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4화
“그 아이는 네 친여동……!”
주운환이 고개를 홱 돌려 어두운 눈으로 진씨를 바라보았다. 진씨는 마지막 ‘여동생’이라는 말은 목에 걸려 내뱉지도 삼키지도 못했고, 그저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했다.
“일이 생기면 친동생이고, 평소에는 ‘천한 것’이라 하는 것이 저에 대한 어머니의 모정입니까? 죄송합니다만 저는 받지 못하겠습니다! 당장 나가세요!”
진씨는 축객령을 내리는 주운환의 목소리에 놀라 간이 떨어질 뻔했다.
“셋째야……!”
주 백야는 애원하듯 주운환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이고, 우리 모두 가족 아니냐? 뼈가 부러져도 뿌리는 이어져 있는 게다. 네 어머니도 어쨌거나 네 어머니이고, 묘서도 네 친여동생이다. 네 세력이 크고 황제를 구출한 공도 있으니 네가 폐하께 사정하면 묘서의 목숨은 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진씨는 이를 악물었다. 죽어도 주운환에게 사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저를 대신해 저자세로 사정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셋째야.”
주비양도 눈썹을 찌푸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네가 몹시 곤란한 건 안다. 그동안 묘서가 너에게 많이 잘못했고 너와 제수씨를 얼마나 무시했는지도……. 하지만 이 형을 봐서 한 번만 묘서를 살려 다오.”
그도 여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 배에서 난 동생 아닌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진씨는 주비양이 주운환 앞에서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우리가 적통이다! 적장자인 비양이 비천한 서자에게 사정을 하다니! 이 세상에는 법도도 없단 말이냐?
주운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비양은 주운환이 말이 없자 조급한 마음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셋째야, 이번 딱 한 번이다.”
“비양, 무슨 짓이냐!”
진씨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서 넘어갈 것만 같았지만 그 대신 달려들어 주비양을 잡아끌었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
주비양은 고개를 돌려 차갑게 진씨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이 일은 셋째가 아니라 모두 어머니와 묘서가 벌인 일입니다!
태자의 저열한 행실은 예전부터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묘서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눈앞의 부귀영화만 보았지요! 어머니와 묘서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반성을 하셔야지요.”
진씨는 뺨을 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팔이 밖으로 굽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친아들이라니!
“이, 이 팔이 밖으로 굽는 놈, 태자의 일은… 폐하의 명이었다……!”
진씨는 몸을 주체 못 하고 떨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주비양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갈란의 일 또한 폐하의 명이었지요!”
진씨는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그때 어머니에게 망령이 붙었다는 연극만 하지 않았어도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허락하셨겠습니까? 갈란이 이 집에 들어왔겠어요?”
진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갈란군주의 일은 아무리 잡아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먼저 오씨 집안을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자신이 먼저 갈란의 혼사를 제안했으니 말이다.
이후에 황제가 혼인을 허락했지만 결국… 갈란이 부군을 죽인 죄가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이제 그녀의 이름은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져 오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지저분한 이름이 또다시 언급되니 진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불효막심한 놈, 지금 나를 탓하는 거냐?”
강심설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주비양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럼 어머니 탓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주비양의 이 한마디에 진씨는 굳어 버린 채, 떠듬떠듬 변명했다.
“너, 너……! 나도… 한순간 눈이 먼 것이다……!”
“맞습니다. 어머니께서 순간 눈이 멀었기 때문에 갈란군주의 일로 셋째 부부는 엄청난 곤경에 처할 뻔했습니다. 묘서가 태자에게 시집간 것도 어머니와 묘서가 한순간 눈이 멀어서 그랬을 뿐인데, 왜 또 셋째 부부에게 쫓아와서 곤란하게 하려 하십니까!
어머니, 왜 눈이 멀 때마다 다른 사람을 탓하십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러실 겁니까? 어머니가 벌인 악행은 어머니가 책임지세요! 흉계는 어머니가 꾸미고 사달은 다른 사람이 수습해 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수습하고 나면 또 짓밟아 버리고요!”
주비양은 냉랭한 목소리로 진씨를 훈계했고, 듣고 있던 강심설과 주운환, 엽연채는 말로 다 못할 만큼 기분이 통쾌했다. 진씨의 친아들이 그녀를 책망하니 훨씬 속이 시원했다.
“비양이 말대로요. 아직까지 무슨 변명을 하는 거요?”
주 백야가 들어도 주비양 말이 사리에 맞았다. 그는 진씨에게 호통을 쳤다.
“지난번 갈란군주의 일도 그래, 남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까지 해를 끼쳤잖소. 지금 묘서의 일……! 이것도 당신이 어리석어서 일어난 일이오. 더 이상 셋째를 탓하지 마시오! 사정을 하려면 사정하는 사람다워야지!”
“내가… 나더러 저 아이에게 사정을 하라고요?”
진씨가 느낀 치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부탁이 아쉽지 않으니.”
주운환은 진씨를 차갑게 바라보고 돌아서서 엽연채를 부축했다.
“갑시다, 피곤하겠어요.”
“그래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가려 했다.
