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0화
주운환은 말을 마치고 나갔다.
채결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아악!”
고개를 내려 보니 장씨가 그의 배를 찌르고 실실 웃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알려 주겠단 듯 크게 외쳤다.
“공공이 중상을 입었다!”
채결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나 의정이 그를 슥 돌아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후야가 살려 두라 하니, 당신 목숨은 살려 드리지요. 가서 상처를 봐 주거라.”
나 의정이 제 시동을 부르는 동안, 주운환은 큰 걸음으로 정선제의 침궁을 빠져나가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경위영 병사 삼만으로 황궁의 각처를 지키도록 했고, 다시 삼만으로 금위군의 직무를 이어받아 도성을 지키게 했다.
그런 후에 몸을 돌려 철통처럼 겹겹이 잠긴 침궁을 보더니 입꼬리를 당겼다.
“자, 양왕 전하의 귀성을 맞이하러 가자.”
“네!”
뒤따르던 친위대가 주운환의 보폭에 맞춰 황급히 따라나섰다.
원래는 양왕도 함께 도성에 들어오려 하였으나 어떤 일이 생겨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나 지금쯤이면 성문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주운환은 군대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 하나 끝내 참을 수 없어 장씨에게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라 시키고 자신은 준마를 타고 진서후부로 달려갔다.
그의 말은 쏜살같이 정륭가를 달렸고, 불꽃처럼 붉은 적염전갑에 태양이 반사되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 * *
그 시각, 진서후부.
고요한 수화문. 엽연채는 그곳 상죽나무 아래 앉아 손에 턱을 괴고 발끝을 기어오르는 개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천삼백스물여섯 마리…….”
“마님, 천삼백스물일곱 아니에요?”
“응?”
혜연의 말에 엽연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청유도 끼어들었다.
“둘 다 아녜요, 천삼백스물다섯입니다!”
“흥!”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더니 입을 삐죽였다.
“어쨌든 천삼백스물이 넘었는데… 부군은 돌아오지 않으시는구나.”
성공했을지 어쨌을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이 시간이면 아직 바쁘실 거예요. 마님, 벌써 오시입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세요.”
혜연이 걱정스러운 듯이 엽연채를 보았으나 엽연채는 턱을 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배 안 고파.”
“아기는 고플 테니, 먹으셔야죠.”
“아기도 안 고파.”
이 말을 끝으로 엽연채는 조용히 배만 쓰다듬었다.
그때, 밖에서 빠른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놀란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엽연채가 급히 일어나려는데 ‘쾅’ 하고 대문이 열렸다.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금홍색 쇳조각을 이어 만든 진귀한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용음금면龍吟金面 허리띠를, 앞뒤로는 호심경을 달고 어깨에는 단화團花(둥근 꽃문양) 도포를 두르고 있었다.
뒤로 올려 묶은 새까만 긴 머리, 위풍당당하고 용맹한 모습, 세상의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자. 그의 얼굴에 이 나라 전체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불타는 듯한 선홍색으로 반짝이는 그가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부군……!”
엽연채는 멈칫하더니 눈시울이 이내 뜨거워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이렇게 동그래졌는데, 뛰면 안 돼요.”
주운환의 눈길이 보름 전보다도 많이 불러 온 엽연채의 배에 닿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기자 주운환도 마음이 약해져 꼭 끌어안았다.
“부인,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군요?”
“네.”
엽연채는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고 주운환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고는 안심시켜 주었다.
“걱정 마세요, 다 잘됐습니다!”
“아! 성공했어요?”
엽연채는 반짝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주운환은 환하게 웃었고 엽연채는 그의 함박웃음을 보곤 감격에 차서 역시 활짝 웃었다.
“성공 축하해요.”
전에 그와 양왕이 반역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양왕의 세력은 미미했고, 주운환은 아무도 모르는 서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차근차근 오늘 이 자리까지 걸어와 그의 소원을 이루었다.
엽연채는 혼인날 자신의 붉은 머리 수건을 걷어 올리던 그때 보았던, 하얘질 정도로 세탁한 옷을 입고 있던 마른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도 수려하지만 약하고 창백했던 그 모습. 건드리면 툭 쓰러질 것만 같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자신이 지켜 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 자신은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부인……. 사랑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연채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겁니다.”
주운환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정말요?”
엽연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이지요.”
주운환은 그녀의 코를 건드렸다.
“나리……!”
여양이 입구에서 주운환을 재촉했다.
“가셔야 합니다.”
“어딜 가요?”
“양왕 전하가 아직 도성 밖에 계십니다. 내가 직접 도성으로 모셔 오려고요.”
“나도 갈래요!”
주운환은 방금 문을 열 때 외롭게 앉아 있던 엽연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주운환은 여양에게 마차를 가져오라고 해 엽연채를 안아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경위영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도성을 벗어났다.
같이 마차에 앉은 주운환은 엽연채를 무릎에 올리고 살짝 웃었다.
“무거워졌군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일곱 달이니까요.”
“석 달 후면 만날 수 있겠네요?”
“네.”
