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63화 (763/858)

제763화

엽연채와 주운환이 막 뜰에 들어서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진씨가 잔뜩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끌고 미친 사람처럼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주운환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엽연채를 막아섰다.

진씨는 위엄 있고 위풍당당한 주운환의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무능력하고 보잘것없는 주비양이 떠올랐다.

진씨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찼다. 천한 서자 주제에! 감히 작위를 받고 관저를 차지하고 앉아 주인이 되다니…….

이 모든 것이 우리 적통들의 피를 밟고 올라가 이룬 것 아닌가! 그리고… 저것 때문에 묘서가 죽게 생겼다!

“이 천한 것!”

진씨가 소리치며 주운환의 뺨을 때리려 손을 높이 치켜 올렸다.

주운환은 ‘천한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빛이 가라앉았고 허공을 가르는 진씨의 손을 탁 잡아채어 밀쳤다.

진씨는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쫓아온 주 백야와 백 이낭 모두 숨을 멈추었다. 진씨는 언제나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누구를 때린다 해도 감히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바라보았다. 정교한 갑옷을 입고 긴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주운환의 칼날 같은 눈썹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스치자 간담이 서늘해져 저도 모르게 그 앞에 바로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은… 2년 전까지만 해도 보잘것없던 서자였다. 진씨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괴롭히고, 몸이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로 사당에 꿇어앉혀 경전을 베껴 쓰는 벌을 줬던 사람이었다.

세 아들 중 가장 말을 잘 듣고 제일 비천한 아들이었다.

한데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이젠 진씨의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리는 그녀를 막고 밀쳐 내기까지 했다.

“악!”

넘어진 진씨는 놀라 고함을 질렀다.

“네가 감히 나를 밀어? 세상에……! 서자가 감히 적모를 밀다니, 불효막심한 놈!”

주운환의 눈에 한기가 스치고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경받고 싶다면 먼저 그에 걸맞는 태도부터 취해 보십시오!”

“너……!”

진씨의 얼굴색이 변했다.

“아이고, 셋째야, 무슨 짓이냐?”

주 백야가 황급히 앞으로 나서 진씨를 부축했다.

“어찌 됐든 네 어머니다.”

주운환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냐니?”

진씨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네가 묘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묻는단 말이냐! 네가 이 집안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란 말이야.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운환의 목소리는 더없이 냉랭하기만 했다.

“아직도 모르는 척이냐!”

주운환을 손가락질하는 진씨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오늘 무슨 짓을 한 거냐? 네 손에 경위영 십만 대군을 쥐고 있지 않느냐! 금위군은 고작 삼만인데… 게다가 묘서는 네 여동생이고 태자는 네 매부다. 그 많은 사람을 이끌고 도성에 왔으면 태자를 구해야지, 어떻게 그 늙은이를 구할 수가 있어! 태자를 감옥에 가두고 경위영을 시켜 태자부를 포위해 네 여동생까지 죽이려 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단 말이냐! 어떻게 가족의 정도 모른 척하고 길러 준 정도 몰라보고, 다른 사람과 내통할 수 있냐, 이 말이다……!”

진씨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철철 쏟았다.

“그러니까요, 팔이 밖으로 굽는 건 본 적이 없어요.”

비 이낭도 끼어들었다.

“동생도 참… 쯧쯧.”

주종과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단 듯 고개를 흔들며 한마디 보탰다.

다들 저마다 주절주절 떠들었다. 특히 진씨는 어마어마한 누명이라도 쓴 양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대성통곡했다. 기세만 보면 그녀 때문에 오뉴월에 서리라도 내릴 것 같았다.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치켜세웠고 주운환의 잘생긴 얼굴에는 그림자가 졌다.

“무엄하다! 여봐라, 이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형부 감옥에 가둬라!”

주운환이 소리치자 바로 20여 명의 경위영 군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진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슨 짓이냐?”

“무슨 짓? 참 재미있는 말씀이군요. 어머니는 제가 태자를 구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진씨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면 제가 대의멸친하여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요! 어머니도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 저는 황제 폐하의 신하입니다! 태자는 주군을 살해하고 황위 찬탈을 시도한 역적입니다. 하늘과 땅, 임금과 부모가 가장 중하다고 했습니다. 태자가 내 매부가 아니라 친아버지라도 형부 감옥에 가두었을 겁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아버지?”

주운환이 주 백야를 바라보았다.

주 백야는 큰일 났다 싶어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랫동안 관직을 떠나 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랬다, 황제야말로 대제의 군주이다! 삼강오륜에 따라 군주는 천하의 으뜸이었다!

주운환도 신하이니 당연히 군주에게 충성해야 한다! 매부가 아니라 친부모라도 군주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진씨의 얼굴은 파래졌다 하얘졌다 하더니 이를 악물었다.

“네 여동생의 일이다! 그 애가 태자에게 시집을 갔……!”

“그러니 태자와 작당해서 같이 반역을 하라는 말입니까?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주운환이 차갑게 웃었다.

진씨는 주운환의 말을 듣자 화가 나서인지 겁이 나서인지는 몰라도 몸이 계속 떨렸다.

“너, 너… 너!”

“됐소, 그만하시오!”

