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5화
식사 후, 주운환이 출궁하여 양왕부에 들렀다 다시 진서후부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나절이었다.
그래도 날은 벌써 어두워진 후였다.
경위영이 황궁과 도성을 겹겹이 포위한 후로 도성의 분위기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먹구름이 하늘마저 잔뜩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성들도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일반 백성들조차 그러하니 조정 대신들과 황실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황궁에도 내려앉았다. 화려한 등불을 곳곳에 밝혀도 그 어둠과 갑갑한 기운을 걷어 내지 못했다.
정선제의 침궁에서는 짙은 약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약을 달이는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숨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정선제는 정신을 잃은 채로 용상에 누워 있었다.
뻣뻣하게 마비된 몸은 말할 수 없이 아팠고, 육신의 고통 때문에 꿈속에서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궁에서 보낸 비참한 유년 시절의 꿈을 꾸었다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아름다운 소녀의 꿈도 꾸었다. 작열하는 태양처럼 찬란한 그녀의 웃음은 고통스럽고 차갑게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을 녹여 주었다.
그녀를 만나던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말 타는 법과 검술을 가르쳐 줬고 자신은 그녀에게 시와 그림을 가르쳐 줬다. 설레고 달콤했던 시절이었다.
정씨 집안 이소저가 자신을 연모해서 놀라고 자랑스러웠던 날의 꿈도 꿨다. 처음으로 자신의 남성적 매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혼인하고 나서 자신은 흔들림 없이 전진해 황좌에 올랐고,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이어서 소 황후 때문에 느낀 압박과 위축감, 소 황후를 폐위한 후의 후련함이 떠올랐다. 소 황후가 도성을 떠날 때, 자신의 영혼은 해방된 듯 자유롭게 날아올랐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누려 마땅한 황제의 인생이었다.
이윽고 소씨 집안이 복권되던 때, 그의 마음속에는 가책과 분노,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양왕이 도성으로 돌아오던 날, 처음 본 여섯 살짜리 아들의 모습과 생김새는 소 황후와 많이 닮아 있었다. 순간 그는 너무 가슴 아파 목 놓아 울면서 이 아들을 아낌없이 사랑해 주리라 맹세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중상을 입어 백약도 소용없어 보였다. 정 황후는 액막이를 해야 한다면서 민가의 어린아이를 데려다 민며느리로 삼았다.
양왕은 성격이 비뚤어진 데가 있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양왕을 사랑했고, 좋다는 것은 모두 주었다. 하지만 이 나라만은… 줄 수 없었다.
자신은 태자도 사랑했다. 태자도 자신이 아끼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결국… 태자는 자신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으려 했다.
그리고 양왕이 돌아왔다! 소씨의 아들이… 어떻게……!
이어진 꿈속에서는 주운환이 도성으로 돌아와 자신을 구했으나 나 의정이 침으로 자신을 마비시켰다. 그 직후에 주운환이 양왕을 태자로 세우겠다 말했다.
가장 신임하는 장수와 목숨까지 맡길 수 있는 의정이 홀연히 자신을 배신했다……. 양왕이 황위를 빼앗은 것이다. 소 황후의 아들이… 어떻게……!
정선제는 악몽이 끝나질 않아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모두 거짓이다!”
정선제의 몸이 갑자기 오그라들었다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혼탁하고 축 늘어진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눈을 뜨자 너무나 익숙한 황금색 용 무늬가 새겨진 천운금天雲錦 천장이 보였다.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고귀하고 따뜻한 색깔이었다.
“후후……. 꿈이었구나… 꿈이야…….”
정선제는 숨을 몰아쉬며 안도했다. 너무 실감나는 꿈이어서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
“물… 채결… 물을…….”
정선제는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손과 발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아아아……!”
정선제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데다 혀도 굳어 버려 목에서는 쉰 소리만,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는 사방을 곁눈질했다.
“뭘 찾으십니까, 아바마마?”
조롱이 섞인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지만 어두운 목소리, 또한 익숙해서 오히려 가슴이 철렁하는 목소리였다.
정선제는 흐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돌아왔느냐? 아니, 그럴 리 없다. 모두 꿈이야……!”
모두 꿈이어야 한다! 태자와 황후는 저를 배반한 적도, 퇴위를 강요한 적도 없다. 주운환과 나 의정도 저를 배신하지 않았고 양왕도 도성에 돌아오지 않았다!
“후후.”
양왕은 다만 조용히 웃었다.
정선제는 믿고 싶지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탁자 옆에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스물대여섯 정도 된 미남자가 늠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깍지를 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살짝 올라간 두 눈을 반짝이며 정선제를 보고 있었다. 매섭고 차갑고, 조롱이 섞인 눈빛이었다.
양왕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은 제일 두려워하는 아들! 정말 돌아온 것이다!
“아니, 네가 어떻게……!”
정선제는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았다. 하지만 몸은 마비되어 손톱만큼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선제는 갈라진 목소리로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채결, 상관수! 이 역적을 잡아라……!”
