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9화
태자의 반역 이후, 주운환은 밤낮없이 바삐 도성으로 돌아왔다. 바깥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참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주운환은 해시亥時(저녁 9시~11시) 무렵 잠에서 깼다. 엽연채는 그 곁에 앉아 주운환의 적염전갑을 바느질하고 있었다.
주운환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따뜻하게 그 손을 잡았다.
“몇 시나 됐어요?”
“해시요. 배는 안 고파요? 저녁도 안 먹었잖아요.”
엽연채는 들고 있던 바늘을 내려놓으며 대답했고, 주운환은 엽연채의 다리를 베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럼 좀 더 잘게요. 반 시진 후에 깨워 줘요.”
“왜요?”
“해시 반은 부인이 야식 먹을 시간이니까.”
엽연채가 소리 내어 웃으며 긴 손가락으로 주운환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일찍 먹어요. 어서 일어나요!”
주운환은 그녀의 손을 잡고 두어 번 입을 맞춘 다음 일어나 앉았다.
“참, 폐태자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소문을 들어 보니 폐태자가 도망친 것 같아 엽연채는 걱정스러웠다.
“양왕… 아니, 폐하께서 이 일은 직접 처리하신다고 집에 돌아가 쉬라고 하셨어요. 언서 형제에게 맡겨서 두 사람이 경위영을 인솔해 데려갔고요.”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잠에 들었다.
* * *
이튿날 주운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일을 처리했다.
정선제의 시신은 궁에 안치되어 있었고 대신들과 공훈 귀족들은 매일 영당靈堂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주 백야와 진씨 등 작위가 있는 사람들은 매일 입궁했다.
엽연채도 일품 부인이라 본래라면 얼굴을 자주 비춰야 했지만, 임산부란 이유에서 한 번만 가고 이후로는 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양왕이 주운환에게 준 특혜였다. 이에 불편해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감히 불평을 하지는 못했다.
황후를 맞이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날 결정한 후 양왕이 상서 몇 명을 상관 가문으로 보내 혼담을 꺼냈다.
상관 가문의 가장, 상관수의 아버지, 즉 상관운의 조부는 벌써 고향인 정주를 떠나 도성에 와 있었다. 황실의 혼담이 들어오니 그는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바로 응했다.
상관 가문은 세력이 상당하지만 당장 생활이 곤궁했다. 금위군 통령 자리도 다시는 상관수의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하니 상관운이 황후에 오르는 일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후가 되어야만 가문도 이 시기를 잘 보내고 계속 번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상관 가문이 명문가이긴 해도 지금까지 작위가 없단 약점이 있었다. 상관운이 황후 자리에 앉으면 ‘승은공’ 작위도 생기니 비로소 남들 앞에서 아쉬울 게 없게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국상과 즉위식, 황제의 대혼大婚이 동시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국상 기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데다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 양왕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어서 그럴 때 대신들은 영당 옆 궁전에 양왕을 불러다 상의했다.
지금도 대신 몇몇이 양왕의 답을 듣고 물러났다.
양왕은 태사의에 걸터앉아 색유리 술잔을 들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장례 음악이 귀에 거슬렸다.
곁을 지키던 주운환이 다가가 운을 뗐다.
“폐하, 황후를 들이는 일은 준비가 끝났습니까?”
“그래.”
양왕은 짧게 대답했다.
“양왕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각하신 바가 있을 것 아닙니까.”
양왕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갑게 웃었다.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네 부인이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라더냐?”
주운환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제가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폐하도 사실은 양왕비를 많이 아끼시지 않습니까?”
양왕은 담담한 표정으로 주운환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너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하하, 앉아라. 나하고 한잔하자꾸나.”
주운환은 멈칫하다 곁에 있는 태사의에 앉아 잔을 들었다.
“폐하, 신하 된 도리로 이런 일은 소신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만 저는 언제나 폐하를 형님처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나는 널 동생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순간 주운환은 무언가에 찔리듯이 심장이 쿡쿡 쑤셨다. 양왕은 상처받은 듯 멍해진 주운환의 얼굴을 보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운환, 나는 널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
주운환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전하가 아들 생각에 미쳐 버렸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양왕이 자신을 형제로 생각하든 아들로 생각하든 어차피 다 평범한 군신 관계는 아니었다.
“저는 폐하가 복수나 명예에 눈멀지 않고 잘 지내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양왕의 입꼬리가 움찔하더니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살짝 문질렀다.
“여섯 살 때 도성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본왕의 정신이 이렇게 맑았던 적이 없었다.”
주운환은 살짝 놀랐지만 양왕이 자신을 보고 있는 강렬한 눈빛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가을날의 물처럼 깨끗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했다!
“하.”
양왕은 잔을 집어 던지고 일어나 문가로 다가가 두 팔을 벌렸다.
“이 나라를 내 손에 넣었다! 모든 원수들도 차근차근 막다른 길로 밀어 넣을 것이다!”
