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9화
“무슨 말이냐?”
잠옷 바람으로 뛰어나온 정 황후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공격했다고? 내일 하기로 한 것 아니었더냐?”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홍앵이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찰나,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정 황후가 내다보니 채결이 환관과 궁녀들과 함께 등불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정 황후의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창백한 얼굴의 채결이 다가왔다.
“황후 마마, 황제 폐하께 사고가 생겼습니다.”
정 황후는 굳은 얼굴로 모르는 척했다.
“무슨 일인가?”
“소 보림이 폐하를 찔렀습니다!”
채결이 이를 악물었다.
“뭐라고?”
사 마마는 빠르게 옷장을 뒤져 정 황후에게 윗옷을 덮어 주었다.
정 황후는 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엉망진창 산발이 된 머리를 손볼 겨를도 없었다. 내딛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채결은 정 황후 곁에서 상황을 알려 주었다.
“오늘 저녁은 소 보림이 시침하는 날이었습니다. 등진수가 소 보림을 검사할 때는 어떤 무기도 없었습니다. 소 보림은 폐하의 침궁에 들어가 폐하와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술 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지요. 소 보림이 그걸 줍고 있으니 폐하께서 바로 말리셨고, 소인이 대신 주웠습니다.
그런데 소인이 나오고 얼마 후 방에서 폐하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인이 사람들과 들어가 보니 보림이 피범벅이 된 사기 조각을 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 깨뜨린 주전자 조각이었습니다. 폐하는 가슴을 찔리셔서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이 바로 소 보림을 제압하고 마마께 찾아온 것입니다.”
정 황후는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소자금 이 망할 것. 어찌 이리 경거망동했단 말이냐! 내일 저녁이라 했을 텐데!
정 황후는 머릿속이 하얘졌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자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니라고 말했거늘. 무기도 없이 늙은이를 어떻게 죽인단 말이냐? 그까짓 사기 조각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정말 공격하려면, 정말로 사기 조각을 쓰려면, 적어도 사람이 깊이 잠든 후에 찌를 것이지! 정선제의 얼굴에 대고,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 사기 조각으로 찌르는 건 무슨 미친 짓인가? 현장에서 그대로 잡혔다니! 세상에!’
정 황후는 격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다행히 예방책이 있었다! 적어도 이 일은 소자금 혼자 원한을 품고 벌인 일이고, 누군가 정말 그녀를 부추겼다 해도 그것은 양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내일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한동안 심혈을 기울여 노력한 것이 백지가 되다니!
정 황후는 사 마마와 함께 환하게 등을 밝힌 정선제 침궁 앞에 도착했다. 정 황후가 황급히 침궁에 들어서자 한 여자가 건장한 환관들에게 단단히 붙잡혀 바깥채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내굽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미동도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정 황후는 소매를 세차게 흔들며 그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정선제가 침상에 누워 있었고 나 의정과 환관 몇이 그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폐하!”
정 황후가 눈물을 짜내며 한걸음에 정선제에게 달려갔다.
“폐하… 어찌 이런 일이……!”
파리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던 정선제가 정 황후를 보자 감정이 격해져 손을 내밀어 황후의 손을 꼭 잡았다.
“짐, 짐은… 저 천한 것……!”
증오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 의정은 황제의 상처를 동여매며 남몰래 그를 노려보았다. 부상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저 작은 상처였다.
당시 채결을 비롯한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자 정선제는 소자금을 품을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소자금의 얼굴은 그저 창백할 뿐이었다. 그러다 정선제가 갑자기 가슴에 짜릿한 통증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보니 저 가냘픈 미모의 수녀가 사기 조각으로 그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정선제가 아파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자 소자금은 흉악한 얼굴로 다시 덤벼들었다. 그러나 채결과 사람들이 들어와 바로 그녀를 제압했다.
정선제는 가슴이 너무 아파 침상에 쓰러졌다. 곧 나 의정이 불려 오고 정 황후도 도착했다.
“의정, 폐하의 이 상처는……!”
정 황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심하십시오, 마마. 폐하는 놀라신 것뿐입니다. 근골이나 내장은 상한 데가 없으니 며칠 쉬시면 완전히 회복하실 겁니다.”
정 황후는 너무나 원통했다. 목숨을 빼앗기는커녕 고작 며칠이면 나을 상처를 입혔을 뿐이라니!
“그렇다면 신첩은 안심입니다.”
정 황후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정선제를 바라봤고 정선제는 가슴이 뜨거워져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폐하, 금위군 통령 상관수와 경사방 총관 등진수가 왔습니다.”
밖에서 환관이 외치기 무섭게 범 같은 정선제의 눈이 번뜩이더니 차가운 목소리가 침궁을 울렸다.
“모두 들여보내라! 그리고 저 천한 것을 이리 끌고 와라.”
놀란 정 황후가 정선제의 가슴을 살짝 토닥였다.
“폐하…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심문은 나중에 다시 하시지요.”
“아닐세!”
