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6화
정선제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쿨럭, 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
“방금 언제나 마음속에는 어마마마뿐이었고, 어마마마만을 사랑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어마마마에 대한 것들을 잘 알고 싶을 테니 제가 설명해 드려야지요.
돌아가시기 전, 어마마마는 정신병에 걸려 몇 번이나 나를 죽일 뻔했습니다! 매일 보내오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거든요. 어마마마는 약이 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드셔야 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살아 있으면 셋 다 죽을 테니까요.
어마마마는 미쳐 버리셨고,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나와 누님은 그제야 제대로 밥을 먹고 제대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어마마마께 매일매일 음식을 보내온 자가 바로 정씨입니다!”
정선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네가 말을 지어내는 것뿐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고 마마를 불러 보십시오. 그때 그 사람이 누님에게 나를 죽여 환궁할 기회를 잡으라 꼬드겼으니까요. 하지만 누님이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아 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환궁 2년 후, 계략을 써서 고 마마를 쫓아내고 사지를 끊어 어느 장원에 데려다 놨습니다. 하지만 말은 할 수 있으니 믿지 못하겠다면 고 마마에게 물어보십시오!”
정선제는 놀라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그럴 리가. 나는 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몰랐다고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겠죠! 정씨가 어마마마를 어떻게 해쳤는지는 몰라도 도성 밖으로 사람을 보내는 것은 묵인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했겠죠. 정씨가 사람을 보낸 것은 어마마마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요.
나중에 어마마마가 미쳤다는 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분명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는 어마마마가 죄책감 때문에 미쳐 버렸다고 말했을 겁니다! 스스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죽은 거라고요! 아닙니까?”
정선제의 몸이 뻣뻣해지고 입술이 쩍쩍 갈라졌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런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칼날처럼 그의 아픈 곳을 찔렀다…….
“나와 누님이 환궁할 때 나타난 비적이니 산적이니, 그들도 모두 정씨가 보낸 사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궁에 돌아오니 비천한 양민 여자를 붙였죠! 그것이 멍청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찌를 무기가 됐을 겁니다. 멍청해 이용할 수 없다 해도 왕비 자리는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니 20년 동안 내 체면을 깎아 먹는 건 성공했고요!”
정선제는 안색이 변해 황급히 외쳤다.
“그건 네 액막이용이었다! 적당한 것이 그 아이뿐이라……. 그러잖고서야… 짐인들 네 배필로 그런 며느리를 원했을 것 같으냐……! 쿨럭쿨럭……. 모두 너를 위해서… 나중에 고귀한 집안의 측비 둘을 얻어주지 않았더냐?”
양왕이 다가가 정선제의 멱살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액막이? 나를 위해서? 출신이 귀한 측비? 하하하, 그렇죠! 얻을 때는 상서의 적손녀였지만 얼마 안 되어 고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상서의 여식 말입니까! 정말 나를 아낀다면 이리될 것을 알면서 왜 그런 측비를 얻게 내버려 두었습니까?
고귀한 집안의 측비로 보상해 줬고 태자를 편애하지 않았다니, 누굴 속이려는 겁니까! 당신만 그렇게 믿겠지요!”
정선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건… 어쨌든 태자다! 저군이야! 너보다 한 등급 높은 것도 당연하다. 감히 태자와 비교를 하다니……! 그야말로 대역무도한 짓이다! 짐이, 짐이 과연… 너를 제대로 봤어! 이 대역무도한 놈! 아껴줘 봐야 소용없구나……!”
“하하. 대역무도하다? 물어나 봅시다. 그렇게 어마마마를 사랑하고 나를 아꼈다면서 왜 나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양왕이 냉소하자 정선제의 표정이 변했다.
“태자… 태자는 진작 정해졌다……! 네가 돌아왔다고 태자를 폐위하라는 말이냐? 어찌 그럴 수 있겠더냐! 그저 순서대로인 것이다…….”
“이 노인네가!”
양왕이 고함치며 정선제의 멱살을 잡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진작 정했지! 소씨 가문과 어마마마가 복권되고 죄기소를 발표하기 전, 나를 데려오려던 그때, 순식간에 모정건을 태자로 정했습니다! 뭘 대비한 겁니까?”
정선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양왕이 자신의 얼굴 가죽을 쥐어뜯는 것만 같아 죽어라 몸부림쳤다.
“그 아이는 적자다……! 네 형이야! 적자가 둘인데 그 아이가 나이가 많으니, 그 아이가 장자이니 태자로서 정통성이 있지 않더냐.”
“내가 정正황후의 아들이오! 한데 지금 누구더러 정통이라는 겁니까?”
양왕의 목소리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온몸이 뻣뻣해진 정선제는 두 눈만 부릅떴다. 어떻게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고, 필사적으로 버텼건만 양왕은 하나도 남김없이 자신의 가죽을 벗겨 냈다.
“그래, 당신 마음속의 정통 후계자는 태자이겠지. 언제나 속으로 어마마마와 소씨 일가를 배척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녀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두고 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또 어마마마보다 작아질 텐데요.
하여 계繼황후의 아들 모정건을 태자로 정했습니다. 어마마마 아들의 자리를 그녀가 가장 증오한 사람의 아들로 채웠으니 속이 시원했겠지요. 아닙니까?”
“아아악! 그, 그 입을 다물어라!”
