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47화 (747/858)

제747화

점심 식사 후, 엽연채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주운환에게 서신을 썼다. 고모가 사랑스러운 딸을 낳았다고 알리는 서신 말미 낙관에 날짜를 쓰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며칠이지?”

“삼월 스무여드레예요.”

옆에서 먹을 갈던 혜연이 알려 주자 엽연채는 날짜를 쓰며 물었다.

“간택은 삼월 열흘날에 시작했지?”

“네. 삼월 열흘날 간택을 시작해서 열여드레날에 칙선을 마쳤으니 열흘 지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름 동안 법도를 배우는 거지? 이제 거의 다 배웠겠네.”

엽연채가 붓걸이에 붓을 걸며 말하다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시기가 됐으니 이제 궁에서도 행동을 시작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각, 엽연채뿐 아니라 황후와 태자 역시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봉의궁에 다녀온 후, 수녀들 사이의 분위기는 전만큼 밝지 않았다.

홍앵은 소자금의 상태를 매일 확인했다. 소자금이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면 일부러 정혼자와 함께 먹었을 칭주의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그녀를 자극했다. 이러한 물밑 작업 속에서 소자금은 점점 의지를 굳혔다.

그날 저녁 홍앵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소자금은 창가에 서서 조용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 소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웃음기가 어렸음에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자금이 돌아보니 그때의 사나이가 검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당신은……!”

“지난번 본왕의 제안은 생각해 봤소?”

남자가 묻자 소자금도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범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고 아버지와 계모가 후회하게 지옥으로 보내 버릴 거예요.”

남자는 ‘짝’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좋소! 하지만 너무 흥분한 것 같으니 스스로를 가라앉히도록 하시오. 이제 나흘 후면 불려 갈 거요. 하지만 바로 행동해서는 안 되오. 그 개 같은 황제와 하룻밤은 참아야 하오.”

“왜죠?”

“처음으로 침소에 드는 수녀는 황제의 침궁으로 데려가게 되오. 머리카락부터 손톱까지 모두 검사하니 무기를 들고 갈 수는 없소. 연약한 여인이 맨손으로 어떻게 남자를 이길 수 있겠소. 그러니 하룻밤은 그 모욕을 참으시오. 며칠만 참으면 황제가 당신의 처소로 행차할 테니 그때 처리해도 늦지 않소.”

“조언 고맙습니다.”

소자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간 소자금의 증오가 줄기는커녕 더욱 강해진 것을 보고 미소 지으며 떠나갔다.

남자는 수원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마차를 타고 궁을 떠났다. 그가 태자부에 도착하니 송초 일행이 맞이했다.

“어떻습니까, 전하?”

태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재로 들어섰다.

“아주 순조롭다. 사월 초하루지?”

다시금 확인하는 그의 두 눈이 빛났다.

“네. 경사방敬事房(내무부 소속으로 황제의 ‘방사’를 주관하는 부서) 쪽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사월 초하루에 황제께서 정식으로 수녀들에게 행차하실 겁니다. 사월 초이튿날이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송초가 대답했다.

태자가 ‘음’ 소리를 내며 창가 태사의에 앉았다. 그 색마의 성정으로 미루어 가장 먼저 침소로 불러들일 수녀는 분명 소자금일 것이다. 수녀들에게 모두 품계를 내렸지만 소자금만 보림에 책봉했다. 그만큼 그녀가 인상 깊었단 소리였다.

또 정 황후가 정선제의 습성을 알려 주기를, 소자금을 연속해서 찾을 거라 했다. 사나흘 내리 찾아 질릴 때까지 맛을 보고 나서야 다른 아이를 찾을 것이라고.

물론 정선제가 갑자기 습관을 바꾼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튿날 다시 소자금을 찾아가게 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니까.

“문방사우를 준비해라. 진서후에게 당장 도성으로 회군할 준비를 하라 해야겠다.”

“네.”

태자가 분부를 내리자 이계가 급히 책상 위의 문방사우를 태자 곁의 탁자로 옮기고 조심스레 먹을 갈았다. 곧 태자가 완성한 서신을 이계에게 건넸고, 이계는 밖으로 나가 청매 다리에 죽통을 매어 날렸다.

청매는 이튿날 아침 능주에 도착했다.

능주 관아 서원 창가에 서 있던 주운환은 청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청매가 앉을 수 있게 손을 뻗고 청매 다리의 죽통을 열어 보았다. 이어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강렬한 웃음을 흘렸다.

“시작해라!”

“네.”

뒤에 선 여양이 두 눈을 빛내며 인사를 올리고 나갔다.

* * *

조금씩 시간이 흘러 삼월 그믐날이 되었다. 정선제는 곧 남자의 위용을 뽐낼 수 있단 생각에 하루 종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조회에 나가서도 눈에 들어오는 게 어디 있으랴.

대충대충 처리해 역병 논의까지 끝마치려는데, 금위군이 다가왔다.

“보고 올립니다!”

조회를 파하려던 정선제는 이 소리를 듣고 짜증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

금위군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능주 진서후의 서신입니다. 능주에서 양왕을 포획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온 조정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뭐라?”

“아니!”

“진서후가!”

정선제 역시 펄쩍 뛰어올랐다. 마음이 한순간에 헝클어진 그가 금위군을 향해 물었다.

“양왕은 어떤가?”

