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1화
양왕이 냉소했다.
“미쳤군. 헛소리 작작 하고 여자를 내려놓아라.”
폐태자는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네가 감히!”
그가 손에 쥔 칼에 힘을 주자 조앵기는 목에서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하얗고 부드러운 그녀의 목에서 피가 흘렀고 그녀는 고통스러워 몸부림쳤다.
“아악… 아파요……!”
“한 걸음만 더 가까이 오면 본궁이 이 여자를 죽이겠다!”
폐태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씩 웃었다. 그의 협박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있던 송초가 앞으로 나섰다.
“길을 터라!”
경위영이 주위를 물 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국상 중인 지금, 저들은 조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하나 국상과 즉위식이 끝나면 양왕은 이 잡듯 온 세상을 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하니 지금 조앵기를 인질로 삼아 도망가는 것이 낫다. 복수든 뭐든 일단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넷째, 너……!”
폐태자는 비웃는 얼굴로 양왕을 내려다보았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어깨가 화끈거렸다. 화살 한 발이 그의 어깨에 꽂혔다.
모두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양왕의 손에 진천궁이 들려 있었다. 아름다운 양왕의 얼굴이 차가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저 덜떨어진 여자로 짐을 협박할 수 있을 줄 알았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하하, 고작 저 여자 때문에 짐이 나라를 내놓을 것 같나? 아니면 너를 살려 주기라도 할 것 같은가?”
폐태자는 어두운 얼굴로 조앵기의 가느다란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사납게 외쳤다.
“이것의 목숨이 필요 없단 말이냐?”
“필요 없다!”
양왕은 아랑곳 않고 손에 든 궁을 어루만졌다.
“하하하하! 거짓말이다! 네가 이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려서부터 이 여자에게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싫다면서도 아주 잘 보살폈지. 심지어 도망갈 때도 데려가지 않았더냐!”
양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폐태자를 빤히 보았다. 얼음꽃이 핀 듯한 눈이 살짝 웃고 있었다.
“저 여자가 멍청하니 그리했다! 내가 마음을 주는 척하지 않았다가 너희들이 저것을 죽이고 똑똑한 여자로 바꾸면 어쩐단 말이냐?”
폐태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양왕은 겨우 여섯 살이었다! 여섯 살짜리가 그들 앞에서 연극을 했단 말인가?
“하, 짐은 너희가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지금 돌려주지!”
양왕은 냉소조차 거두어들이고 다만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냈다.
폐태자는 표정이 달라져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양왕의 말을 듣고 있던 조앵기도 심장 박동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 도망길에 주웠던 그 작고 더러운 새끼 고양이가 떠올랐다.
양왕은 몸을 굽혀 자신과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너와 정말 닮았구나!”
정말 많이 닮았다! 원하는 사람이 없는, 하여 끝내 버려진 것들.
실은 고양이를 만났던 그때 스스로도 녀석과 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혼자 길거리를 헤매던,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던, 너무나 가여운 그 고양이를 그래서 품어 주고 싶었다.
그 고양이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을 원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길가의 그 아낙네가 돈을 받고 잠시나마 고양이를 받아 주었다지만, 그건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목숨은 양왕의 손에 달려 있었다. 운명도 역시 그의 손에 달렸다.
양왕의 황위를 향한 여정에는 분명 자신의 몫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결말, 자신의 거취 또한 그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양왕부에 들어온 날부터 자신은 그의 수치였다.
정正황후의 소생인 양왕이 비천한 평민을 아내로 맞았다고 모두들 비웃었다. 그것도 정 황후가 붙여 준 사람이 자신이었다.
한편, 폐태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양왕의 속내가 저것이었다니……!
친모가 억울하게 죽은 후, 계모가 내려 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놓고는 그토록 소중하게 아끼고 있으니 어찌 우습지 않았겠나? 자신은 모후와 함께 조앵기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비웃었다. 그 모친과 누님을 죽인 원수인 자신들이 내린 산해진미를 양왕은 저렇게 좋아하며 먹어 대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정말이지 신나고 재미있었다! 양왕이 그 치욕을 이렇게 도로 돌려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때, 조앵기는 정신을 놓은 듯 몸을 떨면서 아래쪽의 양왕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전하… 전하… 전하!! 전하아!!”
그 속삭임은 이내 날카로운 비명으로 변했다. 그녀가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으나 양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차갑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저놈을 끌어내려라!”
“폐하!”
주운환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일은 너와 상관없다. 이건 황명이야.”
양왕은 돌아서서 주운환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언서.”
“네! 궁수 준비!”
양왕의 부름에 언서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앞줄에 서 있던 경위영 궁수들이 일제히 성루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폐태자는 달라진 얼굴로 조앵기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그녀의 머리칼을 한껏 잡아당기며 성루 밖으로 밀었다.
“천한 것! 정말 쓸데라곤 없구나!”
조앵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명쟁… 모명쟁……!”
자신도 모르게 양왕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살짝 웃었다. 날카로운 것이 몸을 뚫고 지나간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두 눈을 감는 순간, 밖으로 떠밀려 떨어졌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소스라치며 소리를 질렀으나 분홍색 그림자는 결국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양왕은 코웃음을 쳤다. 저 바보 같은 여자, 평생의 치욕이 드디어 죽었다! 다 끝났다!
