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58화 (758/858)

제758화

“후야!”

이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후야가 올 때까지 전하가 버텨 내셨습니다!”

바로 그때 밖에서 숨 가쁜 외침이 들려왔다.

“진서후!”

주운환이 고개를 돌리자 유 재상, 여지, 전지신, 장찬과 진무 등 대신들이 쫓아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파랗게 질린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충심이 깊기로 유명한 유 재상과 여지는 이계와 주운환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이 파랗게 떴다.

“진서후 네……!”

유 재상이 노성을 내지르자 주운환은 차가운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챙, 챙!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칼날 소리가 울렸다. 선두에 선 유 재상과 몇몇은 차디찬 피바람을 느꼈다. 앞에 서 있던 경위영 병사들이 칼집에서 칼을 꺼내 그들의 얼굴에 겨누고 있었다. 유 재상과 대신들의 낯빛이 변했다.

“네 이놈……!”

“흥!”

이계는 유 재상과 대신들을 훑어보며 오만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돌려 주운환에게 예를 갖추었다.

“후야, 가시지요. 전하와 황후 마마께서 한참 기다리셨습니다.”

주운환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이계를 향해 고갯짓했다.

“알겠네. 먼저 가시게나.”

주운환은 여양, 장씨와 함께 이계를 따라 뜰로 들어갔다. 유 재상과 그의 편에 선 대신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여지, 나 의정 등 나이 든 대신들도 바닥에 앉아 원통한 듯 통곡했다.

반면, 전지신을 비롯한 태자 측 사람들은 모르는 척했다.

장찬과 진무는 복잡한 심경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염치도 없는 자를 황제로 모시고 싶을 리가 있는가! 하지만 주운환이 꼭 그를 황위에 올려야 하겠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운환 일행이 침궁에 들어서자 이계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태자와 정 황후는 내실에 서서 정선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긴장이 극에 달한 나머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나자 두 사람은 급히 창밖을 확인했다. 이계가 주운환과 그의 부하 두 명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태자는 몹시 반가워했다.

“진서후!”

정 황후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성공했구나!

주운환과 이계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정선제와 채결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태자는 정선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고개를 든 정선제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네 이런 돼먹지 못한 놈들……! 이……!”

“본궁이 진서후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가!”

주운환을 보자 태자는 아예 검을 내던졌다. 검은 둔탁하고도 정겨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하하!”

태자는 두 팔을 벌려 주운환을 안으려고 다가갔다. 그 순간, 주운환의 눈에 위험한 빛이 스치더니 매정하고 냉혹한 붉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다가서더니 단숨에 태자를 집어 던졌다.

바닥을 나뒹군 태자가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여양이 이미 그를 단단히 짓누르고 있었다.

이계는 아연실색했고 정 황후는 고함을 질렀다.

“뭐 하는 짓이냐?”

정 황후는 떨어진 검을 집으려다가 주운환에게 걷어차여서 멀찍이 떨어진 기둥에 부딪혔다.

“아아악!”

정 황후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이계도 벌써 장씨에게 제압을 당한 후였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태자와 정 황후, 정선제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주운환이 성큼성큼 정선제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폐하, 소신이 폐하를 구하러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놀라시게 했습니다.”

정선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운환이 고개를 들자 운하를 닮은 얼굴이 보였다. 정선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크게 반색했다.

“그래, 그래! 짐은 벌써 알고 있었다! 너의 충심이 지극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과연 운하의 환생이로구나, 그 아이는 짐에게 가장 효성이 지극했는데 어찌 짐을 해할 수 있겠나……! 짐이……!”

정선제의 얼굴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주운환은 정선제의 두서없는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운하? 누구지?

“주운환……!”

바닥에 짓눌려 있던 태자가 분노에 가득 차 소리쳤다.

“네가 감히!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주운환은 그를 돌아보며 차갑게 웃었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찌 배반했다는 겁니까?”

태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

“지난달, 천수하의 놀잇배에서 저 노인네가 당장 퇴위하고 본궁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네가 감히!”

주운환은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잖게 되받았다.

“진작에 당신이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당신을 따르는 척하면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 지켜봤지요. 그런데… 폐하께서 갑자기 도성을 떠나라 명령하셨기에 당신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불안불안했는데 결국 제가 도성을 떠나 있는 동안 정말 일을 벌였을 줄은.”

태자는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본궁은 너의 매부이다! 매부!!”

주운환은 피식 비웃었다.

“주묘서? 그 아이가 나를 오라버니로 생각하지 않는데, 나라고 그 아이를 여동생으로 아끼겠습니까? 나를 바보로 본 것입니까?”

태자는 쿨럭 소리와 함께 피를 토했다.

“여양, 폐하를 풀어 드려라. 장씨는 나 의정을 불러오게.”

