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53화 (753/858)

제753화

“짐 때문이라고?”

정선제가 두려운 듯 묻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 때문이지! 짐이 잘못했다. 내 오늘 너를 의심하지 않았어야 한다. 너를 믿어야 했어. 짐이… 짐이 오해해서 억울한 게로구나. 짐이 좋은 아비가 되어 주질 못했다… 건아…….”

채결은 너무 놀라 눈물이 넘쳐흐르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맞습니다, 폐하가 진심으로 태자 전하를 의심하고 죄명을 내리시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습을 받아 놀라신 폐하를 저 여자가 이간질하는 바람에… 그저 한순간 잘못 생각하신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인지상정 아닙니까. 부부 사이든 부자 사이든 오해하고 싸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전하. 우선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꺼져라!”

태자는 매섭게 채결을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모두 나가라!”

“배은망덕한 놈……! 무얼 하려는 것이냐?”

정선제는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전하, 전하……!”

채결은 울면서 땅에 엎드렸다.

“평생 후회할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방금 일은 오해일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황후 마마의 설명을 듣고 마마를 믿지 않으셨습니까? 소인에게 황후 마마가 얼굴을 씻을 물을 대령하라고도 하셨습니다. 황후 마마, 말씀 좀 해 주십시오……!”

하지만 온순하고 따듯하던 정 황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독살스러운 눈으로 냉소했다.

“너 같은 고자 녀석도 쓸데가 있구나. 그러면 너는 남고 나머지는 모두 나가라!”

방금 전까지도 성심을 다해 해명하고 설득하던 모습은 그저 정선제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리 해명하고 만회하려 노력한다 해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대세는 기울어졌다! 시위를 떠난 활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전진뿐이다!

침궁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정 황후의 행동은 태자가 이미 작정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늘 온순하고 부드럽던 정 황후에게서 이렇게 표독스러운 모습을 본 건 누구든 처음이었다.

“뭘 하려는 거냐?”

정선제는 노여워서 이를 악물고 태자를 노려보았다.

“뭘 하다니요?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당연히 아바마마의 황위를 내놓으라 하려 온 것이지요!”

태자는 험악한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상관수는 새파래진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 태자가 정말 어좌를 찬탈하려는 것인가?

“으아아악!”

정선제가 갑자기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태자가 정선제의 목에 대고 있던 잠을 깊숙이 밀어 넣자 울컥울컥 피가 솟구쳤다.

“폐하!”

혼비백산한 상관수와 채결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나가라! 나가!!”

정선제는 너무 아파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하면 이 잠이 그의 목을 쑤셔 버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상관수가 손을 모으고 창백한 얼굴로 물러갔다.

채결 곁에 있던 등진수와 환관 두 명은 허겁지겁 빠져나간 지 오래였고 나 의정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소자금은 두 환관이 끌고 나갔다.

방 안에는 다섯 사람만 남아 있었다. 태자, 정 황후, 정선제, 채결 그리고 이계였다.

“전하…….”

채결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 정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계, 창과 문을 닫고 잠가라.”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이계가 황급히 나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상관수는 굳은 얼굴로 아직 문밖에 서 있었다. 달빛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이계는 쿵쿵거리며 모든 문을 닫고 굳게 걸어 잠갔다. 창문이란 창문도 전부 닫았다.

이계는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뛰어 들어갔다.

“전하, 모든 창을 닫아걸었습니다!”

“저 고자 놈을 의자에 묶어라.”

정 황후가 지시했다. 이계는 ‘고자’라는 말에 반감이 들었지만 묵묵히 의자를 하나 끌어와 채결을 묶었다. 정선제는 모자가 함께 의자에 묶어 두었다.

태자는 차가운 눈으로 정선제를 쳐다봤다.

“아바마마! 양위 칙서를 쓰십시오!”

정선제는 이미 다른 얼굴로 변해 있었다.

“이 역적! 짐이 얼마나 네게 후히 대접해 줬는데 어찌 이러는 것이냐! 모두 오해라고 하지 않았느냐! 황후의 설명을 듣고 짐도 너를 믿기로 했단 말이다!”

“믿음?”

태자가 비웃었다.

정선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리 말하면 태자가 자신을 용서한 줄, 다시 믿고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줄 알았다. 한데 태자는 차갑게 웃더니 그 수려한 얼굴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는 게 아닌가.

“본궁에게는 당신의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소자금의 말은 모두 사실이니까. 내가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소자금 저 천한 것이 경거망동하다 실패하고 본궁의 지시를 실토할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정선제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정선제는 이번 소동으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태자를 아끼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게 될까 봐 태자도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자금의 말이 사실이라니, 태자가 자신을 없애려 모의를 했다니!

