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67화 (767/858)

제767화

양왕이 침궁 대문을 나서자 붉은 갑옷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발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주운환이었다.

“전하, 말씀은 마치셨습니까?”

“그래.”

양왕은 늠름한 주운환의 모습을 보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안았다.

“전하?”

“하하, 진짜 닮았군.”

말을 마친 양왕은 어리둥절해하는 주운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컸네, 주운환.”

주운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다니! 그리고 자애로운 부모 같은 저 표정은 뭐지?

양왕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운환을 보고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가자!”

“네!”

주운환도 살짝 웃었다.

두 사람이 정선제의 침궁을 벗어나려는데 저 멀리서 언서가 다가와 양왕을 보고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전하. 유 재상, 여 상서, 노왕, 용왕 등이 오고 있습니다.”

“마침 잘 왔군. 본왕이 찾아갈 필요가 없겠어.”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무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 재상이 선두에 서고 노왕, 용왕 그리고 대신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양왕 앞에 서자 대신들이 예를 올렸다.

“양왕 전하를 뵈옵니다.”

“너무 예를 차릴 것 없다.”

양왕이 살짝 웃었다.

“넷째 아우.”

“넷째 형님.”

노왕과 용왕의 인사에 양왕은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폐하는 좀 어떠신지요?”

유 재상이 물었다.

태자가 제압당하고 주운환이 황제를 구출한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대신들은 이른 아침 평소대로 조정에 등청했고, 대신들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조정에 들지 않았던 황실 왕족들까지 나타났다. 한참 기다리며 상의하다가 결국 다 같이 정선제를 보러 온 것이었다.

“좋지 않다. 들어가서 한번 뵙게.”

양왕의 말을 듣고 유 재상을 비롯한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선제의 침궁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마자 진한 약 냄새가 풍겨 왔다.

환관이 겹겹의 휘장을 걷어 주니 침상 위의 정선제가 보였고, 나 의정이 그 곁에 서 있었다. 정선제를 본 사람들의 낯빛이 변했다.

“아바마마가 어떻게 된 건가?”

노왕이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하자 나 의정이 울먹였다.

“소신, 소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폐하는 본디 소갈증을 앓고 계셨는데 며칠이나 약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역적이 의자에 묶어 두는 바람에 기혈이 통하지 않다가 결국 막혀 버렸으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바마마!”

노왕과 용왕이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폐하……!”

유 재상과 대신들도 모두 꿇어앉았다.

“아바마마…….”

양왕이 다가가 침상 곁에 무릎을 꿇었다.

“나 의정, 아바마마가 정말…….”

“소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폐하는 이미 기력이 쇠하셨습니다. 어쩌면…….”

나 의정의 이 말에, 일흔은 족히 넘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깜짝 놀라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다가와 정선제를 살폈다. 정선제는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숨결이 미약했고, 맥도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노인은 정선제의 황숙皇叔으로, 황실 종친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중 한 명이 무겁게 입을 뗐다.

“공주와 후궁들을 불러와라!”

유 재상을 비롯한 대신들은 정선제에게 희망이 없기에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임을 알아챘다.

뒤에 서 있던 환관이 즉시 뛰어나갔다.

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신양공주, 노왕비, 노왕세자 등 손주들과 임 귀비처럼 신분이 높은 후궁 비빈이 모두 도착해 정선제 앞에 무릎 꿇었다. 여자들이 비통하게 울자 분위기는 훨씬 처량해졌다.

양왕과 주운환도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정선제의 헐떡대는 숨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몹시 고통스러운 듯한 모습에 아래편에 있던 사람들의 울음소리도 한층 커졌다.

정선제의 머리가 순간 옆으로 꺾이더니 침상을 잡고 있던 손이 축 늘어졌다.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었다.

“폐하……!”

나 의정이 다가가 맥을 짚어 보더니 쿵,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세게 찧어 댔다.

“폐하!”

두 황숙이 다시 앞으로 나와 정선제의 맥을 세심히 살피더니 그중 한 명이 흐느끼며 외쳤다.

“폐하가 붕어하셨다!”

“아아……! 아바마마!”

“폐하! 허허윽……!”

“할바마마……!”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환관이 정선제 침상 앞에 늘어진 장막을 걷었다.

주운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 재상 등 사람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폐하께서 붕어하셨으니 한시바삐 새 황제를 옹립해서 나라의 근간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어제 폐하를 구출할 때 여러분도 들으셨다시피 폐하께서는 양왕을 태자로 삼겠다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붕어하셨으니 양왕 전하가 어서 황위에 올라 조정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아래에 모여 있던 대부분은 벌써 마음의 준비를 마쳤지만 언제나 맹목적으로 군주에게 충성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바로 여지 같은 자 말이다!

여지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나… 어제 그 말은 진서후가 폐하를 대신해 한 말이었습니다. 저희는 폐하가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주운환이 차갑게 웃었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요, 입으로만 말을 전했을 뿐 증거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일은 없는 셈 칩시다.

하나 누군가는 황위를 계승해야 하지 않습니까? 양왕 전하는 정황후의 적출이니 누구보다도 자격이 충분합니다. 저는 양왕 전하께서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놀라 서둘러 동조했다.

