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6화
그 시각, 운연거.
엽연채는 서차간에서 수를 놓고 있었다.
태자가 퇴위를 강요한 소식은 벌써 온 집 안에 퍼졌다. 어쨌든 주묘서가 태자부에 들어갔고 그녀는 주운환의 여동생이니 청유와 몇몇 시종들은 겁을 냈다. 태자부가 포위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그 일에 말려들게 될 것 아닌가.
집 안에서 이런저런 소식이 마구잡이로 오가자 엽연채가 함부로 입을 놀리던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렸고, 집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그러나 수를 놓는 엽연채의 얼굴 역시 잔뜩 굳어 있었다. 옆에 있던 혜연과 청유는 엽연채의 자수 모양이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마님, 주인나리 내외가 오셨습니다.”
밖에서 소월의 목소리가 들리자 엽연채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시라고 하렴!”
그녀는 그들이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 이내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주 백야와 진씨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셋째야…….”
주 백야는 막상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반면 엽연채는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인사했다.
“아버님, 어머님, 앉으세요. 청유야, 차를 가져와라.”
주 백야가 권의에 앉았다.
“궁에서 일이 일어났다는구나…….”
“저도 들었습니다. 한데… 아버님, 어찌 저를 찾아오셨나요? 저는 그저 자수나 놓고 실이나 뜨는 아녀자인데요. 바깥일은 알지 못하니 모든 건 부군께 맡겼습니다.”
엽연채가 담담하게 대꾸하자 주 백야의 얼굴이 굳어졌다가 곧 시뻘게졌다. 대장부가 일이 생기자 헐레벌떡 며느리나 찾아오다니……! 정말 부끄러웠다.
진씨는 엽연채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물건이야! 흐름을 읽는 능력도 없다니! 우리 묘서가 태자의 거사를 돕는 것 좀 봐라. 그 어린애조차 거사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는데. 엽씨 이것은… 쯧쯧쯧. 우둔하기는!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남자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만 생각하고 여자들 사이의 사소한 일이나 알지.’
“그러니까… 셋째가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보러 왔다.”
주 백야는 핑계를 찾아 둘러댔다.
“며칠이면, 곧 올 거예요.”
주운환이 보내온 서신에서 이틀이면 도성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럼 됐다.”
주 백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그는 자리에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짜고짜 며느리한테 달려온 게 부끄럽긴 해도, 지금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게 더 컸다. 어찌 됐든 주운환은 집안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니 여기 있어야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엽연채는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아 하는 주 백야를 보고 차분히 권했다.
“아버님, 어머님, 오신 김에 여기서 식사하고 가세요.”
“그래, 그것 좋은 생각이구나!”
주 백야가 얼씨구나 대답하자 혜연은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다.
주 백야와 진씨는 오시가 되어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진씨는 마차에 오르며 엽연채를 보고 다시 한번 차갑게 비웃었다.
‘무식한 것, 앞으로는 우리 묘서 발밑에 바짝 엎드리고나 있어야 할 게다!’
* * *
궁.
침궁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의자에 묶인 정선제와 채결은 몹시 초췌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둘은 잠시 눈을 붙였다.
태자와 정 황후, 이계는 돌아가며 이들을 감시했다.
그러다 이계가 잠시 밖으로 나가 식사를 내오도록 했다. 일부 대신들은 이때다! 하고 음식에 독을 넣으려 했지만 ‘모든 음식은 정선제에게 먼저 먹일 거요.’라는 이계의 경고에 멀쩡한 음식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반역자!”
정선제는 태자가 먹여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태자를 욕했다. 그는 태자가 자신에게 독을 시험하고 있는 걸 알았지만 너무 배가 고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식음을 끊었다간 누군가 구하러 올 때까지 버틸 수도 없을 테니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정선제의 모습을 보다 못한 이계가 굳은 얼굴로 정선제의 뺨을 두어 대 때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태자와 이계는 채결을 발로 차고 때리기 시작했다.
“옥새는 어디 있냐?”
“소인은 모릅니다!”
채결은 고통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정선제는 고개를 숙이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목이 찔린 자리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얼굴에는 잠簪에 깊이 파인 상처가 있었다.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참기 어려울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상처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묶인 채로 앉아 있어 뻣뻣하게 굳은 온몸이 아파 왔다.
혼인 이후 어디 이런 대접을 받아 보리라 상상이나 해 봤을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자신이 의자에 묶여 사정없이 맞았다. 그것도… 자신이 늘 아끼고 사랑해 온 황후와 태자에게 말이다.
“전하, 정말 옥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계의 보고에 태자는 탁자 옆에 앉아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 지경이니 찾으면 찾는 거고, 못 찾으면 위조해야지.”
정 황후가 이리 운을 떼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야겠군요.”
“계야,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지?”
이계는 채결과 정선제의 입부터 마저 막은 후 정 황후에게 대답했다.
“황후 마마, 벌써 신시申時(오후 3시~5시) 이각입니다.”
