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4화
미색과 세력은 소 황후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대신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정 귀비는 상냥하고 따뜻하게 자신을 보필했고, 자신을 하늘로 여기며 믿고 따랐다. 그녀 앞에 서면 자신은 그제야 진정한 황제가 된 기분이었다.
이후로 자신은 정씨 집안 사람을 요직에 발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 황후는 정 귀비와 그 식구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리고 소 황후가 그럴수록 자신은 정씨 집안과 정 귀비를 더욱 마음에 들어 했다…….
정씨 집안이나 정 황후, 태자 모두 자신이 골라 발탁한 사람들이니 자신을 하늘로 섬겨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여기 이렇게 묶어 무기를 겨누고 천하 지존의 자리를 내놓으라니?
정선제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정 황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황후… 짐과의 정을 생각해 보시오……. 당시 짐을 연모하는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소. 그때 소 황후가 당신을 그토록 싫어했는데도 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을 궁에 들였소이다…….”
정선제는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정 황후가 감동받아 마음이 약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 황후는 무시하는 눈으로 그를 보며 냉랭히 웃었다.
“연모하는 마음이 깊었다고요? 진심으로 하는 얘기입니까?”
정선제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무슨 말이오? 당신이 먼저 짐에게 고백을… 어려서부터 짐을 연모해 왔다고… 짐의 첩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소……?”
“하!”
정 황후는 코웃음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당신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마음에 둔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저 천비가 낳은 재수 없는 황자일 뿐이죠.”
정선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감히……!”
“애초에 소씨가 당신을 마음에 둔 게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쳐다라도 봤었겠어요? 그때 소씨 집안이 얼마나 기세등등했습니까. 주씨 집안과 소씨 집안은 대제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난공불락의 태산이고, 대제를 지키는 수호신이었습니다. 만약 두 집안 중 하나가 황자와 이어진다면 그 황자의 앞길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아니겠어요!
그런데 주씨 집안은 황실의 싸움에 끼지 않아 황족과 혼맥婚脈(혼인을 통해 이루어진 유대 관계)을 맺지 않았지요. 소씨 집안도 원하지 않았고요. 그러다… 뜻밖에도 소씨가 당신에게 빠져 시집을 간 거죠.
이런 세력을 업었으니 황위는 반드시 당신의 자리가 될 거라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당신에게 연모해 왔다 고백을 한 거죠! 소씨와 누가 더 잘났는지 겨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었고요. 하하하!”
“뭐라고?”
정선제의 두 눈이 이글거렸고 노여움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에게 끌린 적조차 없다니. 그녀가 반한 것은 단지 전도유망한 자신의 미래였고, 앞으로 자신의 것이 될 황제 자리였다는 건가!
정선제는 다시 소리쳤다.
“이 천박한 것……! 그렇게… 짐이 너를 끌어 주었거늘! 짐이 언제나 정씨 가문을 끌어 준 것을 잊었느냐! 짐이 너희 집안에 어떻게 해 줬는데… 이렇게 나를 능멸한다는 말이냐?”
정 황후는 오히려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
“폐하, 그런 말씀을 하시려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무슨 말이냐?”
정선제가 악에 받쳐 소리쳤으나 정 황후는 더없이 침착했다.
“처음부터 소씨 집안에서 폐하를 받쳐 주고 끌어 주었으니 말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천비 소생의 불운한 황자가 어찌 빛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폐하는 소씨 집안과 소씨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고 능욕했습니다! 그래 놓고 지금 저희를 받쳐 주고 끌어 줬다는 말이 나오세요? 하하하! 이제 아시겠군요. 당시 소씨와 그 집안사람들의 기분이 어땠겠어요?”
정 황후는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커억! 너, 너 이……!”
정선제는 결국 각혈했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아바마마,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려면 어서 양위 칙서를 쓰십시오!”
“이 반역자! 짐승! 꿈도 꾸지 말아라!”
태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잠으로 정선제의 얼굴을 힘껏 그었다.
“으아아아아악!”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정선제의 얼굴에서는 비처럼 피가 흘러내렸다.
“폐하, 폐하!”
의자에 결박된 채결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되어 울부짖었다.
“태자 전하! 황후 마마, 제발……!”
“닥쳐라!”
태자는 채결의 뺨을 세차게 올려붙였다.
“폐하, 세상일이 돌아가는 것을 아는 것도 호걸이라 하였습니다. 좀 시원시원하게 결정하시지요!”
정 황후가 몰아붙였으나 이계는 생각이 달랐다.
“전하, 폐하는 굴복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서 옥새를 찾는 게 좋겠습니다!”
옥새만 찾으면 칙서를 위조할 수 있다.