짐을 죽이려 했다고! 정선제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태자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키운 아들, 가장 아끼고 사랑한 아들이다. 자신은 자애로운 아버지였고 태자는 효성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런데… 설마… 어떻게……!

정선제는 정 황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황후……!”

온순하고 다정하던 정 황후는 냉혹한 표정으로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폐하… 당신은 늙었으니 이제 양위를 하셔야죠. 자, 태자가 벌써 서른입니다. 위풍당당한 제왕의 자질을 갖췄는데도 폐하는… 이미 반쯤은 무덤에 묻혀 능력도 없는데 왜 아직도 황위에 연연하십니까?”

정선제는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고 그 하는 양에 태자는 되레 차갑게 웃었다.

“지난번 중병에 걸렸을 때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소자가 아주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정선제는 피를 토할 뻔했다.

“이 역적……! 짐이… 짐이 너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그토록 많은 아들 중에서 언제나 너를 가장 아꼈는데 네가 감히……!”

“저를 아껴 주었다면 왜 다시 살아왔습니까?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요양이나 할 것이지 왜 황위를 놓지 못하는 겁니까?

거기까진 그렇다고 칩시다. 대신들의 마음을 얻고 싶다고 이 나이에 수녀 간택을 한단 말입니까? 아바마마, 거울을 좀 보십시오. 대신들 모두 당신이 진작에 황위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다들 목이 빠져라 새 황제를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수녀들도 아바마마에게 치를 떨고 있습니다. 늙고 추한 황제,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하고 옷 속에 감춰진 고목 껍질처럼 쭈글거리는 몸을 보면 수녀들은 놀라서 목숨이라도 끊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염치로 수녀를 간택한단 말입니까?”

태자는 주묘서가 잠자리에서 정선제를 조롱하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정선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수치스러워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이 금수만도 못한 놈아! 수녀를 간택하더라도 짐의 마음은 언제나 너에게 있었다. 네가 황태자이고, 앞으로의 황제는 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냐! 어떻게 이 지경을 만들 수가 있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까요! 아바마마가 다시 이삼십 년을 더 살면 어쩐단 말입니까? 저는 노년에 황위에 오르고 싶은 게 아닙니다!”

미칠 듯이 화가 난 정선제는 고개를 돌려 정 황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황후……! 태자가 이토록 불효하는데 당신이 타이르지는 못할망정, 어찌 당신도 같이 그런 극악무도한 마음을 품은 거요? 당신은 짐을 정말 많이 사랑했잖소……! 정씨 집안에서 당신을 정혼을 시켜 주었어도 당신은 그걸 마다하고 물렸지. 그러다 짐은 소 황후를 맞이했고… 당신도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잖소……!”

당시 정선제는 그저 이름 없는 황자였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소씨를 알게 되었다.

소씨는 자신을 약골이라 놀리면서 검과 활을 쓰는 법, 말을 부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새 감정이 싹텄고 그때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소씨를 아내로 맞을 수 있다면 그게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일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순조롭게 정혼하고 혼사를 준비했다. 한데 좋은 일은 쌍으로 온다고, 당시 정씨 집안 이소저였던 정 황후가 남몰래 자신을 연모해 왔다며 고백을 한 것이다.

그때 겨우 쇠락한 황자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였는데 어디서 그런 경험을 해 보았겠나! 예전에는 늘 이 세상에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은 소 황후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씨가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남몰래 자기를 연모하는 여인이 있었을 줄이야.

소 황후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도 너무나 놀라운 일이지만, 정씨 집안 이소저의 출현 역시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때 제일 사랑하던 이는 소씨였고, 온 마음이 그녀를 향해 있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씨 집안 이소저의 고백을 거절했다.

그리고 소씨와 혼인했고, 이후엔 정씨 집안 이소저도 마음을 접고 혼인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정혼도 물리고 오랫동안 혼사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녀가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깜짝 놀랐었다.

그 소식을 접하자 소씨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매력에 도취해 버렸다. 자신에게 거절당한 여인이 아직도 오매불망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니!

혼인 후 자신의 지위는 크게 올라 태자의 자리에 올랐고, 결국 가장 존엄한 자리인 황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소 황후, 그리고 소씨 집안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소 황후 앞에서 수치와 낭패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소씨 집안은 언제나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을 황제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그들 앞에 서면 자신은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었다.

그때, 대신들이 비빈을 들이라 간언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여인이 바로 정씨 집안 이소저였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바보처럼 자신만 사랑하는 여자.

하여 중신들의 딸들을 궁에 들이면서 정씨 집안 이소저도 포함했다. 그리고 그녀를 귀비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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