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59화 (759/858)

제759화

‘한데… 태자는 짐을 죽이려 하고 주운환은 짐을 구했다.’

정선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은 죽어도 양왕의 오명을 벗겨 주고 싶지 않았고, 죽어도 양왕이 돌아오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태자가 잡혀 가면 양왕은 고소해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지금 이 형국에서는… 절대 양왕을 부활시키면 안 된다.’

정선제는 어두운 눈빛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주운환도 양왕에게 속은 것이라고 하면 된다. 양왕은 정말 태자에게, 형제에게 독을 먹였다고! 그것을 자신이 알아냈다고 하면 된다. 태자가 비록 대역죄를 저질렀지만 양왕도 좋은 아들은 아니라고 말이다!

정선제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진서후… 자네가… 허허허… 어억……!”

운을 제대로 띄우기도 전에 정선제가 고통 어린 신음을 쏟아 내더니 그의 몸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허리 뒤쪽에서 갑작스러운 통증이 느껴졌다. 몸이 계속 말려들면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고 혀도 꼬여서 펴지지 않았다.

정선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누런 눈을 들어 나 의정을 돌아봤다.

자신의 허리를 안마하는 손은 나 의정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찌?

정선제의 추측대로, 나 의정이 그에게 침을 놓은 것이 맞았다! 그리고 이 침 한 방으로 정선제는 몸이 마비되고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폐하, 아니, 폐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 의정은 진작에 손을 떼고 놀란 얼굴로 정선제를 보고 있었다.

“폐하, 폐하!”

유 재상과 대신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정선제가 비스듬히 나 의정을 바라보자 여지가 소리쳤다.

“폐하, 폐하……!”

“안심하십시오, 폐하! 소신이 꼭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제 목숨을 바치더라도 폐하를 살려 낼 것입니다.”

나 의정이 울면서 정선제의 맥을 짚었다.

유 재상은 그제야 정선제의 몸이 갑자기 마비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경황이 없는 사이에 그는 마지막으로 나 의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우으… 어어…….”

정선제의 몸은 계속 오그라들어 갔다. 그래도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라 자신의 뜻을 표현하려 애썼다.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운환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정선제 입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 응… 라… 으으어… 주…….”

정선제는 두 눈에 힘을 준 채 겨우 소리를 짜냈고, 주운환은 더듬거리는 정선제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일어나서 냉랭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태자 모정건이 주군을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려 한 죄로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한 양왕을 태자에 봉한다 하셨습니다.”

침궁 전체가 얼어붙었다.

정선제는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자신은 나 의정이 감히 황제를 해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주운환은 양왕을 태자에 봉한다는 거짓된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주운환은 태자의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의 사람도 아니란 얘기였다. 그는 양왕의 사람이었다! 정선제는 충격과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폐하! 폐하!”

유 재상과 여지 등 대신들이 소리쳤다.

“폐하는 무사하십니다. 그저 너무 쇠약해지셔서 잠시 정신을 놓으신 것뿐입니다. 자, 좀 도와주십시오. 폐하를 침상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주운환이 그들을 진정시키며 정선제를 안아 들어 침상으로 옮겼다.

주운환이 침상 쪽에서 돌아오자 유 재상과 대신들이 그를 둘러쌌다. 유 재상은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진서후,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운환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재상 말씀이야말로 무슨 뜻입니까?”

유 재상은 새하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폐하께서 어떻게 양왕 전하를 태자에 봉한다는 말씀입니까?”

주운환이 양왕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알았다.

“왜 안 됩니까? 예전에 폐하께서 얼마나 양왕 전하를 아끼고 사랑하셨는지 도성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운환이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침궁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특히 채결은 말문이 막혀 어쩔 줄 몰랐다.

“채 공공,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주운환은 씩 웃으며 그런 채결을 보고 있었다. 채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게…….”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정선제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 아들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정선제가 파렴치한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하니 어찌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정선제는 친아들을 아끼지 않았다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을 것이다. 그 아들은, 양왕은 정선제가 가장 사랑했던 선황후의 유일한 혈육이자 억울하게 누명을 쓴 소씨 집안의 후손이다. 정선제의 오해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됐는데 그 자식까지 학대를 한다니? 얼마나 잔학한 일인가!

“채 공공?”

주운환이 성큼성큼 다가오니 채결이 잔뜩 굳은 얼굴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을요. 폐하께서… 가장 아끼는 아들은 양왕 전하이십니다.”

“대인들, 들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양왕 전하를 태자로 봉하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여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에 나섰다.

“방금 폐하께서 말씀도 정확하게 못 하셨는데, 어찌 그리 긴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폐하는 당연히 그리 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아홉 글자만 말씀하셨습니다. ‘양왕을 태자에 봉한다!’”

