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4화
일행이 방에 들어가자 하인들은 놀라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주운환이 양왕과 유 재상 등 사람들을 서차간으로 안내했다.
“부인을 불러오겠습니다.”
양왕이 손을 저었다.
“아직 조리 중 아니냐, 편히 쉬게 해라. 나올 필요 없다.”
“네.”
주운환이 대답하고 방에서 나갔다.
침실로 들어가니 엽연채가 아기를 안고 어르는 중이었다. 주운환은 조심스레 아기를 넘겨받았다.
“보여 주고 오겠습니다.”
“아직 열이 있는데…….”
엽연채가 마음이 아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심할게요.”
주운환도 아기 대신 자기가 아파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폐하께만 보여 드리고 다른 사람들은 만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주운환은 조심스럽게 강보를 안고 서차간으로 갔다. 그가 돌아오니 양왕은 바로 일어서 다가갔다. 꽃무늬 수를 놓은 비단 강보에 손바닥만 한 얼굴이 싸여 있었다. 살갗이 발그스레한 아기는 눈을 감고 잠든 채였다.
양왕은 손을 뻗어 보드러운 아기에게 손을 대 보았다. 마음이 절로 몽글몽글해졌다. 이 기분이 낯설면서도 좋은 양왕은 아이를 안고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이름이 뭐냐?”
“주요입니다.”
“빛날 요 말이냐? 오, 좋은 이름이구나!”
양왕이 시원하게 웃자 다른 대신들도 모두 칭찬했다.
“광명을 널리 밝힌다는 뜻이니 참 좋은 이름입니다!”
“맞습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가라앉자 양왕이 다시 입을 뗐다.
“호는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양왕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이름은 주요, 호는 자소子蕭로 하거라.”
주운환은 양왕에게서 호를 내려받게 돼 굉장히 기뻤다.
“좋은 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좋은 호입니다.”
“훌륭한 호입니다.”
대신들도 연달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하하하.”
양왕은 품에 안은 아기를 살살 두드리며 웃었다.
“요야, 자소야…….”
하나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양왕의 마음이 조여 왔다. 그 호는 원래 자신의 아이를 위해 지은 것이었다.
아이가 다섯이었지? 만약 태어났으면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했을 터. 다섯 아이의 이름을 다 지어 놓았건만 단 하나도 태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양왕의 기분이 가라앉아 표정도 차가워졌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갑자기 양왕의 안색이 바뀌자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폐하?”
양왕이 피식 웃었다.
“짐에게도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지.”
양왕에게 아이가 있었단 말인가? 대신들은 멀뚱멀뚱 서로만 바라보았다. 양왕이 폐태자와 자리다툼을 할 때 그들은 양왕의 자식 문제에도 주목했다.
그가 즉위한 지금까지도 그걸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물여섯이면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은 벌써 일고여덟 살은 되었는데 양왕에게는 아들은 고사하고 딸 하나 없었다!
양왕의 후원에는 여인들로 가득했다. 모든 황자들 중 첩이 제일 많았다. 그러니 그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은 아닌지 대신들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운환이 이에 대해 상의를 거치지 않고 무력으로 그를 황위에 올렸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감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양왕이 갑자기 자식 얘기를 꺼내자 대신들도 어리둥절했다. 사실이건 아니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없다고 암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리 판단을 내린 대신들이 하나둘 말을 이었다.
“전에는… 인연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생길 것입니다.”
“맞습니다. 새 황후 마마가 폐하께 적장자를 안겨 드리실 겁니다.”
양왕의 얼굴이 조금 펴지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주요를 보고 웃었다.
“짐이 아들은 없지만 손자는 있구나.”
그러곤 보들보들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대신들은 입을 씰룩거렸고 주운환도 얼굴이 굳어 버렸다.
“흠……. 이 아기는…….”
양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짐을 닮았구나.”
“풉!”
유 재상은 그대로 마시던 차를 내뿜고 벌떡 일어섰다.
“폐하……!”
대신들은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미쳤다! 미쳤어! 황제가 실성을 한 것이 틀림없다!
주운환은 정말로 화가 나서 얼굴이 어두워졌다.
“폐하, 요는 저를 닮았습니다.”
양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자네도 나를 닮았지!”
모두들 그 자리에 얼어붙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주운환도 정신이 아득해져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양왕은 전에도 종종 자기가 그의 아들이고 엽연채가 며느리라는 말을 했다.
그러더니 지금은 또 주요가 본인과 닮았다고, 거기에 이쪽도 본인과 닮았다고 하고 있었다. 이쪽이 양왕의 아들이고 요는 그의 손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 아이가 퍽 마음에 드는구나. 궁에 데려가 키워야겠다.”
