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0화
“연채야, 괜찮아?”
배를 받치고 있는 엽연채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제민이 걱정스레 물었다.
“응, 괜찮아. 좀 흔들려서 그래.”
“마차는 편안한 편인데 배 속에 아기가 있다 보니 예민해지셨나 봐요.”
청유가 말했다.
“몇 달이나 됐지?”
제민이 엽연채의 부푼 배를 쳐다보며 이리 물으니 혜연이 대신 답했다.
“일곱 달 조금 넘었어요.”
“이제 세 달만 참으면 나오겠네. 영교가 출산하고 나서 종종 그 집에 놀러 가는데, 요즘 얼마나 기분 좋아하는지 몰라. 몸이 제비처럼 가볍고 가뿐하다고 자랑하더라고.”
제민이 재미있다는 듯 말하자 엽연채도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출산하면 고모보다 더 신날 것 같아.”
배 속의 작은 생명이 그녀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줬지만, 그동안 정말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때는 몸을 펼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프기도 했다. 걱정할까 봐 차마 주운환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특히 요즘 달수가 차오르면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배가 불러 와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영교가 매일 연채 네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고. 근데 아직 출산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서 아직은 외출하기가 그렇잖아. 모두의 시간이 맞으려면 적어도 구월은 되어야 하겠어.”
“그때면 가을바람도 선선할 테니 밖으로 나들이 가기 딱 좋겠어요.”
청유가 나들이 얘기를 꺼내니 다들 벌써부터 기대하는 얼굴이 됐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덜컹하더니 급히 마차가 멈춰 섰고 모두 앞으로 쏠려 넘어졌다.
“어머……!”
“연채야, 괜찮아?”
마차 벽에 부딪힐 뻔한 제민이 고개를 돌려 엽연채부터 확인했다. 엽연채는 청유에게 기댄 채 얼굴이 창백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청유가 잡아 줘서 괜찮아. 벽에 두꺼운 천을 대어 두기도 했고.”
제민은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벌컥 창의 휘장을 열었다.
“마차를 어떻게 모는 거……!”
제민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엽연채도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출상 행렬은 벌써 성문에 도착했고 주변의 경위영 군사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듯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성루에 서 있는 사람들이 험악하게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폐태자와 그 뒤에 선 이계, 송초였다. 며칠 동안 고초를 많이 겪었는지 남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폐태자는 아직까지 태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검은색 망포를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다 헝클어지고 턱에는 수염이 잔뜩 자라 초라한 행색이었다. 폐태자의 왼팔이 휑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 손이 잘린 것이다!
엽연채의 눈에 폐태자가 하얗고 가냘픈 여자를 제압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그 여자는 폐태자의 손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앵기?”
엽연채는 믿을 수 없단 듯 눈을 부릅떴다.
“토자포가 왜 저기에 있어?”
제민도 놀라 소리쳤다. 엽연채는 굳은 얼굴로 휘장을 걷고 마차에서 뛰쳐 내려갔다. 마차를 몰던 여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마님!”
“연채야!”
제민도 놀라 따라 내렸고 혜연과 청유도 황급히 뒤따랐다.
“마님, 어서 마차에 타시고 나오지 마세요.”
엽연채를 부르는 여양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아니, 저길 봐! 앵기 아냐? 왜 저기 있어? 양왕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한 방향을 가리키는 엽연채의 얼굴은 완전히 납빛이었다.
제민도 이상한 듯 여양을 보았다. 자신은 양왕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양왕은 조앵기를 꽁꽁 싸매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훔쳐 가기라도 할 듯 그녀를 품에 끼고 있었다.
그래서 제민은 조앵기가 황후는 못 되어도 양왕이 곁에 남겨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과는 처지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왕부를 그렇게 엄중하게 지키고 있는데도 조앵기가 폐태자에게 붙잡힌 것이다.
“양왕비는 벌써 사흘 전에 사라졌습니다. 저도 왕비가 왜 저기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왕부를 나갔다가 폐태자에게 잡히신 것 같습니다. 마님, 지금 도우실 순 없으니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여양이 애원하듯 재촉했다. 이때, 뒤에서 한 무리의 경위영 병사들이 돌진해 왔다. 무리를 이끄는 것은 젊은 남자였는데, 바로 도성까지 양왕을 호위했던 하배였다. 벌써부터 그가 뒤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엽연채를 본 적 없었지만 여양의 말을 듣고 진서후 부인이란 것을 알았다. 하배는 침착하게 앞으로 나서 예를 갖춘 후 그녀를 설득했다.
“부인, 마차에 타십시오.”
엽연채는 애가 타서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부군을 만나야겠다.”
“안 됩니다.”
하배가 냉랭한 목소리로 잘랐고 여양도 낮게 한숨을 쉬며 말렸다.
“마님, 나리는 마님을 만나지 않아도 마음을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엽연채가 조앵기를 걱정하는 건 주운환뿐만 아니라 여양 저도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언제나 조앵기에게 잘해 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주운환에게도 방법이 없었다. 성루 위, 폐태자의 손안에 저렇게 붙들려 있으니!
