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8화
양왕부에도 흰 등불과 조기가 걸렸지만 다들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 무렵, 드디어 양왕이 돌아왔다. 육 측비는 첩들을 이끌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 양왕을 보자 무릎 꿇고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양왕이 조용히 웃었다.
“그래.”
양왕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면서 곁눈질로 그녀들을 훑어보았다. 그들 사이에서 조앵기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양왕은 곧 코웃음을 치고 주운환, 사부상서, 공부상서, 주 선생, 하배와 안으로 들어갔다. 상의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제 자신은 황제가 되었다. 그 전에 먼저 국상을 치러야 하나 조정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아서 딱 이레만 영구를 안치하기로 했다. 출상한 후에 즉위식을 거행할 것이다.
그사이에 궁에 들어가서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국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양왕은 사람들을 이끌고 화원에 딸린 서재로 갔다. 화원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 사월을 맞아 새들이 지저귀고 꽃이 만발해 보기만 해도 기분이 흐뭇해졌다.
양왕은 홀가분하게 웃으며 화원의 정자로 향했다.
“앞으로 나가서 앉지.”
다들 그 뒤를 따라 정자에 들어가 하나씩 앉았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드디어 황위에 오르셨군요.”
사부상서, 공부상서는 연신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들은 처음부터 양왕의 사람으로 거사에 공을 세웠다. 또 양왕의 상황이 몹시 열악했던 시절부터 함께했으니 크게 포상을 받고 앞으로는 탄탄대로일 것이 분명했다!
“일어나라,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다. 술을 가져오너라.”
양왕이 침착한 목소리로 분부하자 바깥의 시종들이 미리 준비한 술을 바로 탁자에 차렸다. 양왕은 먼저 술병을 들어 모든 사람에게 한 잔씩 따른 후에 조정의 여러 문제들을 그들과 상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요한 안건은 ‘남아 있는 태자의 잔당을 어떻게 처리할지’였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사부상서 자학전이 말했다.
“모정건의 잔당은 잘 처리했으나 조정에 아직 불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서후가 진압한다고 해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진서후는 곧 도성을 떠나 응성으로 돌아가야 하니 폐하께서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셔야 합니다.”
“운환, 정말 응성으로 돌아갈 건가? 본왕은 네가 도성에 남아 내 곁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
양왕이 고개를 돌려 주운환을 바라봤다.
“폐하, ‘짐’이라고 하셔야 합니다.”
두 상서가 한입으로 주의를 주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구나. 일단 그냥 하던 대로 하지.”
양왕의 말에 두 상서의 얼굴이 굳었으나 강권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폐하, 소신은 조상들처럼 변방을 지키는 것이 꿈입니다.”
주운환이 답했다.
도성에 있으면 정말 숨이 막혔으나 반면 응성에서는 자유로웠다. 또 그곳에 가면 약속한 대로 부인에게 승마와 궁술을 가르쳐 주기 좋았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도 가르쳐서 뛰어난 무인으로 기를 수 있었다. 만약 딸이 태어나더라도 역시 가르쳐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 줄 것이었다.
양왕은 아쉽고도 서운해서 주운환의 총기 넘치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외양은 누님과 닮았지만 그 기질과 성격은 어마마마와 더 닮았다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 도성에 일 년만 머무르다 내년 이맘때 떠나라. 만약 네 아이가 딸이라면 싸우고 병사를 부리는 법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어마마마처럼 끝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을 조심하는 법도 세심하게 가르쳐 줘야 할 것이야.”
주운환은 흠칫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네.”
“진서후가 일 년 동안 도성에 머무른다 하니 조정 일은 안심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불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분이 높은 황후를 새로 들이셔서 정국을 안정시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학전이 새로운 화두를 꺼내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양왕만 바라보고 있었다. 양왕에게 적비가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나 그것은 조앵기였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조앵기의 신분으로는 황후가 될 수 없었다.
“그럼 다시 들이면 되지. 적당한 사람이라도 있나?”
양왕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냉랭하게 웃었다.
“유씨 집안 삼소저가 어떻습니까? 적출이기도 하고, 유 재상의 친손녀입니다.”
공부상서 공병이 후보를 거론하자마자 주 선생이 차갑게 반대했다.
“안 됩니다. 그 노인네는 어제까지만 해도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면 주 선생은 유씨 집안보다 좋은 곳이 있다고 보십니까?”
“상관수의 딸, 상관운입니다.”
공병을 비롯한 모두가 말을 듣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운이면 적당하군요!”
상관수는 금위군 통령이라지만 금위군은 이미 세력을 잃어 도성의 경비도 경위영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더구나 상관수는 선황제의 심복이었으니 중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것은 상관수뿐이고, 상관 가문의 상황은 달랐다!
정주의 상관 가문은 개국공신으로, 수백 년 동안 여섯 명의 재상과 상서 일곱을 배출해 낸 대제 제일의 명문가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 상관 가문은 본디 문신 중의 으뜸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별종 상관수가 과거의 길을 마다하고 무관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금위군 통령에 올랐다.
