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0화
정선제의 얼굴이 경련하고 또 경련했다. 소자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예리한 바늘처럼 그의 심장을 찔러, 못 견디게 노엽고 수치스러웠다.
정 황후는 벌써 벌떡 일어나 소자금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네 이년, 무슨 요망한 소리냐! 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을 누굴 탓하느냐. 수녀들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데!”
소자금은 비웃는 듯 정 황후를 보았다.
“죄송하게 됐네요, 황후 마마 그리고 태자 전하……. 신첩더러 내일 공격하라고 하셨지만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 추하고 늙은 사람에게 능욕당할 생각을 하니 구역질 날 만큼 역겨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 늙은이가 나를 욕보이려고 하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망쳐 버렸어요……. 하지만… 어쨌든 제 소원은 이룰 수 있겠군요…….”
그녀는 섬뜩한 표정으로 정 황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정 황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소원을 이뤘다? 듣고 보니 분명 그랬다. 그녀의 소원은 소씨 집안과 칭주 지부가 망하는 거였으니까. 황제 시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죄명만 정해지면 소씨 집안과 칭주 지부 모두 꼼짝없이 오라에 붙잡힐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태자라는 것을 알았지? 정 황후는 머릿속이 하얘져 정신이 나갔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정선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말이냐? 누가 내일 공격하라고 했다는 말이냐? 누가 시켰다고?”
“태자요!”
소자금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입 닥치거라!”
정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선제도 믿지 못하는 얼굴로 버럭 노성을 쳤다.
“당치도 않다!”
‘태자’라니? 정선제는 ‘터무니없다’, 이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태자가 얼마나 효심이 깊은데…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진심을 다해 태자를 아꼈는데……. 자신은 지금껏 태자를 위해 앞길을 닦았고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처음 억지로 끌려와 입궁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어찌 감히 황제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보름 전 제가 상심하여 어쩔 줄 몰라 할 때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저를 꾀더군요. 황제를 시해하면 소씨 집안과 칭주 지부 모두 끝장이라면서요.
그러더니 그다음에 또 찾아와 처음 시침하는 날은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고 무기도 없으니 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 첫날은 참으라 했습니다. 다음 날 밤 황후가 제게 궁전을 배정해 주면 황제가 내 처소에 와서 잠들 테니, 그 틈을 타 찔러 죽이라고 방법도 잘 알려 주었지요.”
정선제, 채결 그리고 상관수 모두 숨을 들이켰다.
정선제는 믿지 않았지만 점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소자금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태자라는 것을 어찌 아느냐?”
소자금이 깔깔댔다.
“왜냐면… 나도 머리가 있거든요! 스스로 본왕이라고 부르지만 황제를 죽인다고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황제가 죽으면 제일 덕을 보는 사람은 태자, 아니 오직 태자뿐이지요! 바로 즉위할 수 있으니까요.”
정선제는 어지러워 정 황후를 쏘아보았다.
“폐하.”
정 황후는 털썩 꿇어앉아 울기 시작했다.
“폐하……! 억울합니다. 태자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 여자를 보십시오, 폐하. 입을 열 때마다 태자를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분명 삿된 저의가 있는 것입니다.”
정선제 또한 이를 믿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려 반역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소씨 집안이고 양왕이어야 했다. 반면 정씨 집안과 정 황후, 태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선택이 어떻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정 황후의 말대로 소자금의 목적이 너무 뚜렷해 보였다. 번번이 태자를 물고 늘어지니 확실히 의심스러웠다.
“당신들 부자가 똑같이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웠으니까요.”
소자금은 강렬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아주 역겨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지요. 내가 정말 황제를 죽였다면,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처음에는 개의치 않았지만 지금은… 기왕 입을 열었으니 나도 그쪽을 돕지 않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건 무슨 뜻이지?’
소자금은 태자의 음탕한 눈빛을 똑똑히 읽었다. 그의 속내는 일단 자신을 이용해 황제를 없애고 본인이 황제가 되면 자신을 취해 욕보이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개의치 않았었다. 어차피 정선제 이 노친네에게 욕보여질 몸.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고 자신은 목적을 달성했다. 자신이 무엇을 어찌 계획했든지 정선제는 소씨 집안과 칭주 지부를 곱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니 내친김에 꼴도 보기 싫었던 태자까지 일러바친 것이다.
정 황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태자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나? 게다가 그 마음을 드러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 여자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
“폐하……! 폐하, 태자가 얼마나 폐하께 효심을 다하였는데요. 설마 폐하께서 이를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자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폐하는 온 마음을 다해 살펴 주시고 저희 모자를 아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가 대역죄를 짓겠습니까!”
정 황후는 바닥에 엎드려 읍소했다.
“폐하 마음속에는 오직 태자 하나뿐이었고, 늘 그 아이만이 태자였습니다. 태자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폐하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정선제는 잠시 멍해졌다. 태자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일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태자에게 얼마나 마음을 쏟았는데 그 아이가 어떻게…….