양왕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방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다들 정신을 놓아 버린 듯 양왕을 뻔히 보고만 있었다.
저 아이는 진서후의 아들이다! 황제가 그의 아들을 데려가겠다니!
좋게 생각하면 양왕이 아기를 그만큼 마음에 들어 한다는 말이지만, 그것도 정상은 아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양왕이 진서후를 경계하기 시작해서 그 아기를 궁에 데려가 인질로 삼으려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벌써 토사구팽이 시작되었단 말인가? 하나 아무리 진서후를 경계한다고 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양왕의 황위는 아직 불안하다! 그리고 진서후는 큰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 떠나서 망신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폐하, 아니 됩니다!”
유 재상을 비롯한 대신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여지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양왕은 코웃음을 치며 주운환을 보았다.
“주운환, 짐은 정말 이 아기가 마음에 든다. 앞으로 내가 글을 가르쳐 줄 거야.”
주운환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도 자신의 아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폐하…….”
“마님.”
그때 별안간 바깥에서 여종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주운환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양왕도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가 진홍색 우단 외투를 걸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았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깃털처럼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몸조리 중 아니었더냐? 일어나라.”
양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인이 아기를 걱정해 왔단 걸 아는 주운환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부인.”
엽연채는 두어 번 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요에게 호를 지어 주셔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요를 아껴 주시니 그 또한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요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데다 몸이 아파 부모에게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유 재상과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자학전은 나 의정을 끌어들였다.
“의정, 안 그렇습니까?”
나 의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몹시 허약해 생모가 직접 보살펴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친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허약한 아이에게서 먹을 것까지 빼앗으면 살 수 있겠나?
“폐하께서 요가 마음에 드신다면 아이가 건강해지고 소신이 자주 궁에 데려가 폐하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반대만 해 대니 양왕은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자신도 서너 살 무렵 친어머니를 잃어 봤기에 그게 얼마나 힘든지를 떠올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하, 짐도 그저 해 본 소리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대신들도 이마에 식은땀을 닦았다.
“폐하, 늦었습니다. 어서 도성으로 돌아가시지요!”
자학전이 말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하나 서두르면 해가 저물기 전에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잖고 양왕이 이곳에서 머무르고 가겠다면 일이 커진다. 공간의 문제도 있으니 따라온 신하들도 따라서 머물러야 할지 아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돌아가자! 운환도 같이 돌아가지.”
양왕은 차갑게 대꾸하며 주운환을 돌아보았다.
“알겠습니다.”
주운환은 바로 대답했다. 엽연채는 아직 몸조리 중이었지만 같이 돌아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몸조리할 때는 바람을 쐬면 안 되니 외출은 최대한 삼가야 한다지만, 아기가 너무 허약해서 늘 아프단 문제가 있었다.
별장에서는 아픈 아이를 돌보기가 아무래도 불편했다. 급하게 탈이라도 나면 도성까지 나 의정을 찾아가야 한다. 양왕이 나 의정을 이곳에 머무르게 해 준대도 아이들 병은 나 의정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또 이곳에서는 비싼 약재가 귀해 급히 약을 써야 할 때도 발품을 한참 팔아야 했다.
역시 도성으로 돌아가는 게 제일 상책일 성싶었다.
“그럼 가지!”
양왕이 몸을 일으켜 나갔고 대신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양왕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엽연채의 가슴은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주운환은 기운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어루만지자 엽연채는 어렵게 입을 뗐다.
“지난번에…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는데, 찾았어요?”
줄곧 물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조앵기의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너무 고통스러웠다.
“네.”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기가 건강해지면 보러 가요.”
“부군은 어서 가 봐요!”
엽연채는 코끝이 시큰해져 아기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양왕이 정말 미웠다. 조앵기를 떨어져 죽게 하다니.
고의가 아니라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어쩔 방도가 없어 그녀를 죽게 했다는 말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조앵기가 어떻게 해도 양왕부를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랬는데 경위영이 삼엄하게 지키는 상황에서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양왕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엽연채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은 죽어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이 그녀를 구하지 못한 것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주운환은 떠날 채비를 했다. 엽연채는 아기를 안고 침상에 앉아 있었고 제민도 말이 없었다.
혜연, 청유와 함께 짐을 정리하던 백수가 엽연채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자 이렇게 그녀를 다독였다.
“마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자책도 하지 마시고요. 왕비 마마와 사이가 돈독하셨던 건 알지만… 저희는 자주 보지 못해서 그런지 잘 이해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단 거예요.”
조앵기 같은 신분으로는 황후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결말은 쓸쓸히 버려지거나 죽는 것뿐이었다. 그게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앵기의 결말이었다. 아무도 양왕을 탓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