“진서후 말씀이 맞습니다. 당연히 적자가 황위를 계승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양왕 전하가 가장 적당합니다.”

모든 대신과 후궁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양 한입으로 동의했다.

다른 수가 있는가? 지금 도성 전체가 주운환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가 누굴 세우겠다면 그를 세워야 한다. 불복하면 단숨에 목이 잘려 나갈 것이었다.

유 재상도 진작부터 대세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유 재상은 정선제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잘 아는 충신이지만, 죽은 사람을 위해 온 식구의 생명을 내걸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지는 유 재상마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이 광경을 보자 얼굴이 굳어져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늘 흉폭하고 세상에 어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는 양왕을 싫어했다. 양왕이 좋은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태자도 망나니짓을 일삼았지만, 그나마 태자는 성군을 흉내라도 내려는 사람이었다. 태자는 제 체면 때문에라도 폭군이 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양왕은 달랐다. 양왕은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늘 제멋대로니 폭군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양왕은 적자였다. 그런 데다 ‘황제 구출’의 공도 세웠으니, 정선제의 뜻이 무엇이었든 양왕이 즉위하는 것이 상황에도 상식에도 맞는 일이었다.

주운환은 옷자락을 치켜들더니 양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유 재상과 노왕 등 모두 일어나 양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양왕의 붉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드디어 성공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새 황제의 치국평천하를 축원하는 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밖에 있던 궁녀와 환관들은 벌써부터 준비한 대로 궁 안의 모든 붉은 등불을 걷어 흰 등불로 바꾸고 흰색 조기弔旗를 걸었다.

조종弔鐘이 마흔아홉 번 울렸다.

한 무리의 군대가 궁 안에서 뛰어나와 사방에 황방을 붙였다. 국상과 새로운 황제의 즉위 소식을 알리는 방이었다. 삽시간에 도성은 곡소리와 흰 조기로 가득 찼다.

뜰에 서 있던 엽연채는 하인들이 바삐 움직이며 여기저기에 흰 등불과 조기를 거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혜연이 웃었다.

“이제 정리가 됐네요.”

“응. 한데 앵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걱정을 표했다.

“몸조리하고 계시겠지요.”

혜연이 살짝 한숨 짓는데, 소월이 들어왔다.

“마님, 제민 소저가 오셨어요.”

제민은 벌써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연채야.”

“어떻게 이렇게 연락도 없이 왔어, 민아.”

엽연채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반가이 인사를 건네자 제민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토자포가 돌아왔다며. 어떻게 지내는지 첩자를 한번 보내 볼까 하다가 시국이 시국이니 첩자를 보내도 그쪽에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연채 네가 한번 가서 살펴봐 줄 수 있는지 물어보러 왔어.”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방에 들어가 평상에 앉았다.

엽연채가 찻잔을 들며 다시 첩자 얘기를 꺼냈다.

“양왕 전하가 새 황제가 되셨으니… 관저도 삼엄하게 지키고 있을 거야. 그래도 한번 해 보지 뭐. 청유야, 첩자를 가져오너라.”

엽연채는 제민이 늘 조앵기에게 싫은 말을 하고 구박했던 게 모두 그녀를 걱정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왕비지만 왕비로서의 능력이 전혀 없는 조앵기가 걱정돼 뭔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하나 조앵기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심지어 지금 조앵기의 눈앞에 있는 것은 왕비가 아니라 황후의 자리인데도.

청유가 곧 해당화가 그려진 첩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엽연채는 방문하겠다는 글을 적어 혜연에게 들려 보냈다.

혜연은 바로 마차를 타고 양왕부로 갔다.

양왕부는 과연 경위영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혜연은 군사들을 보고 마음이 뿌듯해졌다. 저들이 모두 우리 나리의 병사들이란 말이지!

경위영 군사는 진서후부의 마차를 보자 바로 들여보내 줬다.

혜연이 수화문에 들어서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육 측비였다. 그녀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양왕이 황제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의 여자 중에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너는 진서후 부인의 여종 아니냐, 무슨 일이지?”

“왕비 마마의 병환이 심해서 저희 마님께서 걱정이 크십니다. 한번 뵈러 오고 싶어 하시는데 괜찮을지요?”

육 측비는 엽연채가 조앵기 문병을 오겠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도 참 다정하시지. 그런데… 소식을 들었겠지만 전하가… 아니, 폐하께서 즉위하셨다. 그리고 모정건 그 역적 놈이 아직 도주 중이니 여러 가지 일이 많지. 부인께서도 임신 중이시니 우선은 오시지 않는 게 좋겠구나!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난 후에 오셔도 늦지 않을 게다. 돌아가서 부인께 대신 양해를 부탁드려라. 왕비는 벌써 회복하셔서 편안히 잘 계시니 안심하셔도 된다고 전하렴.”

“알겠습니다.”

혜연은 대답을 마치고 돌아서 나갔고 육 측비는 그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전하가 새 황제가 되었으니 난… 아무리 못해도 귀비가 될 것이다!’

만약 조금 더 노력한다면 황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육 측비는 점점 가슴이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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