“너희들 모두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짐의 황위를 빼앗겠다는 꿈도 꾸지 말아라. 짐의 3만 금위군이 벌써 황궁을 포위하였을 테니 너희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정선제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점차 냉정을 찾고 껄껄 웃었다.
“태자, 짐이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친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구나! 옥새를 손에 넣는다고, 칙서를 쓴다고 황위가 네 것이 될 것 같으냐? 너는 벌써 온 세상이 다 아는 역적이다! 짐이 죽으면 금위군이 너를 난도질할 것이다! 경위영에서 너희들의 뼈를 밟아 가루로 만들 것이야!”
태자와 정 황후는 눈빛을 나누며 기이하게 웃었다.
“경위영에서는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밟고 지나갈 것은 아바마마의 뼈입니다! 주운환은 줄곧 제 사람이었거든요.”
정선제의 흰 눈썹이 꿈틀대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냐?”
채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백해진 얼굴을 푹 수그렸다. ‘우려했던 바가 끝내 현실이 되고 만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전신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주묘서가 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태자는 주운환의 매부였다. 다만 주운환은 늘 정선제에게 충성스러웠고 주묘서와 낳아 준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태자가 주운환이 자기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의외이기도 하지만 한편 사리에 맞는 일이기도 했다.
“하하하! 모두 아바마마가 혼인을 허락해 주신 덕분에 진서후가 저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정선제는 경악스러운 얼굴이었다.
“진서후는 짐에게 충성스러운……!”
그러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면, 앞으로 일어날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 *
침궁의 창과 문은 굳게 잠겨 있어 아무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상관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궁 문 앞에 서 있었다.
“대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다 못한 부하가 묻고 나서야 상관수의 눈빛이 변했다.
“병사 2천 명을 불러 침궁을 둘러싸 지키고, 다른 2천 명으로는 태자부와 정씨 집안을 포위해라. 남은 사람들은 황궁 밖에 배치해 궁의 모든 문을 막아라. 그리고 모든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들여라.”
“알겠습니다.”
부하는 명을 받들고 곧장 뛰어나갔다.
시간은 벌써 축시丑時(오전 1시~3시)를 지나고 있어 온 도성이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며칠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낮이고 밤이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 달빛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새까만 장막 아래, 백성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들어 있었다. 아무도 궁에서 이는 거대한 파도를 알지 못하나 바로 오늘, 대변화가 일어날 것이었다!
그때 군사들이 준마를 타고 황궁에서 빠져나와 우르르 골목을 지나갔다. 천지가 진동하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사람들도, 놀라서 등을 밝히고 창밖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 * *
태자부.
주묘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밖에서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더니 짜증스럽게 외쳤다.
“누구냐?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마마!”
끼익, 문이 열리더니 춘산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궁에서…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주묘서는 방금 태자가 궁에 들어간 것을 떠올리고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궁에서 무슨 소식이 있었어?”
“아닙니다. 궁에서 전해 온 소식은 없었지만… 금위군이 태자부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마음이 졸아붙은 춘산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게야?”
주묘서의 안색이 변했다.
“소인도 더는 모르겠습니다.”
춘산은 반쯤 얼이 나가 계속 도리질만 했다. 주묘서도 멍해졌으나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정사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지만 책에서만 봐도 금위군이 포위한 것이 어디 좋은 일일 때가 있던가!
주묘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났고, 춘산이 황급히 그녀에게 옷을 둘러 주었다.
“집사를 불러와라!”
사람을 부르러 가려는데 시종 하나가 들어와 주묘서 앞에 꿇어앉았다.
“측비 마마를 뵈옵니다.”
주묘서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너는 태자 전하의 심부름꾼 아니냐? 무슨 일이지?”
“전하가 떠나실 때 소인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금위군이 태자부를 포위할 것은 예상하고 계셨고, 며칠 내로 거사가 성사될 것이니 측비 마마께서는 걱정 마시고 황후가 되실 날을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뭐? 그 말이 모두 사실이냐?”
“물론입니다. 소인이 어찌 이런 일에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마마는 태자부에서 조용히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시종이 웃으며 대답하자 주묘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시종이 나가자 주묘서는 침상으로 돌아가 누웠다. 하지만 흥분한 탓에 잠을 잘 수 없어 춘산, 녹지와 함께 황후가 된 미래에 대해서 의논했다.
“며칠 후면 이 측비가 황후가 된다! 그러면 엽연채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겠어.”
주묘서는 차갑게 내뱉었다.
“맞습니다!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황제나 대신을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의 예를 올리게 해야 합니다.”
녹지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쳐 댔다.
그 시각, 금위군은 태자부와 정씨 집안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 부대를 각 조정 대신들의 집에 보내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며 유 재상首輔(내각의 대학사大學士)과 여지 등 권세 있는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조정 대신들은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금위군이 문을 두드리자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황급히 입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