정선제는 몰려오는 노여움과 수치를 도무지 감출 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위로 잡아 빼느라 푸른 핏줄이 튀어나왔다.
양왕이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있는 걸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늘 마음 깊이 감춰 둔 추악한 생각들. 아무리 모두를 속인다고 해도 스스로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하하하!”
정선제가 자신의 추악함을 직면하고 몸부림을 쳐 대자 양왕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넌 역적이다! 역적!”
정선제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주운환을 끌어들인 건지……!”
“끌어들였다?”
양왕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주운환은 처음부터 내가 키웠습니다! 내가 한 자 한 자 글을 가르쳤고, 말을 부리는 법과 활 쏘는 것도 내가 하나하나 가르쳤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무 모두 능통한 장원이, 대제의 전신이 될 만한 인재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정선제는 너무나 화가 나서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주운환이 처음부터 양왕의 사람이었다니! 처음부터!
아니다, 그토록 운하와 닮았던 덕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선제는 눈을 홉떴다.
“너는 그 애가 운하와 닮은 아이라서 키운 것이야……! 그래서 짐에게 보내… 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게야.”
양왕의 눈에 비통과 조소가 동시에 스쳤다.
“주운환이 누군지 아십니까?”
양왕의 그린 듯한 얼굴에 한기가 가득 서렸다.
“주운환은 누님의 친아들입니다! 당신이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잊지 못하던 운하공주의 친아들!”
정선제는 순간 어리둥절해하다가 감정이 격해졌다.
“그럴, 그럴 리가 없다! 아니다, 아니야……! 그 아이는 운하의…….”
환생이었다! 자신을 용서하고, 효를 다하기 위해 돌아온.
“틀림없습니다.”
양왕이 조롱하듯 웃었다.
“그럴 리 없다. 짐이 벌써 조사를 했어. 그 아이는 사주의……!”
“뇌씨 가문 딸이 낳았다고요?”
“네가 그걸 어떻게……!”
“그 뇌 지주가 그렇게 말하도록 유도한 것이 바로 나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을 어떻게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벌써 당신 손에 죽었겠지요!”
정선제는 어질어질했다. 평왕비와 갈란군주가 주운환더러 운하의 아들이라고, 자신의 외손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어 머릿속에 예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주운환이 자신의 앞에서 『효경』을 읽던 일, 자신의 근심을 덜어 주고 험난한 역경에서 이 나라를 구해 준 일……. 그는 대제의 영웅이었다! 타고난 영웅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정말 자신의 외손자라니!
정선제는 고통스럽기도,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나 그 모든 감정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분노였다. 주운환이 어떻게 운하의 아들이라는 말인가, 그럼 주운환의 생모가 누구란 말인가!
설마, 운하가 바로 운 이낭이란 말인가? 그러나 운 이낭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기루에 팔려간 여자 아닌가……!
가장 높은 신분인 적공주가 그토록 비천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다니. 이 모든 것이…….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양왕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기가 쏘아졌다.
쿨럭! 정선제는 왈칵 피를 토했다. 그러니까 주운환은 빚을 받으러 왔다는 건가?
‘복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텅 빈 머릿속에 이 말만 떠올랐다.
소씨는 잠시도 자신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증오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언제나 아끼고 이끌어 주던 계황후와 태자는 자신을 배신했다…….
정선제는 죄책감과 당혹감에 휩쓸려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온 세상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한평생 제일 감추고 싶었던 추악한 일이 대낮에 훤히 드러나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듯했다…….
양왕이 조용히 웃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의정!”
곧바로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나 의정이 무거운 휘장을 걷고 들어와 양왕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시작하지.”
양왕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네.”
나 의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선제의 침상으로 다가와 은침 한 무더기를 꺼냈다.
정선제는 눈가에 눈물이 멎지 않아 그것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는 곁눈질로 가까운 곳에 선 양왕을 훔쳐보고 있었다. 양왕은 검붉은 깃을 덧댄 검은 망포를 입고 금관을 쓰고 있었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 소 황후와 많이 닮았지만 얼음처럼 차가워서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이었다.
불현듯 양왕이 처음 도성에 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작고 마른 몸에 상처가 가득해 너무나 가련한 모습이었다. 그 불쌍한 아이가 처음 자신을 봤을 때, 드디어 의지할 곳을 찾았다는 듯 울며 폭 안겼었다!
그때 자신은 정말 양왕을 아꼈다! 평생 이 아들을 잘 키우리라, 모든 사랑을 다 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의 추한 마음 때문인지 끝내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 줄 수 없었다.
늙은 정선제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쟁아……! 짐, 짐이… 이리 와라, 한번 안아 보자…….”
그러나 여전히 미목수려한 얼굴의 양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단 듯, 말없이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정선제의 눈물은 더 굵어졌고 목소리도 갈라졌다.
“아… 흑……. 그래, 너도 다 컸으니 안아 줄 필요가 없구나…….”
나 의정은 벌써 침을 정선제의 혈 자리에 하나씩 꽂고 있었다.
정선제는 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 너보다… 운환이 훨씬 운하와 닮았… 으…….”
곧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선제는 한번 움찔하더니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양왕은 차가운 얼굴로 소매를 휘날리며 나가 문가에서 담담하게, 더는 들을 수 없는 자에게 대답해 줬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