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2화
엽연채와 주운환이 진서후부에 돌아오자 어멈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나리, 마님. 백야 내외가 오셨습니다.”
엽연채의 새까만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오면 오는 거지.”
주운환도 냉랭하게 웃으며 엽연채를 부축했다.
“가요.”
* * *
주운환이 경위영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온 지 벌써 두 시진이 지났다.
기세등등한 군대가 도성에 도착해 황궁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모두 수군거렸다.
주씨 집안도 이 소식을 모를 리 없었다.
주운환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흥분해서 주 백야와 진씨는 거리로 뛰어나갔지만 주운환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주운환이 큰 군대를 거느리고 온 건 사실이기에 부부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태자는 이제 살았다.’
진씨는 흥분해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태자를 구출해 황위에 오르면 묘서가 황후가 되는 것이다. 진씨는 생각할수록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부군, 마음이 너무 불안해요.”
주 백야도 초조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사실 신하로서는 황제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딸이 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태자가 잘못되면 딸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녀뿐 아니라 온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 백야도 내심 정선제가 죽고 태자가 황위를 이어받았으면 했다.
그렇게 되면 주씨 집안도 나날이 번창할 것이다.
“불안할 게 뭐가 있소. 차나 좀 마시면서 마음을 다스립시다.”
주 백야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씨가 말했다.
“아무래도 집이 텅 빈 것 같아요. 백 이낭과 비 이낭, 그리고 첫째와 둘째를 불러 볼까 봐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한참 전의 일 같네요.”
“그럽시다.”
“정 마마, 가서 사람들을 좀 불러오게.”
“네.”
정 마마가 급히 뛰어나갔다.
곧 비 이낭, 백 이낭, 주비양과 강심설, 주종과와 주묘화 모두 도착해 문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이좋은 주비양과 강심설의 모습을 보자 진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몰락한 가문의 것! 묘서가 황후만 되면 의지懿旨를 내려 고귀한 집안의 평처를 비양에게 붙여 줄 것이다. 아니면 아예 황후에게 불경한 짓을 했다는 죄명을 씌워 쫓아낼 것이다!
“셋째가 돌아왔지만…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서 사는 이야기나 좀 하려고 모두 불렀다.”
말끝에 살짝 한숨을 짓는 진씨는 실제 초조하기도 했지만 흥분이 훨씬 컸다.
“불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부인.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텐데요.”
비 이낭이 잘 보이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진씨를 위로했다.
백 이낭도 곁에서 따라 웃었지만 입은 떼지 않았다. 진씨가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은 태자와 주묘서에게 곧 생길 좋은 소식을 그들 앞에서 뽐내고 싶어서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한 시진 가까이 지났을까.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대복이 허겁지겁 뛰어왔는데, 너무 서두르느라 그만 고꾸라져 대자로 엎어졌다.
진씨가 화들짝 놀랐고 주 백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걷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넘어지다니, 정말이지 갈수록 쓸데가 없구나.”
나무라는 주 백야와 달리 진씨는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대복아, 궁에 새로운 소식이 있느냐?”
“응? 정말 그런 것이냐?”
주 백야도 기대를 담은 눈길로 대복을 바라보았다.
“네…….”
하나 대복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네.’ 다음엔? 왜 말이 없어!”
“그게…….”
대복은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진씨가 사납게 다그치자 사실대로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셋째 나리께서 궁에 들어가서… 구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성공했구나!”
진씨는 크게 안도하며 감격에 겨워 두 손을 마주 합장했다.
“하늘이여, 땅이여, 감사합니다. 묘서가 드디어……!”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부인.”
비 이낭도 뒤질세라 진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주 백야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잠깐, 뭐라 했느냐?”
“셋째 나리께서… 구출에 성공하셨습니다.”
대복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셋째 나리는 태자와 정 황후 등 역적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태자는 벌써 폐위되었고, 양왕을 태자에 올렸다고 합니다.”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진씨의 얼굴은 대복의 이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일그러졌다.
“너,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이내 그녀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복은 죽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으나 이제 와 자신이 거짓을 고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태자가 셋째 도련님에게 잡혀갔다고? 게다가 폐위되었다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비 이낭은 전혀 믿지 못하는 기색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이냐? 셋째 도련님이 태자를 잡아갔다고?”
“네.”
대복이 새파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눈앞이 캄캄해진 진씨가 버럭 외쳤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태자 전하다. 태자 전하는 셋째의 매부고, 묘서의 부군이야! 그런데 감히… 감히……!”
주 백야도 믿기지 않는단 듯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한 표정이었다.
주비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강심설은 놀라나 싶더니 곧 고소해하는 눈빛으로 진씨를 지켜봤다.
“아니, 어떻게……!”
진씨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비 이낭도 놀란 탓에 한참이나 있다가 겨우 소리를 빽 질렀다.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어쩌면… 일부러 그런 건지도 몰라요!”