진씨는 눈앞이 캄캄해져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고, 주 백야는 급한 마음에 주운환을 붙잡고 진씨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셋째, 셋째야……! 자네는 묘서를 살리지 않을 생각이오?”
진씨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묘서가 죽으면……! 그건 안 된다! 비양에게는 이미 희망이 없었고, 이제 묘서뿐인데. 더구나 묘서는 그녀의 친딸인데 어떻게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주운환 저 천한 것은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 놈이다. 그리고 우리 묘서는 저놈의 꾀에 넘어가 죽게 생긴 것이다……!’
진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욕스럽고 노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주운환의 뒷모습을 보다 결국 이를 악물고 무릎을 꿇었다.
“셋째야……! 한 번만 묘서를 살려다오……. 앞으로… 묘서도 앞으로 멋대로 굴지 않을 것이다.”
주 백야도 진씨를 질책하긴 했지만 그녀가 무릎을 꿇자 많이 놀랐다.
“셋째야, 네 어머니도 네게 무릎을 꿇었다. 한 식구, 한 가족의 연을 어찌 끊겠니. 제발 묘서를 살려 주거라!”
주 백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딸의 목숨이 달린 일 아닌가!
“셋째야, 이번 한 번만 부탁하마. 앞으로 더 이상 너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주비양도 함께 부탁해 오니, 주운환은 담담하게 진씨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살려 주지요! 하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살려 준다는 것이 계속해서 수작을 부릴 수 있게 해 준다는 얘기가 아니란 것을요. 만약 또다시 화를 자초한다면 그땐 아무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진씨의 눈에 일순 증오가 스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약조했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없다……!”
“그럼 돌아가서 기다리십시오.”
너무나 치욕스러웠던 진씨는 더 이상 앉아 있을 면목이 없어 바로 정 마마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
“그럼… 부탁한다. 앞으로…….”
주 백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저도 더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경고하는 주운환의 눈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연하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면 네가 아니더라도 내가 다스릴 것이다.”
“셋째야, 고맙다.”
주 백야는 장담하고 주비양은 인사를 건넸다. 주운환은 그들을 보며 더는 긴말하지 않고 돌아가라고 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아버지와 형님은 그만 돌아가시지요.”
“그래. 앞으로 할 일이 많을 테니 방해하지 않으마.”
주비양은 말을 마치고 강심설, 주 백야와 함께 나갔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소월은 문 쪽을 향해 픽 비웃었다.
“정말 너무 쉽게 넘어갔네요.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라가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라간다고 했으니 태자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시켜야 하는데 말이에요. 화근을 남겨 두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어쨌든 한 식구잖아. 셋째 나리께 그럴 만한 능력도 있는데 구해 주지 않았다가는 주인마님이 다른 수작을 부릴까 걱정하신 거지. 방금 하던 얘기 들었잖아, 셋째 나리가 주묘서를 이용했다느니 어쩌니… 구해 주지 않았다간 그날로 소문을 퍼뜨릴걸! 주묘서가 셋째 나리를 위해 태자에게 시집간 거라고 말이야.”
혜연의 말에 소월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 언니 말씀이 맞아요.”
방에 먼저 들어선 엽연채와 주운환도 혜연의 얘기를 들었다. 혜연이 한 말이 바로 자신들이 걱정하던 바였다. 진씨가 정신줄을 놓으면 정말 그런 일을 벌일 수도 있었다.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야. 괜한 문제는 막을 수 있으면 당연히 막아야지. 그리고…….’
생각에 잠긴 엽연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주묘서는 늘 이쪽을 이용해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더 나중에는 이쪽을 밟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나 이제 주묘서의 그 꿈은 산산이 깨졌다.
‘그 비참한 모습이 어떨지.’
엽연채는 주묘서가 수렁에 빠진 꼴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과연 그녀는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묘서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고 싶어 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악질이었다.
서차간으로 가니 혜연이 벌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여양이 뛰어왔다.
“나리, 태자의 잔당이 태자를 구출했습니다.”
주운환은 잠시 멈칫했으나 담담히 명을 내렸다.
“어서 쫓아라.”
“네.”
여양이 나가고, 주운환은 걱정하는 엽연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태자는 몇 년이나 도성을 다스렸어요. 이 정도 세력도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죠. 걱정 말아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양왕이 빨리 즉위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즉위하면 모두 안정될 거예요.”
어떠한 정변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즉위 후에야 깨끗하게 정리되는 일들이 많다. 정선제도 즉위 후 십 년이 지나서야 예전의 경쟁 상대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참…….”
엽연채가 잠시 머뭇거렸다.
“양왕이 즉위하면 앵기는요?”
본래는 적비嫡妃를 황후로 봉하는 게 맞다. 하지만 조앵기처럼 적비로서 신분이 받쳐 주지 않는 경우에는 대신들이 반대해서 황비에 머무르는 일도 있었다.
“부부 사이의 일이니 우리가 어쩌겠어요.”
엽연채는 조앵기의 앞날이 걱정되어 침울해졌다. 주운환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가요, 우선 밥부터 먹어요. 앞으로 할 일이 많잖아요. 그것도 전부 힘든 일들만! 잘 먹고 힘을 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