마음이 이토록 통쾌했던 적이 과연 전에 있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어둠과 위기 속에서 버텨 왔다. 정선제와 정 황후, 태자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과 자애로운 부자 사이를 보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노했다. 차디찬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누님, 원망과 절망 속에서 죽어 간 어마마마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삶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욕망, 어둠, 몸부림, 증오… 그리고 두려움!
어마마마는 음식에 독약이 든 것을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을 기회를 자신과 누님에게 양보한 것이다. 도성으로 오던 도중 추격자들에게 쫓길 때에는 누님이 직접 사람들을 유인했다. 살아남을 기회를 저에게 양보한 것이다!
여섯 살 때부터 이런 짐들을 안고 버티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오직 실패만이 두려울 뿐이었다!
실패한다면 어마마마를, 누님을, 외조부 일가를 볼 낯이 없었다. 원수들이 어떤 벌도 받지 않고 잘 산다면 어마마마와 누님은 영원히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성공했다. 그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적이, 지금처럼 이렇게 정신이 맑은 적이 없었다.
“전하.”
주운환이 일어섰다. 양왕이 황제가 되었지만 아직 ‘전하’라는 호칭이 익숙했다.
“그렇다면 양왕비는…….”
“하하, 그 여자.”
뒤돌아선 양왕의 입가에는 차가운 조소가 서려 있었다.
“우리가 황후를 들이는 일을 상의하던 날 이미 사라졌다.”
“사라지다뇨?”
주운환은 깜짝 놀라 양왕을 쳐다봤다.
양왕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벌써 문을 열고 나갔고, 곧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주운환, 내 사생활은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할 일만 하면 된다. 그건 내가 늘 하고 싶었던, 그리고 해야 할 일이다!”
주운환은 잠시 멍해졌다. 그는 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선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오직 양왕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 * *
국상과 즉위식 말고도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황후 책봉!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양왕이 상관 가문에 사람을 보내는 것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온 도성이 금방 알게 되었다.
엽연채는 이 이야기를 듣자 놀라서 얼어붙었다. 양왕의 마음에 있는 사람이 조앵기가 아닌 것은 자신도 알았고, 주운환도 황후 자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미리 말했지만… 막상 일이 진행되자 마음이 너무 쓰리고 아팠다.
조앵기를 찾아 위로하고 싶었지만 바깥세상이 너무 뒤숭숭해 나가기도 어려웠다.
“마님, 그나마 왕비 마마도… 정실부인이니 하는 것들에 크게 관심이 없으신 것 같잖아요. 아이 같은 성격이신걸요. 또 속으로 조금 억울해하실지는 몰라도 자기 처지는 잘 아시고요.”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조앵기는 늘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양왕이 본인을 싫어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양왕은 심지어 조앵기한테 다른 사람 집에 종으로 팔아 버리겠다고 으른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빴다. 조앵기는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고, 새 황후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비웃을 텐데…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새 황후가 상관운인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녀의 머릿속 상관운은 늘 거만한 귀족 소저의 모습이었다.
2년 전, 처음 주씨 가문으로 시집왔을 때 인신매매 일당에게 잡혀갔다가 상관운과 함께 도망친 일이 떠올랐다. 당시 양왕이 상관운을 구했으니 영웅이 미녀를 구한 이야기의 뒷부분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지만, 그때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그 일은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는 파리라도 삼킨 듯 속이 메스껍고 불편했다.
“다 정리되고 나면 마님이 입궁해 만나 보세요.”
“그래야겠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앵기가 이미 양왕부에서 사라진 것은 당연히 꿈에도 모르는 채였다.
* * *
이레 동안 궁에 황제의 시신을 안치하였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드디어 출상하는 날이 되어 알 만한 귀족들은 모두 황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나섰다.
그 자리엔 엽연채도 함께였다.
국상國喪, 그것도 선황제가 붕어하신 국상이다! 주운환은 앞으로 양왕의 황권을 다지기 위해 조정에서 중책을 맡을 테니, 이럴 때 아내인 자신도 남들에게 트집을 잡힐 행동은 최대한 삼가는 것이 좋았다.
궁중에서 성대한 애도가가 울려 퍼졌고 일흔두 명이 관을 들고 동화문을 나섰다.
황실 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흑백 깃발을 든 사람이 선두에 서자 순식간에 장명가는 검은 구름이 내려앉은 듯 새까매졌다.
곧 상복을 입은 수천 명의 의장 행렬이 장엄한 행진을 시작했다. 문무백관과 황실 친족, 종실 사람들의 행렬이 뒤를 이었고 흑백으로 싸인 마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법복을 입은 승려와 도사들이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법기를 들고 경전을 읊으면서 행진했다.
장례 행렬은 십 리를 훌쩍 넘었다. 선두에 선 사람들이 성문에 도착할 때까지 뒷사람은 아직 궁에서 마차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주운환은 경위영 군사를 이끌고 앞에서 길을 트고 있었고 경위영 군사들은 양쪽에서 창으로 백성들의 접근을 막았다. 길 양쪽에 백성들이 주르르 무릎을 꿇은 모습은 마치 두 마리의 검은 용 같았다.
행렬 중, 흰 능사를 덮은 마차 하나에 엽연채와 제민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