진씨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래, 그 천한 것! 그 아이가 우리 적통들을 곱게 볼 리가 없지, 기어코… 감히……!”
진씨는 별안간 뛰쳐나가려 했고 주 백야는 대경실색하면서 진씨를 붙잡았다.
“어딜 가는 거요?”
“어디겠어요? 셋째 그 천한 것이 감히 극악무도한 짓을 벌였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요? 묘서는 어떡해요? 어쩐단 말이에요?”
진씨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내 딸이……!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진씨는 주 백야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나갔다. 주 백야도 큰일 났다 싶어 황급히 따라갔다. 주비양과 백 이낭 등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수화문에 도착한 주 백야는 아예 마차 세 대를 준비해서 진서후부로 향했다.
하지만 진서후부에 도착하니 하인이 진서후는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잠시 들러 엽연채를 데리고 함께 양왕을 맞이하러 도성 밖으로 갔다고 했다.
진씨는 화가 치솟아 울며불며 욕을 지껄였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응어리를 다 토해 내고 싶었지만, 주묘서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얼른 주 백야, 비 이낭과 함께 태자부로 향했다.
태자부 문 앞을 지키던 금위군은 경위영의 군사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바람도 드나들지 못할 만큼 삼엄하게 태자부를 지키고 있었다.
진씨가 굳은 표정으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경위영의 군사가 바로 막아서며 외쳤다.
“들어가는 자는 죽일 것이오!”
대로한 진씨가 외쳤다.
“나는 백 부인이다! 너희 통령의 적모란 말이야! 감히 나에게 이렇게 하다니. 비켜라! 비켜!”
하지만 경위영의 군사는 물러서기는커녕 들고 있던 칼집에서 ‘철그렁’ 검을 뽑아 들었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하늘의 서왕모라도 목을 벨 것이오.”
“네 이……!”
진씨가 고함을 치자 주 백야가 말렸다.
“됐소, 더 이상 웃음거리를 만들지 마시오. 어길 수 없는 군령이오!”
“묘서야……! 우리 묘서……!”
진씨는 바닥에 엎어져 비통하게 울었다.
쾅쾅쾅! 그때 태자부 안쪽에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 주묘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어머니……!”
“묘서야!”
진씨의 감정은 한층 격해져 울부짖다시피 딸의 이름을 외쳤다.
그동안 주묘서는 태자부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운환이 도성에 돌아오면 자신이 황후가 될 거라고 자신만만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바깥 상황을 지켜보던 시녀가 갑자기 뛰어와서 밖을 지키던 금위군이 경위영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주묘서는 태자의 거사가 벌써 성공한 줄 알고 한껏 기뻐하면서 뛰어나가려는 찰나, 경위영 군사가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모정건이 반역을 시도하여 지금 잡혀 있소. 태자부 사람들은 조용히 본분을 지키고 있으시오!”
“무슨 말이냐?”
주묘서는 그대로 멈춰 섰다.
“잡히다니 무슨 말이냐? 그런 말을……! 네 어찌 감히 입 밖에 낸단 말이냐? 너는 경위영 소속이 아니더냐? 우리 셋째 오라버니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 군사는 차갑게 웃었다.
“진서후가 황제 폐하를 구출하고 태자를 감옥에 잡아넣은 것이오!”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주묘서는 믿을 수 없었다. 주운환은 분명 자신들의 편이었다! 하니 주운환은 도성에 들어와 태자를 구출하고 노황제를 죽여야 했다. 그 결과, 태자는 즉위하고, 자신은 황후가 되어야 했다.
한데 주운환이 노황제에게로 돌아선 것이다……!
“들어가시오!”
경위영의 군사가 주묘서를 세게 밀쳐 들여보냈다.
태자부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뒤숭숭해져 모두들 목 놓아 통곡했다. 주묘서도 겁에 질려 울면서 녹지, 춘산과 함께 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밖에서 진씨가 크게 소란을 피우자 주묘서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묘서야! 묘서!”
진씨는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아 두 눈을 부릅떴다.
“우리 묘서는 어떻게 되는 거요?”
앞에 선 경위영 군사가 귀찮다는 듯이 비웃었다.
“온 집안이 참형당할 날이 머지않았소!”
우리 묘서가 죽는다니? 눈앞이 캄캄해진 진씨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부인!”
주 백야가 소스라치며 쓰러진 진씨를 붙들었다. 다행히 진씨는 정신을 잃은 것뿐인 듯했다.
주 백야는 다시 고개를 돌려 병사들이 철통처럼 태자부를 포위한 모습을 보았다. 그는 비통하고 절망스러워 비 이낭과 정 마마를 시켜 진씨를 마차에 태우고 진서후부로 돌아갔다.
소월은 정신을 잃은 진씨를 힐끔 노려보더니 객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한참 후에 진씨가 정신을 차리자 정 마마가 급히 다가갔다.
“마님, 셋째 나리와 셋째 마님이 돌아오셨어요.”
진씨의 표정이 변하더니 침상에서 내려와 운연거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