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48화 (748/858)

제748화

등진수가 정선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하하.”

정선제는 정말 오랜만에 경사방 사람을 보니 흐뭇하고 반가웠다.

“등진수, 오랜만에 보는구나.”

“정확히 13년 만입니다. 폐하께서 소인을 기억해 주시니 정말 영광이옵니다.”

등진수는 웃으면서 정선제를 향해 쟁반을 올려 들었다.

정선제는 쟁반을 한번 죽 살펴보았다. 박달나무에는 저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봐도 누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정말 아름답고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맞다, 그래서 그 여인을 보림에 봉했었지!’

그 수녀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했다. 첫눈에 마음에 들어 제일 먼저 그녀에게 성은을 내리겠다 마음먹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보림에 책봉한 것이었다.

“이걸로 하지!”

정선제는 허허대며 정중앙에 있는 목패를 가리켰다. 목패에는 소자금(보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정 황후는 자신이 나서서 운을 띄워 주거나 부추길 필요도 없이 정선제가 바로 소자금을 선택하는 것을 보고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하나 첫날밤에는 움직여선 안 된다. 다음 날 아침 자신이 직접 소자금이 지낼 궁을 정해 줄 것이고, 그 밤에 정선제가 소자금의 처소로 행차하면 그때가 제대로 손을 쓸 수 있는 기회다! 정선제가 깊이 잠든 틈을 타 소자금이 찔러 죽이면 된다!’

황궁 전체가 요동칠 것이고, 자신은 바로 범인을 잡을 것이다. 정선제가 죽으면 태자가 장례를 치르고 보위에 오를 것이다. 황제가 된 태자는 정선제가 나이가 들어도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무리하게 수녀를 입궁시켰다가 앙심을 품은 수녀에게 시해된 것이라고 발표할 것이다.

‘하, 소자금도 대단한 열녀구나. 때가 되면 본인의 소원대로 소씨 집안과 칭주 지부의 구족을 멸하여 그 영혼을 위로할 것이다.’

생각에 잠긴 정 황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왜 웃는 거요, 황후?”

정선제는 물으면서도 눈앞의 패들을 몹시 아까운 듯 바라보았다. 한 번에 하나밖에 고르지 못하는 게 아쉽기라도 한 양.

정 황후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신첩은 폐하의 안목이 어찌나 높으신지 단번에 소 보림을 택하시길래 웃었습니다. 지난번 신첩이 수녀들을 불러다 지켜보니 소 보림의 미색이 가장 뛰어나고 궁중 법도도 제일 잘 익혔습니다.”

“그렇소? 하하하!”

정선제가 얼마나 기뻐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벌써 오시입니다. 사 마마, 어서 어선을 준비해라.”

“네.”

사 마마가 나가고 등진수와 경사방 사람들도 모두 물러갔다.

곧 정 황후와 정선제가 식탁에 앉았다. 정 황후는 탕을 정선제 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호편탕虎鞭湯(호랑이 생식기로 만든 탕)입니다, 폐하. 어서 잡수세요.”

“호편탕? 좋지, 좋아!”

정선제는 눈을 번쩍이며 단숨에 마셨다. 식사를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정선제가 돌아간 후, 정 황후는 급히 홍앵을 찾았다.

“수원 쪽은 어떠냐?”

“안심하십시오, 마마.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소인이 지켜보니 소 보림은 불쑥불쑥 살의와 증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달을 보며 한참을 슬퍼했습니다. 그런데도 소인에게는 입도 뻥긋 않는 것이 큰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큰 치욕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니 분명 황제 폐하께 손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정 황후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 저녁, 어두운 데서 지켜보고 있어라. 소 보림이 차마 손을 쓰지 못하면 네가 죽여라!”

그때는 누가 죽였대도 상관없다. 황제가 소자금의 궁에서 죽었다면 곧 소자금이 죽인 것이다. 홍앵을 대기시켜 놨으니 이젠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것이었다.

한편, 정선제는 봉의궁에서 나와 자신의 침궁으로 돌아갔다. 보통 이 시간이면 나 의정이 정선제에게 침을 놓고 약을 올리곤 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나 의정은?”

정선제가 용상에 앉아 묻자 채결이 웃었다.

“잊어버리셨습니까, 폐하. 오늘부터 폐하는 침도 약도 필요 없으십니다.”

정선제가 껄껄 웃었다.

“참, 짐이 잊어버렸구나. 하나 매일 보다 보지 않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바둑이나 두게 가서 의정을 좀 불러오거라.”

“알겠습니다.”

채결이 나가서 나 의정을 불러왔고, 나 의정은 여느 때처럼 정선제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정선제는 마음을 다잡으며 바둑에 집중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온통 수녀들로 가득하니 어떻게 해도 집중할 수 없었다. 정선제는 내리 몇 판을 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 시각, 봉의궁을 떠난 등진수가 수원에 도착했다. 수녀들은 여전히 법도를 배우고 있었으나 오늘이 교육 마지막 날이었다.

등진수가 들어오자 곽 마마가 웃으며 다가갔다.

“등 공공, 일찍 오셨네요. 내일이나 오실 줄 알았는데요!”

“소 보림이 누구지요?”

등진수도 웃으면서 대꾸했다. 물으면서 수녀들을 쓱 봤는데, 그중 특별히 아름다운 여인이 있기에 그녀가 소 보림이겠거니 바로 짐작했다.

“소 보림, 빨리 안 오고 뭐 하십니까. 채녀들도 인사하십시오. 이분은 등 공공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지내게 될지는 이분을 얼마나 자주 뵙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호호호.”