폐태자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양왕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양왕 손에 달려 있었다. 양왕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신하로서 주운환이 할 일이다!
“부인, 마차에 오르십시오! 지금 폐태자는 상갓집의 개 꼴입니다. 몇 남지 않았겠지만 그 잔당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인께서는 안전을 위해 마차에 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배가 연신 재촉했고 엽연채도 어떤 상황인 줄 알고 있어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걸음을 떼는 대신 손을 들어 성루에 있는 폐태자와 조앵기를 가리켰다.
“폐태자에게 남은 사람은 저 사람들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모험을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 서 있겠다…….”
엽연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제민도 어두워진 얼굴로 엽연채를 부축할 뿐, 도로 들어가자고 하지 않았다. 그녀도 엽연채 못잖게 초조했다.
결국 하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경위영은 경계 태세에 돌입해 창검을 들고 양왕 주변을 둘러쌌다.
길 양쪽에 무릎 꿇고 있던 백성들은 이상한 분위기에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기 봐, 위에 있는 게 태자 아니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서둘러 그 말을 한 사람의 입을 막았다.
“태자는 무슨? 폐태자지.”
“그렇지, 폐태자!”
“저 여자는 누구야?”
“양왕비다!”
“엇, 왜 저기 있지?”
백성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는 것처럼 조정 대신들도 수군거렸다.
유 재상 등 대신들은 양왕 곁으로 몰려갔다.
“폐하!”
양왕은 고개를 들어 성루에 선 폐태자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쥐새끼 같은 네놈이었구나! 스스로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짐의 수고를 덜어 주었어.”
양왕 스스로 ‘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폐태자는 성루 아래의 양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자신과 모후가 형부 감옥에 갇혀 있던 때, 오성병마사와 송초가 죽을힘을 다해 자신들 모자를 빼냈다. 하지만 달아나던 도중 모후는 화살을 맞았는데, 중상을 입고도 약을 사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해 그대로 운명을 달리했다.
어디 그뿐인가. 도성 곳곳에서 불을 켜고 자신을 수색했고, 그렇게 처음 경위영과 싸울 때 왼손을 잃고 말았다!
불구가 되었으니 황제가 되기는 완전히 틀렸다.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죽고 송초와 이계만 남았으니, 막다른 길이었다.
폐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양왕부에서 조앵기가 뛰쳐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붙잡은 것이다.
폐태자는 손만 잃은 것이 아니라 상황을 역전시켜 황제가 될 기회도 진작에 잃어버렸다. 하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양왕만은 황천길로, 반드시 같이 끌고 갈 것이다!
폐태자가 오른손에 쥔 칼을 조앵기의 목에 들이대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든 왼팔에 힘을 주자 조앵기는 잠깐 끙끙대더니 곧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폐태자가 위협하지 않더라도, 성루로 끌려 올라온 조앵기는 이미 몸이 너무 약해져 신음조차 내기 힘들 지경이었다. 다만 엽연채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날 길은 몰라도 양왕부를 떠나 엽연채를 찾아가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폐태자에게 잡힌 것이다. 그에게 붙잡힌 순간, 그녀도 이제 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사실 그날 냇가에서 그 사람이 부하들과 나누던 대화를 들었고, 자신의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깨달았다. 다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벗, 엽연채를 찾아가 안아 보고 싶었다. 재수 없는 제민도 한번 보고 싶었다. 자신더러 바보 같고 변변치 못하다고 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토자포도 아직 못 먹었는데…….’
조앵기는 절망에 가득 찬 눈을 떨구었다. 성루 아래의 양왕이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를 보자마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 너무나 무서웠다……! 이 꼴이 되었는데 아직도 달려가 그에게 안겨 울고 싶었다……!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여전히 그랬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이젠 모두 끝났다.
양왕은 조앵기의 목에 칼을 겨눈 폐태자를 냉랭하게 바라보며 비웃듯 내뱉었다.
“네놈 하는 짓이 참 익숙하구나. 그때도 이렇게 아바마마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겠지.”
폐태자와 이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래의 백성들도 모두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유 재상과 여지가 성루 쪽으로 달려들어 설득을 시도했다.
“전하,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시고 순순히 항복하십시오.”
유 재상의 말에 폐태자는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
“이 모든 게 다 넷째 네놈의 계략이지? 네놈이 진서후, 나 의정과 함께 나와 아바마마를 함정에 빠뜨린 거야!
재상, 여 상서! 나와 아바마마 사이가 얼마나 좋았는지 다들 알지 않는가. 진서후가 나에게 바람만 넣지 않았다면 내가 유혹에 넘어가 아바마마께 그런 일을 저지르는 일도 없었을 걸세.”
유 재상과 여지는 눈길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저었다.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는데 폐태자가 말한 것이 사실인들 어쩌겠는가? 역대 황제들 중 누구의 손인들 깨끗한가?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되는 것이다!
이건 어느 집 형제들이 재산을 탐해서 아비를 죽이는 그런 너절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황위 싸움이다! 나라를 건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