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5화
어쩌면 백수가 바로 그런 평범한 백성들 또는 세상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조앵기가 그렇게 죽자 잠깐 탄식을 할 뿐 양왕의 탓은 하지 않는다. 양왕이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당연한 수순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조앵기는 늘 모두가 비웃는 양왕의 수치였으니 그녀가 죽지 않으면 양왕이 웃음거리가 될 것 아닌가.
역적이 된 정 황후와 폐태자가 양왕을 모함하고 모욕하려고 바보 같은 천민 출신 왕비를 그에게 안겨 줬다. 황제는 정 황후 모자를 금이야 옥이야 아꼈지만 결국 배은망덕한 모자는 황제를 죽이고 황위를 빼앗으려 했다.
결국 양왕이 황제를 구출하고 정 황후와 폐태자 모두 잡혀 마땅한 벌을 받았다. 양왕의 수치였던 바보 같은 왕비도 폐태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역적 폐태자는 예상치 못한 일에 놀라 정신을 못 차리고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세상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했다! 정말 대단한 반전이었다! 이 연극에서 조앵기는 그저 양왕에게 모욕감을 주는 물건일 뿐이었다!
사람에게는 동정심이 있지만 무관심과 선택적 무시도 있다. 더구나 다들 남의 일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이 연극일 뿐, 주인공에게 모욕감을 주는 물건의 심정을 궁금해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 모욕 덩어리와 폐태자가 한패라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밖의 사람들에게 조앵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님…….”
백수가 다시 입을 여는 찰나, 혜연이 백수를 쏘아보면서 나무랐다.
“됐다. 쓸데없는 소리를. 너희들은 나가 보렴!”
백수는 바로 입을 다물고 청유와 함께 나갔다.
엽연채는 더 심란해졌다. 조앵기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동정은커녕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다니.
“하지만 마님… 백수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마님은 왕비 마마와 사이가 가까우니 힘드시겠죠. 그렇지만 셋째 나리는… 늘 양왕 전하의 곁에 계셨어요. 셋째 나리에게 양왕 전하는 스승이자 아버지이고, 형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님이 나리와 잘 지내고 싶으시면 양왕비 일은… 더는 꺼내지 마세요.”
백수 같은 평범한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주운환은 누가 보아도 양왕의 사람이다. 엽연채 때문에 잠시 조앵기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뿐,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도성으로 돌아갈 마차가 준비되었다. 엽연채의 신변 여종들은 주인의 소지품도 가지런히 정리해 그 마차에 실었다. 나머지 어멈과 여종들은 각자 정리해서 천천히 도성에 와도 늦지 않았다.
사각 지붕을 덮은 꽃무늬 가마가 내실로 들어왔다. 엽연채가 아기를 안고 일어서자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갑옷으로 갈아입은 주운환이 붉은 투구를 쓰고 천천히 다가왔다.
“집에 가요.”
주운환이 투구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엽연채를 부축해 가마에 태웠다.
가마는 네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커서 엽연채 모자 말고도 제민과 혜연이 함께 탔다.
사람이 모두 타자 하인들은 가마의 휘장을 내렸다. 가마는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양쪽으로 난 창에 종이가 덧발라져 있었다.
네 사람이 가마를 들고 별장을 떠나 도성으로 가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가마 앞뒤로 봉을 덧대 여덟 명이 가마를 들었다. 엽연채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가는 동안 마차로 바꾸지 않는 대신 여러 사람이 들어서 손쉽게 행렬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 시진 가까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가마는 성문에 들어섰다.
양왕과 조정 대신들은 궁으로 들어가 정선제의 위패를 모시고 마지막 의례를 치렀다.
엽연채를 태운 가마는 바로 진서후부로 향했다. 가마를 든 하인들은 수화문에서 잡일을 하는 어멈 여덟에게 가마를 건네 운연거 내실까지 들어가게 했다.
엽연채는 그제야 가마에서 내려 침실로 들어가 쉬었다.
엽연채는 잠든 아기를 미리 만들어 둔 작은 침상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깃털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기의 작은 머리에 손을 대 보니 아직 열이 있었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자당께 알릴까요?”
혜연이 온씨를 언급하자 엽연채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말하지 말아. 곧 폐하의 즉위식이기도 하고. 도성이 아직 뒤숭숭하니 즉위식이 끝나고 말씀드려도 늦지 않아.”
“네. 청유야, 태의원에 가서 궁중의 일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육 태의를 모셔 오도록 해. 아이들 병은 그분이 제일 잘 보시니까.”
혜연의 말에 청유가 대답을 하고 바로 나갔다.
* * *
그 시각, 황궁.
장례의 마지막 예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직위가 높은 관리들은 모두 궁중의 종묘에 와 있었다.
제일 앞에 선 양왕은 향을 손에 든 채, 위패에 쓰인 정선제의 이름을 차갑게 노려보다 비웃고는 단향을 향로에 꽂았다.
환관이 예식이 끝났다고 하자 사람들은 대전으로 자리를 옮겨 장례 음식을 먹었다.
양왕은 황좌에 앉아 아래쪽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몸이 어딘가 이상했다. 앉아 있지 못할 정도라 술을 한 잔 마시더니 한마디를 내뱉고 옷깃을 휘두르며 나가 버렸다.