소자금이 앞으로 나왔다.

“공공.”

등진수는 소자금을 훑어보았다.

“듣던 대로 꽃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소 보림. 황제 폐하께서 패를 뒤집으셨습니다. 내일 저녁 봉란춘은차鳳鸞春恩車(황제가 비빈과 시침할 때 비빈을 황제의 침궁까지 데려가는 전용 마차)가 보림을 모시러 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계십시오.”

소자금도 놀랐지만, 주변의 채녀들은 더더욱 놀라 숨을 크게 쉬었다. 그녀들도 이제 법도를 다 배워 봉란춘은차가 뭔지 알았다. 비빈이 처음 시침할 때에만 사용하는 마차, 그 비빈을 황제의 침전으로 데려가는 마차인 것이다.

“어서 감사드리십시오.”

곽 마마가 웃으며 소 보림을 살짝 앞으로 밀었다. 소자금은 얼음장 같은 얼굴을 숙이고 예를 행했다.

“신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등진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준비 잘하십시오, 보림!”

“네.”

소자금은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눈은 차갑게 빛났다.

* * *

진서후부.

엽연채는 뜰에 서서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혜연은 그녀가 곧 일어날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무거운 그녀가 오래 서 있게 둘 수는 없었다.

“마님, 염염이 보러 진씨 가문에라도 가 보시지요. 아기가 참 귀엽던데요.”

혜연의 말에 엽연채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아……. 오늘은 나가고 싶지 않구나.”

혜연은 작게 한숨을 쉬고 그녀를 다독였다.

“마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꼭 성공할 거예요.”

“그래.”

엽연채가 숨을 깊이 들이쉬는데, 여한이 서신을 들고 황급히 다가왔다.

“마님. 오늘 온 서신입니다.”

엽연채가 반가워하며 서신을 받아 열자 이 한마디만이 쓰여 있었다.

「도성으로 돌아갑니다.」

엽연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속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 * *

무딘 톱으로 나무를 베듯,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여럿이 안달복달하는 사이에 드디어 사월 초하루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월, 꽃샘추위도 지나고 따뜻한 바람과 붉은 태양을 맞이하는 계절이었다.

엽연채는 해당화가 그려진 연청색 짧은 홑옷을 입고 얇고 하얀 바탕에 푸른 매화 무늬의 학창鶴氅을 걸친 채 정원 해당화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혜연이 화차와 간식을 가져왔다. 그러나 엽연채는 물론 혜연도 좌불안석이라 두 사람 다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그 시각, 궁 안.

조회가 끝나고 태자는 봉의궁에 들어가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어마마마, 소자금 쪽은 문제없겠지요?”

“그럴 리가 없다. 홍앵 말이 소자금의 결심이 아주 굳다 하더구나. 내일 네 아바마마에게 또 그 아이를 뽑게 할 것이니 바로 내일 저녁이다! 오늘은 돌아가 기운을 비축해 둬라!”

“네.”

태자는 정 황후와 이야기를 잠깐 더 나누다 바로 떠났다.

그러나 이들 모자보다 마음이 급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정선제였다.

얼굴까지 붉게 상기된 정선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장계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으니 나 의정을 불러다 바둑을 두기도 하고, 봉의궁에 가서 앉아 있다가 어화원을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춰 버린 양, 날이 통 저물지를 않았다.

그래도 그가 기다려 마지않는 시간이 조금씩 다가와 마침내 해가 졌다.

정선제는 침궁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혼례를 치르는 어린 신랑처럼 신이 나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목욕도 해치운 다음 침궁에서 미인을 기다렸다.

그 시각, 수원.

시침하기 전까지 모든 수녀들은 이곳에 머문다. 시침을 한 다음 날 정식으로 자신이 머물 궁을 배정받게 된다. 수녀들이 시침을 잘하면 바로 품계가 몇 등급이나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해시亥時(밤 9시~11시) 삼각. 수원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리더니 화려한 등불을 밝힌 마차가 수원 밖에 멈춰 섰다.

수녀들 중 누구 하나 자는 이가 없었다. 다들 살짝 창문을 열고 조용히 밖을 내다봤다.

등진수가 환관 네 명을 데리고 소자금의 방으로 들어가 그녀를 둘러싼 이불을 들고나왔다. 이불을 마차에 올려놓자 마차는 다시 덜컹덜컹 온 길을 돌아갔다.

봉의궁.

정 황후가 평상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는데 사 마마가 입을 열었다.

“늦었습니다, 마마. 어서 쉬십시오.”

정 황후는 손에 든 자수를 내려놓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계속 본궁의 마음이 심란하구나.”

“오늘 밤은 행동을 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시침하는 날입니다. 조금씩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마마께서 긴장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 그래도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침상에 누워 쉬시지요.”

“그래.”

정 황후는 사 마마의 손을 잡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침상에 들었다.

요 며칠 신경을 너무 썼는지 꽤 피곤했던 차였다. 정 황후는 침상에 눕자 몽롱하니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정 황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고 바깥을 지키던 사 마마도 즉시 자리를 떨쳤다.

“누구냐?”

“사 마마……!”

밖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홍앵이었다. 방금의 굉음은 겁에 질린 홍앵이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홍앵? 오늘 밤은 소 보림이 시침하는 날이니 폐하의 침궁 밖에서 시중을 들라 하지 않았더냐?”

사 마마가 미간을 찌푸리자 홍앵은 한층 사색이 되어 털썩 꿇어앉았다.

“소 보림이… 황제 폐하를 공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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