“이 일은… 그 말은 증거가 없습니다!”

전지신이 다급하게 외쳤다. 주운환은 금세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 역적!”

주운환은 돌연 검을 꺼내 들었고 삽시간에 철그렁 소리와 함께 은빛 광선이 번쩍였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전지신의 목에서 시뻘건 선혈이 솟구쳐 나왔고 ‘털썩’ 소리가 나며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으악!”

“아악!”

대신들은 혼비백산하여 고함을 질렀다. 특히 태자와 한패였던 사람들은 이미 질겁해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주운환, 네 이……! 네 감히!”

유 재상이 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쳤으나 그가 말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 주운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에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

“전지신은 태자와 한패입니다. 태자가 제가 자기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때 직접 말한 것입니다.”

유 재상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지신이 태자의 사람이라는 것은 온 조정이 다 아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여지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지신을 비롯한 잔당은 분명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태자를 새로 책봉하는 일은 우선 폐하가 깨어나신 후에 다시 이야기하십시다.”

“여 상서의 말이 맞습니다.”

동조하는 소리에 주운환은 픽 조소했다.

“지난 며칠 동안 여러분들의 노고가 많으셨으니 우선 돌아가서 좀 쉬십시오. 폐하가 건강을 회복하시거나 조정이 안정되기 전에 황궁과 도성의 안위는 경위영에서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주운환의 말에 대신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 말은 주운환이 도성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것 아닌가!

유 재상은 잔뜩 경직된 얼굴로 두 눈을 크게 치떴다.

“무슨 말입니까? 황성의 안위는 언제나 금위군의 직무였습니다. 진서후는 주제넘게 나서지 마시오!”

주운환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금위군의 일입니다! 그런데 결과는요? 금위군은 그간 무슨 일을 했습니까?

수녀가 폐하를 기습하고, 역적의 존재도 밝혔는데도 금위군은 그 역적을 폐하의 침궁에 들여보냈습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말입니다. 결국 역적이 무기를 폐하의 목에 들이대고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금위군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유 재상과 대신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금위군의 뼈저린 실책이었다.

“폐하가 역적에게 제압당해 생명이 위태로울 때, 금위군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상관 통령, 그때 뭘 하고 계셨습니까?”

주운환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저벅저벅 걸음했다. 상관수는 벌써 도착했지만 들어갈 면목이 없어 문가에 서 있던 차에 주운환의 질책을 듣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고 결국 무릎을 꿇었다.

“소장이… 죄송합니다, 폐하……!”

유 재상과 여지를 비롯한 대신들도 하얗게 질렸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하, 금위군!”

주운환은 그들을 한번 훑어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재상 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폐하께서 잡혀 있으셨을 때, 재상 대인은 구석에 웅크리고 안전하게 잘 숨어 있으셨지요?”

유 재상의 안색이 변했지만 반 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물론 주운환의 말대로 제 목을 지키려고 어디 콕 박혀 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뜻이 있다 한들 문신들이 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랬는데… 이제 주운환이 황제를 구출해 내고 이것저것 책을 잡으니 자신들이 염치도 없는 소인배들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주운환은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가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면 말 한마디로도 가능할 것인데 그 도리도 타당했다. 유 재상과 대신들은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어 낭패한 모습으로 돌아 나갔다.

“우우우……!”

한편, 태자와 정 황후, 이계는 입이 막힌 채로 함께 묶여 있었다. 그들은 유 재상 등이 떠나고 주운환이 상황을 장악하는 것을 보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특히 양왕을 태자로 봉한다는 말이 떨어졌을 때부터 정 황후는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소기, 네 이것. 죽고 나서도 이렇게, 어찌 아직도……!’

정 황후는 이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절대로!

어려서부터 소기는 늘 자신보다 뛰어났고 시집도 자신보다 좋은 곳으로 갔다. 그래도, 자신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계획해서 결국 소기를 이겼다. 그런데……!

“데려가 형부 감옥에 가둬라.”

주운환이 차디찬 목소리로 여양에게 명했다.

“네.”

여양이 대답을 하고 경위영 병사 몇 명과 함께 태자 일행을 끌고 나갔다.

침궁이 조용해졌다. 채결은 멍하니 서 있었다.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잠시 후, 채결이 굳은 얼굴로 정선제의 침상을 쓰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주운환이 돌아서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주운환은 예의 그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잔혹한 말을 툭 뱉었다.

“채 공공은 오랜 시간 태자의 협박을 겪느라 칼에 여러 곳을 찔려 사망하였소.”

“아니……!”

채결은 두 눈을 있는 힘껏 부릅떴다.

“어찌 감히……!”

주운환이 눈썹을 움직였다.

“좋소. 공공은 폐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마지막 결말을 볼 수 있게 살려 드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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