정선제가 매섭게 소리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끌고 와라!”
정 황후는 창백하게 질린 채,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소리에 이어 상관수와 등진수가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특히 상관수는 쉼 없이 구슬땀을 떨구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두 사람이 엎드려 절을 했다.
정선제는 차갑게 상관수를 노려보았다.
“수녀를 간택할 때 짐이 간택장을 감시하라 시켰는데 감히 자객을 궁에 들여보냈으렷다!”
상관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급히 궁으로 소환당할 때 소식을 전하러 온 환관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상관수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공수하고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장이 당시 진서후와 함께 간택장으로 감시하였으나 분명 의심이 가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주운환을 끌어들여 조금이라도 죄를 덜고 싶었다. 상관수의 예측대로 진서후가 거론되자 정선제는 바로 호통을 치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렸다.
“그리고… 소장과 진서후는 모두 무예를 익힌 사람들인지라 무예를 수련한 자객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만… 소 보림은 무예를 수련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관수가 변명을 이어 갔다. 정말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소자금은 무예를 모르는 사람이고, 그들의 임무는 무예를 수련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정선제의 차디찬 시선이 이번엔 등진수를 향했다. 등진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소인, 소인은… 소 보림에게서 무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등진수가 맡은 일은 그저 몸 검사를 한 후 황제에게 인도하는 일이고, 그때 소자금은 정말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둘을 더 추궁할 수 없어진 정선제는 헛기침을 하며 소자금을 찾았다.
“그 망할 것을 끌어다 짐 앞에 대령해라.”
정 황후는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봤다. 이제 자신은 현명한 부인의 역할을 잘 연기해야 했다. 해낼 수 있을 터였다. 소자금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해도 그 자신의 주장에 불과하고, 배후도 양왕으로 꾸며 놓은 후였으니까.
밖에서 잡일을 담당하는 환관이 명령을 듣고 소자금을 데려와 정선제 앞에 무릎 꿇렸다.
“소 보림, 네 감히… 황제 폐하를 다치게 하다니!”
정 황후가 소리쳤고 정선제는 음산한 눈빛으로 소자금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낸 것이냐.”
뜻밖에도 소자금은 고개를 들고 정선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선계의 여인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지만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나는 진작에 정혼한 몸이었어요! 염치도 없는 당신 같은 늙은이가 기어이 수녀 간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부와 내 아비도 나를 도성까지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범 오라버니도 죽지 않았을 것이에요! 당신들을 증오해!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정선제는 그대로 얼어붙어 수염까지 덜덜 떨렸다.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자신은 황제다! 이 세상 최고로 고귀한 남자! 이 세상 모든 여인이 그의 발밑에 엎드려야 한다. 정혼자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자신이 수녀를 간택하겠다면 이 땅의 모든 여인이 정혼자를 버리고 그 품에 안겨야 했다.
‘그런데 소자금은 정혼자를 잊지 못해 짐을, 황제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정선제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큰 충격을 받아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런 천한 것!”
소자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뼛속 깊이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세상 어느 자객이 이 정도로 멍청하겠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 같으니! 당장 가서 쳐 죽여라.”
채결이 소리쳤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소자금은 한껏 비웃음이 담긴 시선으로 정선제를 노려보았다.
“나만 당신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정혼자가 없었더라도 저 수녀들 중에 당신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무슨 소리냐?”
소자금이 코웃음을 치더니 정선제를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여든 정도 되었나요?”
정선제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이제 겨우 예순다섯이다! 예순다섯!
채결이 또다시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요망한 것! 폐하는 이제 환갑이시다! 어디서 팔순이란 말을 꺼내느냐!”
“하!”
소자금이 더 크게 비웃었다.
“하하, 딱 팔순처럼 보이는걸요. 폐하, 그렇게 늙어서 기어이 궁에 수녀들을 끌고 들어와야 했나요? 하나같이 꽃다운 나이의 소녀인 우리들 중 누가 염치도 없는 노인네를 원하겠어요?
폐하가 태자 전하인 줄 아세요? 다 늙어서 왜 아직까지 태자 전하에게 양위를 하지 않는 거죠? 잘생기고 젊은 새 황제의 비빈이라면 수녀들 모두 목이 빠져라 원할 텐데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추한 늙은이에게 바쳐졌으니…….”
그녀의 조소에 침궁 전체가 한겨울 얼음 동굴이 되어 버렸다.
나이 든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상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개 노부老夫가 아니라 지고지상한 황제였다! 당연히 어느 때고 간에 사람들 앞에서 체통 있고 위풍당당하게 보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정선제는 정말 늙었다. 노인들 중 젊음을 갈망하고 젊은이를 질투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되랴. 그리고 그의 앞에는 수려하고 기품 있는 남자로 장성한 젊은 태자가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그를 대신하려는 듯이.
하지만 모두들 이 어두운 면을 숨겼다. 그런데 지금 소자금이 그 비밀을 밝은 태양 아래 버젓이 꺼내 놓은 것이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민망하고 놀라워서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