요.”
똑같아? 뭐가? 아니, 그래. 실은 알고 있었다.
쿵! 어디서인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큰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조정, 엎드려 있던 대신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명쟁…….”
그녀에게 이름이 불린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연기로 변했다.
깨어나니 침상이었다. 양왕은 멍하니 샛노란 용상의 천정을 바라봤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는지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