상관 가문에 있어 이건 아무래도 유별난 일이었다. 하지만 금위군 통령에 오른 것 역시 특출한 능력이니 상관 가문에서도 상관수를 지지해 주었다. 또한 상관수 대代에는 아들이 많지 않아 문신을 배출하지 못하기도 했고.
아무튼지 지금 상관수의 날개가 꺾였다고 해도 상관 가문의 위신은 여전했다.
“상관 가문은 유서 깊은 학자 가문이자 명문가입니다. 상관 가문의 수장인 상관 태노야太老爺 역시 대학자로 그 제자가 널리 퍼져 있고, 유 재상 또한 그분의 제자입니다. 상관운을 황후로 맞이하면 조정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선생이 말하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양왕은 긴 손가락으로 백옥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본왕이 늘 염두에 두고 있던 것도 그 여인이다.”
“그러면 양왕비는…….”
하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꼬리를 흐리니 잔을 움직이던 양왕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백옥 잔이 탁자에 멈추면서 쨍한 소리가 났고, 양왕이 슬며시 비웃었다.
“쓸모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양왕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뜻이지? ‘버린다’? 비로 책봉된 사람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그들이 다시 묻기도 전에 양왕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나가고 있었다.
“다들 물러가라!”
“네.”
사람들은 손을 모아 대답하고 정자에서 나갔다.
화원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맑은 꽃향기가 퍼지고 저 멀리 돌다리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모든 풍경이 아름다웠다.
정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앵기는 그 옆에 앉아 거북이 껍데기를 물속에 담갔다.
봄날 날씨는 따뜻했지만 물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그 때문인지 몸이 여전히 좋지 않은 조앵기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거북 껍데기를 한참이나 물에 담가 놓았다 치맛자락에 닦아 내는 조앵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런 결말이 날 것이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일인데 왜 눈물이 날 만큼 마음이 아픈 걸까?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양왕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하고 어떤 능력도 키우지 못하게 한 이유를. 그건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선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양왕은 자신이 사라지면 찾았다. 매일 자신과 식사를 했다. 도망갈 때도 자신을 데려갔다…….
얼음 속 손톱만큼의 온기 때문에 양왕도 사실 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양왕이 정말 자신을 버릴까? 새끼 고양이처럼 곁에 남겨 둘 수는 없는 걸까?
하나 양왕은 사주에서 진작에 말했었다!
“지금 잘 대답하고 돌아서면 버릴 것이다! 이런 뻔한 놀음에 아쉬울 건 없다, 두고 봐라!”
자신은 기다렸다. 그런데 정말…….
어제 그가 떠난 후로 어떤 시녀도 마마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밥조차 가져다주지 않았다.
조앵기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일어섰다.
배는 여전히 아팠고 출혈도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유산하면 늘 하혈이 며칠 동안 지속되었고 이미 익숙해진 후였다.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인데 몸조리는 열심히 해서 뭐 해…….’
하지만 너무 아팠고 연채가 보고 싶었다.
‘양왕이 나를 버려도 연채는 안아 주지 않을까?’
* * *
양왕부를 나선 주운환은 진서후부로 돌아갔다.
수화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엽연채는 주운환을 보자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부군.”
주운환은 얼른 다가가 사랑스러운 엽연채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졌다.
“다음부터는 여기서 기다리지 말아요. 바람이 찹니다.”
“봄바람이라 따뜻하고 경치도 좋은걸요. 여기서 기다리면서 겸사겸사 바람도 쐬는 거예요.”
“우리 예쁜 부인!”
엽연채는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고 주운환은 한껏 달달해진 마음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후. 참, 부군, 즉위는 언제예요?”
“이레 후입니다. 시간도 정했어요. 각 부서가 모두 국상과 즉위식을 같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그녀의 허리를 부축하면서 수화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금 양왕부에서 오는 거예요?”
“네.”
“조앵기는 봤어요?”
“그럴 리가요. 외간 남자가 어떻게 왕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주운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가 황후가 되는 거예요?”
엽연채가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주운환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부인이 왕비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양왕 전하는 단 한 번도 왕비를 황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주운환이 멍해진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도 엽연채는 말이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역시 조앵기는 아닐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양왕은 언제나 조앵기가 성장하는 것을 막았다. 조앵기를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조앵기를 선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앵기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엽연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주운환이 조용히 답했다. 양왕비는 양왕의 여인이니 그가 놓아주지는 않겠지만 황후로도 세울 리 없었다. 일반 비빈으로 한 등급 낮추는 것이 현실적으로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엽연채는 피로에 찌든 주운환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그의 겉옷을 벗겨 주고 연청색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주운환은 엽연채가 말이 없자 식사 후에 침상에 눕혀 놓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기분을 풀어 줬다.
주운환은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엽연채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품에 안긴 채 생각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