“저놈을 죽여라!”
양왕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경위영 군사들이 동시에 시위를 당겼고 화살이 위를 향해 날아갔다. 폐태자, 이계, 송초가 일시에 성루에 쓰러졌다.
“폐하를 모시기 위한 길한 시간을 놓칠 수 없다. 행진하라!”
양왕이 말에 올라 명을 내렸고 주운환은 침착하게 고했다.
“황제 폐하, 소신은 뒤로 가 보겠습니다…….”
“가 봐라!”
“네.”
주운환은 말에 올라 행렬 뒤쪽으로 달려갔다.
한편, 엽연채와 제민은 조앵기가 다쳐 성루 밖으로 떠밀려 죽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넋을 잃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주운환이 달려왔다. 주운환은 말에서 내려 창백하게 질린 엽연채를 감싸 안았다.
“왜 여기 서 있습니까? 어서 들어가요.”
그는 먼저 엽연채를 마차에 태우고 제민도 마차에 오르게 했다. 주운환은 제민과 함께 타는 것을 꺼릴 사이도 없이 따라 타서 엽연채를 끌어안았다.
장례 행렬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도 급히 그 행렬을 따라갔다. 마차에 앉고서도 엽연채는 계속 떨고 있었다.
“앵기… 앵기……!”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죽음은 그분의 계획 중 하나였습니다. 누구도 바꿀 수 없었어요.”
주운환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아니, 아니에요, 만약… 만약 우리가 부탁했다면! 우리가 미리 알아채고 부탁을 했더라면…….”
엽연채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진작 왕비를 죽일 생각이셨는걸요…….”
“알고 있었어요?”
엽연채의 두 눈이 커졌다.
“왕비가 사라지고 나서 알았어요.”
주운환도 진작 조앵기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조앵기를 후궁에 가두거나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아니면 하얀 능사나 독주를 내려 자결하게 할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할 줄이야.
“왜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가서…….”
제민이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가도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황제입니다. 막는다면 당신부터 죽을 겁니다! 나도 막을 수 없어요! 황제의 명입니다! 내가 그분을 배신하지 않고서야 어쩔 수 없어요!”
주운환이 차갑게 소리쳤다.
마차는 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주운환이 양왕을 배신한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운환의 충심 또는 그의 마음이 향한 곳은 조앵기가 아니라 양왕이었다. 그에게 조앵기는 그저 부인과 가까운 여인일 뿐이었다. 주운환이 조앵기 때문에 양왕과 대치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조앵기는 굉장히 특수한 처지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애당초 폐황후가 염탐꾼으로 써먹으려 양왕에게 붙였던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길 같은 건 없었다.
전후 사정이 너무나도 분명한 까닭에 생사를 막론하고 아무도 그녀를 가여워하지 않았다. 설령 동정했더라도, 주운환은 황명을 거스를 수 없는 신하였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꼭 안았다.
“생각하지 말아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엽연채는 계속 떨면서 숨을 헐떡였다.
그때 불어오는 바람에 마차의 휘장이 휘날렸다. 휘장이 걷어 올라가던 그 순간 분홍색 그림자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엽연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저게 앵기예요?”
“보지 말아요!”
주운환은 그녀의 눈을 단단히 가렸다.
“아… 아아……! 저기 앵기가 있어요, 앵기를 데려가야 해요……!”
엽연채는 그의 품에 파묻힌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때 그녀의 배에 갑자기 경련이 일어났다. 엽연채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배를 움켜쥐었다.
“윽… 너무 아파……!”
“어어, 양수… 양수가 터진 것 아니에요?”
혜연이 놀라 소리쳤고 주운환도 낯빛이 변해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여한, 어서 폐하께 가 부인의 몸이 좋지 않아 더 이상은 무리이니 우리는 먼저 별장으로 간다고 말씀을 전해라!”
“네.”
여한이 바삐 말을 달려 곧 양왕 곁에 도착해 손을 모으고 말했다.
“폐하, 저희 마님께 산기가 임박한 것 같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가는 방향에 저희 별장이 있으니 먼저 가서 쉬어도 될지 여쭙습니다.”
양왕도 정선제의 장례가 완벽하거나 말거나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가라! 운환의 아이에게 행여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감사합니다, 폐하.”
여한이 다시 바삐 말 머리를 돌렸다.
“여양! 빨리, 어서 별장으로 방향을 돌리자.”
이미 도성을 벗어난지라 엽연채가 죽순을 가득 심던 별장과 그리 멀지 않았다. 여양은 마차 고삐를 당겨 황급히 행렬에서 벗어났다.
엽연채는 너무 아파 소리를 질렀다.
“부군, 부군……!”
“부인, 걱정 말아요.”
주운환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곧 별장에 도착해요.”
“부군… 저기 앵기가 있어요…….”
엽연채는 놀라고 무서워 배를 꼭 안고 있었다. 배 속의 아기도 걱정되지만 조앵기 걱정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사람을 보내 찾아올게요.”
주운환이 바깥으로 소리쳤다.
“장씨! 가서 양왕비를 찾아와라.”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