그러나 정선제가 회상에 채 잠기기도 전에, 소자금이 다시 한번 깔깔댔다.
“황후 마마, 지난번 그림 일을 기억하십니까?”
정 황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안색이 변했고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슨 그림 말이냐?”
정선제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닷새 정도 전에 황후 마마가 갑자기 저희를 봉의궁으로 불러들였지요. 그때 진서후 부인과 주 측비도 자리에 있었어요. 황후 마마께서 주 측비, 진서후 부인과 가 채녀에게 각각 자신의 부군을 그림으로 그리라 시키시더군요. 주 측비는 태자를, 진서후 부인은 진서후를 그렸고, 가 채녀는 황제 폐하를 그렸지요.”
정선제와 채결은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 정 황후를 응시했다. 황제의 용안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정 황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변명을 늘어놨다.
“폐하, 신첩은 가 채녀가 그림을 잘 그린다길래 폐하의 용안을 그려도 된다 허락한 것입니다. 다 그린 후에 폐하께 선물로 드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 그림은?”
그러나 정선제는 들으면 들을수록 정 황후가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다 그렸는데 곽 마마가 그림을 걷은 후에… 신첩이 감상하다 그만 차를 엎질러 그림을 망쳐 버렸습니다.”
“마마는 당연히 없애 버리셨겠지요. 감히 그 그림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진서후 부인과 주 측비 모두 각자의 부군을 그렸었어요. 태자 전하는 준수하고 우아한 데다 기품 있는 모습이 일국의 제왕다웠습니다!”
정선제의 흐린 눈이 한층 가라앉더니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이……!”
정 황후는 ‘일국의 제왕’다운 모습이라는 말을 내뱉는 소자금을 막으려 했지만, 정선제가 소자금을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기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소란을 피울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막으려 할수록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진서후 초상화에서는 소년 장군의 패기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았죠.”
소자금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모든 수녀들의 마음이 술렁거렸지요. 그토록 잘생기고 고귀한 남자를 누가 마다하겠어요. 그리고 다음 순간, 족자에서 황제의 초상화가 펼쳐질 때는… 정말이지… 쯧, 정말 똑같이 그렸더군요! 주름 하나도 모자라지 않게! 초점 없이 흐릿한 눈, 늙어서 굽은 등, 초상화를 펼치자마자 수녀들 모두 깜짝 놀랐어요.”
정선제는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고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결, 상관수, 등진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 황후를 바라보았다. 정선제를 제아무리 미화해 그린대도 앞선 두 젊은 미남은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도 기어이 그들의 초상화를 한데 모아 놓았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든 정선제는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몰라서 그랬을까?
“헛소리 말아라!”
정 황후가 벌떡 일어나더니 휘청거리며 나아가 소자금에게 삿대질을 해 댔다.
“본궁… 본궁은……!”
정 황후가 이 일에 동의했던 것은 이것이 배수의 진이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단칼에 정선제를 죽일 것이고, 그가 죽으면 이 세상이 태자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이 일을 추궁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황후!”
정선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불렀다. 그는 진심으로 정 황후가 왜 세 사람의 그림을 한데 모아 놓았는지 묻고 싶었다. 자신에게 망신을 주고 싶었던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나.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태자나 주운환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격이었다. 황제로서의 아량도 없어 보일 것이었다.
“신첩, 신첩은…….”
정 황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깊이 심호흡을 한 후에야 정선제를 향해 절을 했다.
“신첩은 그저… 폐하의 초상화를 그린 지도 오래됐고, 태자도 한참이나 초상화를 그리지 않은 데다 주 측비가 서로의 부군을 그리면 되는 것 아니냐며 조르길래 그리하게 해 준 것입니다. 신첩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초상은… 영명하고 위풍당당한 그림이었습니다. 어찌 태자나 진서후처럼 솜털이 난 젊은이들에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
정선제는 잔뜩 굳은 얼굴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자신이 소인배처럼 보일 것이니 함부로 성을 낼 수도 없었다.
정 황후는 냉랭한 표정으로 소자금을 노려보았다.
“이 천한 계집, 무슨 헛소리냐! 본궁이 그림을 그리라 한 것은 진심으로 폐하와 태자에게 그림을 그려 드리고 싶었던 것일 뿐인데 어째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냐!”
“후후. 마마의 저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수녀들도 황제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는데 그 그림을 보고 나서는 누구도 그렇지 못하더군요. 마마께서 이렇게 될 줄 모르셨을 리도 없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네, 저를 자극하기 위해서셨겠죠. 제가 권력에 눈멀지 않도록, 그래서 당신들 대신 황제를 죽이게 부추기려고요.”
정선제의 눈꺼풀이 계속 파르르 떨렸다. 정 황후가 뭔가 잔뜩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속에 의심이 끝없이 샘솟았다.
“상관수, 태자를 궁으로 불러라.”
상관수가 흠칫 떨더니 바로 손을 모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