엽연채도 그날을, 아이를 많이 기대하고 있었다.
“참, 고모도 출산했어요. 딸인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우리 나중에 같이 보러 가요.”
주운환은 고개를 숙여 부드러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싫습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기 보느라 바쁜걸요. 우리 부인만큼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 오, 또 움직이는군요. 하하하, 아버지가 온 걸 아는구나. 예쁘기도 하지.”
엽연채는 웃다가 갑자기 마음이 아파져 단단한 그의 갑옷을 만지작거렸다.
“매일 입고 있으면 힘들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왜 양왕 전하와 같이 도성에 오지 않았어요? 왕비 마마는요?”
“도성 밖에 있습니다. 실은 양왕비 마마가 많이 아프셔서 시간이 조금 지체된 겁니다.”
엽연채가 흠칫 놀랐다.
“아파요? 서신 보낼 때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함부로 양왕과 양왕비의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엽연채는 양왕비에게 마음을 쓰고 있으니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먼 곳의 물로는 가까운 불을 끌 수 없으니까.
엽연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앵기의 상태를 자세히 물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감기일 겁니다.”
주운환은 주 선생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왕이 백주에서 추격을 피해 왕비를 폐가에 묶어 두었는데, 하룻밤 내내 추위에 시달린 후로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다고.
또 도성에 돌아올 즈음에는 날씨가 계속 풀렸다 추웠다 해서 다시 크게 앓았다. 도성 입성을 남겨 두고는 끝내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해 이동을 중단하고 치료를 한 것이었다.
똑똑. 누군가 마차 벽을 두드리자 주운환이 휘장을 걷었다.
“무슨 일이냐?”
창밖에는 말을 탄 여한이 있었다.
“양왕 전하의 마차가 오고 있습니다! 언동 말로 바로 왕부로 돌아간다 합니다.”
“알았다. 우리도 왕부로 간다.”
주운환이 창밖을 바라봤다.
소박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질주했다. 지금까지 양왕과 양왕비가 타고 온 마차였다.
“가자, 얼른 따라가거라.”
“네!”
마차를 몰던 여양이 세차게 고삐를 당기자 마차는 방향을 돌려 빠르게 달려갔다.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마차는 속도를 높여도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주운환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렸고, 그다음 엽연채를 감싸 안듯이 해 내려 주었다. 두 부부는 마차에서 내려 커다란 양왕부를 바라보았다.
작년 십일월, 양왕이 도성을 떠난 이후로 정선제는 자신의 아량을 보여 주기 위해 양왕부 사람들은 살려 두었으나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도록 금위군더러 밤낮으로 지키게 했다. 그러나 방금 주운환이 도성을 장악하면서 양왕부를 지키던 금위군도 경위영으로 교체한 후였다.
엽연채가 멈칫했다. 방금 그 소박한 마차가 대문에 서 있었다.
주운환과 엽연채는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간소한 연청색 평상복을 입고 검은 외투를 두른 양왕이 마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간의 고생을 보여 주듯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양왕은 돌아서서 사람 하나를 안아 내렸다. 두 눈을 꼭 감은 창백한 얼굴이 뒤로 젖혀져 있고 새까만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앵기!”
엽연채가 놀라서 다가가다 먼저 예를 행했다.
“전하를 뵈옵니다.”
“그래.”
인사를 받는 양왕은 표정이 차가웠다.
언동과 언서가 대문을 열자 양왕이 조앵기를 안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양왕의 등 뒤로 살짝 나부끼는 외투가 이 계절의 마지막 한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양왕이 양왕부로 들어서자 양왕부의 식솔들은 놀라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전하!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아무도 양왕부에 갇혀 있던 식솔들에게 세상이 바뀌었다고 알려 주지 않은 차였다. 당연히 그들은 그렇게 떠난 양왕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양왕이 돌아온 것이다! 양왕부에서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열 사람이 백 사람에게 이 소식을 전해 곧 모두 알게 되었다.
양왕이 평정소축에 도착하자 집사와 육 측비를 비롯한 여인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
“전하!”
“전하!”
양왕의 아름다운 얼굴이 훅 어두워지더니 그는 무리 지어 달려오는 여인들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저리들 가거라!”
육 측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양왕이 조앵기를 안고 온 것을 보자 원망과 억울함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도망갈 때도 다른 여인들은 나 몰라라 하고 조앵기만 데리고 떠나더니 돌아올 때마저도 데려오다니…….
‘바깥세상이 그리 험한데 저것은 어찌 멀쩡히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양왕이 조앵기를 안고 내실로 들어가자 엽연채와 주운환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양왕은 조앵기를 침상에 올려놓고 차가운 목소리로 주 선생을 찾았다.
“주 선생.”
“네.”
나이가 지긋한 주 선생은 따라오느라 숨을 헐떡이면서도 앞으로 비집고 나와 바로 조앵기의 맥을 짚었다.
“나 의정을 불러다 살겠는가 보라고 해라.”
“네, 전하.”
양왕이 뒤를 돌아보자 언서가 바로 손을 모아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