파랗게 질린 주 백야가 앞으로 나와 진씨와 주운환 사이를 막아서고는 주운환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집에만 있는 아녀자가 뭘 알겠니. 당신도 너무 따지지 말고.”

주 백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씨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소리쳤다.

“따지지 말라니요? 내 딸의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그리고 우리 묘서가 아니었다면 태자가 그토록 저 아이를 믿었겠어요?”

진씨는 눈을 부릅뜨고 죽어라 주운환을 노려보았다.

“오, 그래……! 우리 묘서를 이용한 거지? 묘서를 이용해서 태자의 믿음을 얻어 내고는… 결국 묘서에게 등을 돌린 거야. 네가 묘서 등을 떠밀어 태자에게 시집을 보내서 장기짝으로 삼은 게야……! 악랄한 것!”

주운환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 도리어 웃음이 나오려던 찰나. 엽연채가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님? 누가 등을 떠밀어 태자부로 시집을 보냈다는 거예요? 본인이 원해서 태자부로 시집간 것을요!”

엽연채의 고운 눈에 조롱이 스치나 싶더니, 그녀는 말문이 막힌 진씨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서 공자와 정혼을 해 놓고도 백로원에서 태자를 유혹했잖아요. 태자가 그 유혹에 넘어가 폐하께서도 혼인을 허락했던 겁니다.”

진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백로원에서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너, 무슨 헛소리를……!”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푸훗, 엽연채가 소리 내 웃었다.

“백로원이 조용하긴 해도 돌아다니는 하인들은 있기 마련이죠. 그때 몇이 지나다가 아가씨가 태자 품에 안기는 것을 멀리서 봤다고 하더군요.

하하! 정혼까지 한 여자가 외간 남자의 품에 안기다니, 이게 유혹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그때 대비를 못 해서… 아가씨가 태자를 유혹했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진씨의 얼굴이 이번엔 흙빛이 되었다. 죽어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우리 묘서가 아니다! 멀리서 봤으니 잘못 본 거야! 우리 묘서가 아니라 어떤 여종이었겠지.”

“좋습니다. 이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겠어요. 하지만 폐하께서 혼인을 허락했을 때, 간절히 원한 것은 여러분이었어요! 우리는 태자의 비열한 성품 때문에 반대했지요. 태자가 얼마나 역겨운 짓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제가 일부러 일상원까지 가서 정말로 태자부에 시집가고 싶냐고도 물어봤죠. 만약 그때라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부군이 폐하께 황명을 거두어 달라 부탁할 수 있었으니까요.”

진씨는 물론이고 주 백야와 비 이낭도 깜짝 놀랐다. 당시 엽연채가 정말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 진씨는 주묘서가 귀한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이 샘이 나서 일부러 일을 망치려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때 어머님은 기어코 태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셨죠. 하니 우리가 강요한 게 아니고, 황제 폐하가 강요하신 것도 아닙니다! 태자는 결코 좋은 배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말렸는데, 스스로 팔자를 꼬아 버린 겁니다! 아버님도 그 자리에 계셨으니 그때 다 보고 들으셨을 겁니다.”

본인이 거론되자 주 백야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때는… 정말 그랬지.”

“이 짐승 같은 것들! 그러니까 진작부터 태자 편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태자에게 맞설 생각이었다는 거냐?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묘서가 태자부 그 늑대 굴로 시집가는 것을 눈을 빤히 뜨고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

진씨는 점점 더 격노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일순, 주운환의 눈이 매섭게 빛나더니 그는 호통을 쳤다.

“말씀 삼가십시오, 어머니! 태자는 이미 더러운 전력이 있었으니 누가 봐도 좋은 배필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도 모자라 태자는 주군을 살해하고 황위를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신하인 제가 황제 폐하를 구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엽연채도 눈을 번득였다.

“벌써 많은 사람이 어느 가게 떡을 먹고 탈이 났으니 사지 말라 말리는데도 기어이 사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사지 말라 말리는데도 어머님은 잘되는 꼴이 배 아파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으면서, 이제 와 그 떡을 먹고 죽게 생겼으니 말렸던 사람을 탓하니 이게 무슨 이치인가요?”

진씨는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말도 잇지 못했다. 또다시 졸도할 것 같은 모습에 주 백야가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됐소, 이 일은 셋째 탓이 아니오!”

이미 이 지경이니 더 이상 소란을 피워 봐야 소용없었다. 게다가 이 일은 어디 가서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주운환의 말이 맞았다. 주운환은 황제를 구한 충신이고 태자가 죽일 놈이다! 다만 묘서가, 그저 딸이…….

“어머니, 더 소란을 피우시려거든 밖에 나가서 하십시오. 배웅해 드려라.”

주운환이 차갑게 내뱉었다.

진씨는 분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녀도 밖에서 이 소란을 피웠다가는 그길로 감옥에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묘서는 어쩐단 말이냐?”

“황족의 죄도 백성과 똑같이 처벌하는데 묘서라고 다르겠습니까! 태자의 측비이니 태자부가 어떤 처벌을 받든 묘서도 똑같겠지요.”

진씨는 앞이 막막했다. 역모의 말로는 보통 몰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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