양왕은 느긋하게 뒤로 기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선제가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자니, 너무나 우습고 재미있었다.
정선제가 한참을 고함을 쳤지만 양왕은 비웃듯 자신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순간 정선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창백해졌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
“너, 너 이 역적……!”
욕을 토해 냈지만, 정선제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내가 왜 역적입니까?”
양왕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역적은 모정건입니다! 가장 아끼던 아들이 아바마마를 없애고 이 나라와 황위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아바마마가 그에게 이 나라를 주려고 준비했었는데 모정건은 기다릴 수 없었지요.
아바마마가 그렇게 중하게 여기던 자애롭고 효성스러운 부자 관계가 모정건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했군요! 정말이지 아바마마가 애지중지 키운 아들답습니다!”
정선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가장 신임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정선제는 몸부림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너……! 태자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그래, 짐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치자. 하지만 짐은 너를 제일 아끼고 언제나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진서후, 나 의정과 공모해서 짐을 함정에 빠뜨리다니! 너의 죄는 태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양왕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나를 제일 아꼈다고요?”
“당연하지! 너는… 짐과 소 황후의 아들이다. 짐은 너를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키웠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주었다. 네가 대가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면 짐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에게 주었다. 네가 장원을 가지고 싶다면 그 또한 네게 줬다……!”
정선제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소리쳤다.
“무엇이든 내게 줬다?”
양왕이 픽 냉소했다.
“정말 나에게 뭐든 주긴 줬지! 하나, 나에게 그림 한 폭을 줄 때 모정건에게는 오성병마사를 주고, 나에게 장원을 하나 줄 때 모정건에게는 변방의 장교를 줬습니다.”
양왕은 정선제의 멱살을 세게 거머쥐었다.
“이 역적! 놔라!”
양왕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기가 흐르나 싶더니 그가 손을 놓으면서 정선제가 침상에 떨어졌다.
“어마마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압니까?”
정선제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때 소씨 가문이 모함을 받아, 소씨는 동주에서 병사했다……. 짐이 소씨 가문을, 그네를 오해했다. 하지만 그건 다 대인현 그 간신 놈이 벌인 일이야. 짐이 잠시 정신이 흐려져 그놈을 믿었다.
하지만 그때는 조정 대부분이 그놈을 믿고 따랐다. 천하의 백성들도 그놈을 믿었으니… 아무리 짐이 천자라고 해도 신선이 아닌 육욕칠정이 있는 사람인 이상, 어찌 한눈에 사람 속을 다 꿰뚫어 볼 수 있겠더냐! 잠시 정신이 흐려진 것이다.
나중에 대인현 그 간신 일가를 참수하고 구족을 멸하지 않았더냐! 그 잔당도 남김없이 없앴다! 그리고 죄기소罪己詔까지 내렸…….”
정선제는 말을 할수록 점점 치욕스러웠다.
“당신은 어마마마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말입니까?”
양왕이 매섭게 눈을 번뜩이더니 비웃듯 말했다.
“사실은 당신이야말로 어마마마가 죽기만 바라고 있었겠죠! 아니면 소씨 가문에 문제가 생기길 바랐을 겁니다!
황좌는 소씨 가문의 세력을 이용해서, 어마마마 덕분에 차지한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고 나니 어마마마와 소씨 집안이 이끌어 줬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스스로 천하를 손에 넣었다고 우습지도 않은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당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후안무치한 짓을 한 겁니다!”
정곡을 찔린 탓에 정선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 헛소리……!”
“그럼 지금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이 나라를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양왕의 냉소에 정선제의 얼굴이 더더욱 이지러졌다. 정선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쟁취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양왕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소씨 가문이 자신을 이 자리에 올려 준 것이다.
“소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그저 찾는 이 없이 버려진 궁의 몰락한 황자로 남았을 겁니다! 어마마마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바쳐 당신을 뒷바라지하고,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가 당신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는데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마마마와 외가에서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았죠! 어마마마가 정씨와 사이가 나쁜 것을 잘 알면서, 도성 사람들이 늘 그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구태여 정씨를 궁으로 들였습니다.
심지어 어마마마를 폐위한 후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정씨를 황후로 삼았죠. 어마마마를 발밑에 짓깔아뭉개려던 겁니다! 정씨의 승리를 당신의 승리라고 동일시한 것 아닙니까?”
정선제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흉악해졌다. 양왕이 자신의 몸을 꼭꼭 싸매고 있던 가죽을 한 겹, 한 겹 낱낱이 벗겨 내 그 아래 추악한 본모습을 온 세상에 드러낸 것처럼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정선제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한 겹을 붙들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짐, 짐은… 정씨가… 현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황후로 맞이한 것이다……. 정말이다……! 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소씨가 있었다, 오직 그네뿐이다!”
“하하하! 정말 어마마마를 아끼셨군요. 그렇다면 어마마마가 돌아가시기 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