어제저녁 궁에 들어왔으니 벌써 하루 가까이 지난 셈이었다.
“진서후는 언제 도착하느냐?”
정 황후는 초조해 어쩔 줄 몰랐다. 승리가 눈앞에 있다지만 밖에는 금위군 수만 명이 포위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섣불리 행동했다간 그길로 목숨을 잃을 것이었다.
“내일, 늦어도 모레면 도착할 겁니다!”
태자가 차갑게 대꾸했다.
입궁하기 전에 벌써 송초 등 수하들과 회의를 끝마친 참이었다. 자신은 궁에 들어가 정선제를 협박하고 송초는 주운환에게 서신을 전하기로 했다. 때가 되면 주운환이 황제를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십만 병사를 이끌고 궁으로 진격해 금위군을 해치울 것이다!
주운환은 자신을 구출한 후 정선제를 죽일 것이다. 그러면 경위영 군사들은 모든 대신을 조정에 끌고 와 턱 밑에 칼을 들이대고 새 주인을 받아들일 것인지 확인할 터였다!
그 일도 그리 어렵잖게 진행되리라. 전지신을 비롯한 많은 조정 대신들이 이미 자신을 따르고 있으니까. 때가 되면 전지신이 중립인 대신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 올 것이다.
만일, 유 재상 등의 늙어 빠진 대신들이 감히 불복하면 바로 칼을 겨눌 것이다! 죽여서 굴복시키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조정을 정리한 후, 세상 백성들에게는 수녀 소자금이 황제를 협박했다고 발표할 것이다! 황제를 구하러 온 자신도 소자금에게 잡혀 궁에 붙들려 있었고, 금위군 통령 상관수가 태자부와 정씨 집안을 포위한 것은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발표할 것이다.
정 황후는 태자의 계획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금위군이 태자부를 보호하려 포위했다는 것은 억지 아니냐…….”
태자는 냉랭하게 비웃었다.
“어마마마, 어차피 구실일 뿐입니다. 백성들은 무지몽매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저를 믿고 받아들이겠지요.”
정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선제는 태자와 정 황후가 소곤거리며 즉위 후의 일을 상의하는 것을 듣고는 화가 나 눈이 뒤집혔다.
‘이 배은망덕한……! 배은망덕한 놈들!’
정선제는 자기도 모르게 주운환을 떠올렸다. 주운환은 누가 보아도 운하의 환생인데 어떻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주묘서를 태자에게 붙여 주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 다 태자를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태자와 주운환의 사이가 틀어질까 걱정되어 혼인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파국을 자초한 꼴이 되어 버릴 줄이야.
정선제는 마음 아프고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 절망스러웠다! 주운환이 태자의 사람이 되었다면 자신의 희망은 이미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대전.
유 재상과 여러 대신들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주운환이 태자의 사람이든 아니든, 지금은 우선 주운환의 도성 진입을 막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금위군이 삼만, 도성 병사가 십만입니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지의 말이었다.
“우리가 지략을 꾸며서 유인하면 됩니다!”
오봉의 반대에 장찬도 끼어들었다.
“만약 진서후가 태자의 사람이라면 벌써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구출하러 오는 사람을 어찌 속여서 유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태자의 사람이 아니라면 속여서 유인할 필요 없이 정중하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대전이 침묵에 휩싸였다.
오봉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입니까?”
모두 조용한 가운데, 장찬이 코를 만지작거리다 입을 뗐다.
“뭘 어쩌겠습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겠지요.”
그의 이 말에 대전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대로 굳어 버려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장찬의 말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라는 뜻이다! 아무리 많은 지략을 생각해 낸다 해도 절대적인 무력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뜻 말이다.
하기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운환은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용기와 지략, 문과 무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잖고서야 어떻게 응성 같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겠나.
주운환은 병력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지혜와 계략도 갖추었으니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분명했다.
* * *
그 시각, 진서후부.
엽연채는 고양이 모양의 물뿌리개를 들고 뜰의 해당화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청유가 와다닥 뛰어왔다.
“마님!”
“바깥 상황은 어떻더냐?”
엽연채가 돌아서며 묻자 청유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모두들 태자가 불효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당께 잠시 들렀더니 걱정되어 보러 오시려 하는 것을 그러지 마시고 집 안에 계십사 말씀드렸습니다.”
“잘했다. 부군께서 내일이면 도착하실 거다!”
이리 대답한 엽연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걱정스러워하는 엽연채를 보고 혜연이 일부러 웃으며 말을 붙였다.
“네! 주 측비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엽연채가 살짝 탄식하더니 함께 웃었다.
“이틀만 지나면 황후가 된다고 태자부에서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고 있겠지!”
푸훗, 혜연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시각, 정국백부.
주 백야는 안절부절못하고 집 안을 서성였다. 진서후부에 또다시 쫓아가고 싶었지만, 어제 엽연채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녀자일 뿐이라 말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엽연채는 임산부이니 옆에서 알짱대며 불안하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