“짐은 피곤하니 알아서들 하거라!”
아래 앉아 있던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유 재상과 여지 등 몇몇 노신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학전과 몇몇 사람들은 양왕을 쫓아 나가며 당부했다.
“폐하, 즉위식은 사흘 후에 거행될 것입니다. 잘 준비하고 계십시오.”
양왕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붉은 입술엔 냉소만이 서려 있었다.
“무슨 준비? 너희들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 된다! 짐더러 용포까지 직접 만들라, 이 말이냐?”
대신들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아니옵니다. 소신이 어찌……!”
하지만 즉위식은 즉위식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장례도 순조롭게 잘 끝났으니 이 자리에서 이젠 유 재상나 다른 대신들과 즉위에 관한 일을 의논해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이렇게 홀연히 나가 버리다니.
양왕은 그대로 동화문으로 직행해 말에 올라탔다.
자학전과 대신들은 깜짝 놀라 한입으로 외쳤다.
“폐하!”
그러나 양왕은 못 참겠다는 듯이 채찍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의 말이 쏜살같이 달려나가고 언서와 언동이 그 뒤를 따라 질주했다.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멀뚱멀뚱 서로 바라보았다.
“폐하는 어딜 가시는 거지?”
자학전이 말했다.
“왕부로 돌아가시는 거겠지.”
장찬이 대꾸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양왕은 예전부터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거나 선황제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말을 타고 달렸다!
물어볼 것도 없이 분명 양왕부까지 마구잡이로 달려갈 터였다.
예전에 이것도 늘 양왕을 탄핵하곤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대신들도 더 이상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고 말이다.
장찬의 예측대로 양왕은 과연 궁을 벗어나 바로 양왕부로 갔다. 그는 말에서 내려 언동에게 고삐를 넘겨주고 어두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수화문 너머, 육 측비를 비롯한 여인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일찌감치 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그를 둘러싸고 재잘거리는 여인들은 전과 다를 것 없이 시끄러웠다. 양왕은 그녀들에게 알은체도 하지 않고 그저 걸음을 옮겼다.
“폐하……!”
진 측비와 여인들이 원망스러운 듯 그를 불렀다.
“어딜 가시는 거지?”
“흥! 어디겠어요! 우리도 이만 가요. ‘대사’와 ‘경사’를 의논해야 하잖아요.”
육 측비는 진 측비를 비웃으며 은근히 쏘아보았다. 그녀들이 요즘 제일 신이 나서 하고 있는 일은 그들이 황궁의 어느 궁전에 살게 될 것인지, 자신들이 어떤 작위에 책봉될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육 측비와 진 측비 두 사람에게 비의 자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두 여인은 어쩌면 자신이 귀비에 책봉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양왕은 평정소축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침실을 훑어보았다. 너무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다시 서차간에 가서 훑어보고 익숙한 듯 돌아 나왔다.
언서와 언동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양왕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양왕은 본채에서 나와 서재가 있는 화원으로 향했다가 그곳의 다리로 갔다. 그 주변을 돌아보던 양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폐하…….”
언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는 안 계십니다.”
양왕은 흠칫하더니 차가운 눈으로 언서를 노려보았다.
“짐은 화원을 산책하고 있다.”
언서와 언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양왕을 따른 그들은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았다. 양왕이 왕부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던 일은 바로 조앵기를 찾는 것이었다.
조앵기가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이 바로 이 세 곳이었다. 침실, 서재 뒤편의 냇가, 앞쪽 화원의 다리. 집에 돌아와 조앵기를 찾으면 언제든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주 선생, 하배와 사람들을 서재로 불러라.”
차갑게 말을 내뱉은 양왕이 옷깃을 세차게 휘두르며 떠났다.
언서 형제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들은 아직 술을 마시고 있을 텐데! 도성에 도착해 ‘황제를 구출’한 후 주 선생과 사람들은 하루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려는 차에 또다시 서재로 불러들이다니. 그러나 두 형제는 감히 뭐라 말하지 못했다.
한데 길을 나선 언동이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주 선생과 하배 일행은 벌써 수화문에 있었다. 그들은 언동이 말을 전하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에 도착해 양왕과 정사를 의논했다. 그리고 곧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각지에서 온 장계를 펼쳐 확인했다.
양왕은 저녁이 되어도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재에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러고 이튿날 아침, 새로 만든 용포가 도착했다.
이제 곧 새 황제의 즉위식과 황후 책봉식이 거행된다.
* * *
엽연채의 출산 소식은 이내 소문이 났고 여기저기서 첩자를 보내 안부를 물어왔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곧 황제의 즉위식이 열릴 터였다. 지금 같은 때 진서후부로 우르르 몰려가 축하하면 새 황제가 받을 관심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다행히 주요는 이날 드디어 열이 내렸다.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간 잔병치레가 계속됐음에도 아기를 저울에 올려놓고 재 보니 몸무게가 족히 한 근은 늘어 있었다. 엽연채는 보들보들한 아기를 안고 입을 맞췄다.
“요는 정말 착한 아기구나.”
이제는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불그스름하지 않았다. 몸집은 좀 작았지만 우유처럼 뽀얗게 변해 하얗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우…….”
주요는 엽연채의 품에 안겨 입을 벙긋거렸다.
“어머… 웃었네.”
엽연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