주운환의 말에 여양과 장씨는 먼저 이계와 태자, 정 황후를 포박해 두고, 하나는 정선제의 오라를 풀고 다른 하나는 의정을 부르러 나갔다.

정선제는 감동에 겨워 주운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서후, 태자가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았으면서 왜 진작 짐에게 알리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채결도 안심하여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심으론 주운환이 직접 정선제의 포승을 풀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풀어 주라 하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했으나 주운환은 황제 구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차마 이제 와서 이런 것을 따질 엄두는 나지 않아 다른 식으로 은근히 쏜 것이었다.

주운환은 가볍게 웃었다.

“폐하께서 언제나 태자를 굳게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태자가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을 제거하려고 양왕이 자신에게 독을 썼다는 거짓말을 했는데도 폐하께서 아무런 의심 없이 태자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자가 반역을 계획하고 있다 털어놨을 때, 소신도 몹시 놀랐지만 차마 폐하께 보고드릴 수 없었습니다. 폐하는 분명 이를 믿지 않으실 텐데, 섣불리 행동했다간 오히려 태자의 경계심만 일깨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신은 암암리에 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선제와 채결은 뜻밖의 맥락에서 ‘양왕’ 두 글자가 튀어나오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정선제는 구출된 기쁨에 도취한 채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잘했어!”

그 시간, 정선제의 침궁 밖.

유 재상과 몇몇 대신들이 바닥에서 비통하게 울고 있을 뿐, 주변은 몹시 엄숙했다.

끼이익. 갑자기 침궁 대문이 열리고 경위영 병사 하나가 나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진서후가 역적을 제압하여 폐하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폐하는 중상을 입으시고 기력이 쇠하였으니 어서 의정을 보내 주십시오.”

유 재상과 대신들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말이냐? 구출에 성공했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어보던 그들은 곧 숨을 몰아쉬었다. 주운환이 정말로 폐하를 구출했다고?

뒤편에 선 전지신과 그 일행의 낯빛이 변했다. 설마……!

“폐하! 폐하!”

나 의정은 그 누구보다 빨리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유 재상, 여지, 장찬 등 대신들도 뒤질세라 우르르 침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가니 태자와 정 황후, 이계가 한데 묶여 있었다. 정선제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몸이 굳은 탓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폐하……!”

나 의정이 황급히 다가가 정선제의 상처를 살폈다.

“폐하!”

유 재상과 대신들은 모두들 정선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다.

“폐하께 이런 난관을 겪으시게 하다니 모두 저희 대신들이 무능한 탓입니다 폐하!”

“됐다, 너희들… 쿨럭쿨럭…….”

실낱같은 기운만 겨우 남아 있는 정선제가 말했다.

“이 일은 진서후의 공이 가장 크다. 짐을 구출하여 큰 공을 세웠으니 정일품 후작에 봉하고 이 관직은 영원히 세습할 것이다!”

대신들은 화들짝 놀랐다. 영원히 세습한다니!

반면 주운환은 눈썹만 슬쩍 치켜 올렸다. 됐다. 드디어 연채랑 신분이 같아졌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사의를 표한 주운환은 눈을 빛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나 제가 제때 폐하를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양왕 전하의 덕입니다.”

침궁이 일순 고요해졌다.

잠시 후, 정선제가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양왕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주운환이 성큼 정선제에게 다가갔다. 고작 한 발짝이었지만 주운환의 키가 헌칠하기 때문에 정선제에게는 충분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작년, 양왕 전하께선 태자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저에게 말씀하셨지만, 소신은 양왕 전하가 태자를 모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양왕 전하가 태자에게 독을 먹이려고 시도하셨으나 발각되어 도성을 탈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태자는 제 앞에서 드디어 마수를 드러내었고 소신은 그제야 양왕 전하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 때마침 소신은 황명을 받들어 양왕 전하를 잡으러 출병하여야 해서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며칠 전, 양왕 전하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직접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소신에게 ‘태자가 수녀를 써서 황제 폐하를 기습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셨습니다.

양왕 전하는 폐하의 생명이 위험할까 걱정되어 자신의 안위도 아랑곳 않고 도성으로 돌아오던 중, 능주에서 길이 막혔던 것입니다. 수녀가 시침에 들 날이 점점 다가오자 양왕 전하는 소신의 앞에 나타나 스스로 잡히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폐하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이셨던 겁니다.

소신도 처음엔 양왕 전하의 말씀을 믿지 못했으나, 그즈음 태자가 반역을 일으켜 폐하를 협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양왕 전하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주운환의 격정적인 말이 끝나자 침궁이 고요해졌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유 재상을 비롯한 대신들은 정선제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선제의 얼굴은 파래졌다 허예졌다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선제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양왕이 태자에게 독을 쓴 것은… 애초에 그 일은 태자가 손을 쓴 게 아니었다. 자신이 태자의 장애물을 없애 주기 위해 만들어 낸 구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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