금위군이 접책摺冊(종이를 앞뒤로 여러 번 접어서 책처럼 만든 것)을 꺼내자 채결이 황급히 받아 정선제에게 바쳤다. 정선제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접책에는 바로 어제 주운환과 능주 지부가 재차 수색하여 민가에 숨어 있는 양왕과 잔당을 잡아들였고, 진서후가 즉시 제압하여 어떠한 사상자도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

정선제는 큰 소리를 내며 손에 든 서신을 탁자에 집어 던졌다.

“이 역적!”

표정이 복잡했다.

사실 정선제는 자신이 직접 처리할 필요가 없도록 양왕이 주운환의 손에서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양왕을 상처 하나 없이 생포했다 하니 당연히 도성으로 압송해 온 다음 자신이 그를 직접 처리해야 하게 된 것이다.

정선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서후를 어서 도성으로 불러들여라.”

“네.”

금위군이 명을 받들어 대전을 나섰다.

태자는 두 눈을 반짝였는데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주운환에게 쓴 서신에 양왕을 잡은 척하여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레 소자금이 일을 치를 즈음이면 경위영을 이끄는 주운환도 거의 도성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물론,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주운환까지는 필요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방비해 두는 편이 좋았다.

“모두 물러가라!”

정선제가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양왕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가라앉은 정선제는 밖으로 나갔다. 어서방에서 상소를 볼 마음도 들지 않아 바로 봉의궁으로 향했다.

봉의궁 입구에 도착한 정선제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양왕이나 소 황후를 생각할 때마다 심중이 복잡했다. 그럴 때 정 황후를 보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좋아졌다.

정선제가 들어서니 정 황후가 웃으며 맞이했다.

“폐하.”

“하하, 앉지.”

정선제는 정 황후를 일으키며 함께 평상에 앉았다.

“폐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진서후가 양왕을 이곳으로 압송하고 있소.”

정선제가 얼굴에 번민을 내비치자 정 황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흥분을 가라앉히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 다친 곳은 없나요?”

“흥, 다치거나 말거나.”

“폐하께서 양왕을 멀리하시려 하니, 차라리 황릉으로 보내시지요.”

“아니오, 팔이든 다리든 잘라 버려야 하오.”

정 황후의 말에 정선제는 차갑게 대꾸했다. 자신이 정한 양왕의 죄명은 ‘태자를 독살하려 함’이었다. 그런 만큼 때가 되면 직접 팔이나 다리를 쳐 내고 불구가 된 그를 황릉에 가두기로 이미 정한 후였다.

“폐하…….”

정 황후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선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께서 양왕을 많이 아끼셨으니까요.”

정선제는 정 황후의 손을 잡았다.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하오. 양왕을 폐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 망령된 생각을 접게 하겠소? 건이야말로 대제의 정통 후계자이고, 짐이 아끼는 아들이오.”

정 황후는 내심 픽 비웃었다. 건이를 그토록 아낀다면 왜 양위는 죽어도 하지 않는담!

“그러세요. 속상한 일은 생각하지 마시고, 기분 좋은 일만 생각하세요.”

“아이, 기분 좋을 일이 뭐가 있겠소.”

여전히 심란해하는 정선제를 향해 정 황후가 말했다.

“내일이 바로 사월 초하루입니다. 폐하께선 누구의 패를 뽑으실 건지요?”

“아…….”

정 황후의 예상대로, 이 말을 듣자 정선제는 모든 고민이 단숨에 사라지고 새로운 피가 샘솟는 듯 흥분되었다.

“하하하, 그렇군. 짐도 생각을 해 보겠소.”

정 황후는 크게 웃었다.

“사 마마, 경사방 사람을 불러오게.”

정선제는 진작부터 경사방을 부르고 싶었지만 내일은 되어야 성은을 내릴 수 있는데 벌써 패부터 뒤집는다면 자기가 너무 급해 보일까 싶어 참고 있었다. 그런데 정 황후가 그 마음을 이리 헤아려 줬으니 그녀의 호의를 마다하지 못하고 미리 하기로 했다.

“허, 황후도 참.”

그러면서도 정선제는 괜히 탓하는 양 정 황후를 한번 돌아봤다.

“태의가 사월 초하루는 되어야 짐의 몸이 회복된다는데, 어찌 짐을 곁에 두려 하지 않고 도리어 밀어내려 하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선제는 점점 더 어리고 아름다운 소녀들을 갈망하게 되어 이미 정 황후 같은 중년 부인에게는 흥미가 전연 없었다.

정 황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신첩의 나이가 몇인데 이제 막 입궁한 아이들과 다투겠습니까?”

“황후는 정말 도량이 넓고 현숙하구려.”

정선제는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

“이런 부인이 있는데 무얼 더 바라겠소.”

물론 자신이 평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한 여인은 소 황후였다. 하지만 그녀는 성격이 너무 강했고 그 때문에 이따금 저와 반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기에 모두들 ‘정선제는 소씨 집안에서 키워 낸 황제’라 수군댔다…….

그래서 자신은 늘 마음이 불편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주씨 집안과 강왕의 세력도 커서 그들에게도 한 수 접어 줘야 했다.

오직 정씨 집안만이 바짝 엎드려 자신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고, 그렇기에 적당한 기회가 오면 정씨 집안 사람을 종종 발탁했다. 정 황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온화하고 현명한 정 황후는 늘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은 정씨 집안이야말로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정 황후는 진정 저를 하늘로 믿고 따르는 여인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그들 앞에 서면 비로소 천자가 되었다! 그래서 정씨 집안과 정 황후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틀릴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경사방의 총괄 환관인 등진수가 쟁반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부드러운 붉은 비단이 깔려 있고 박달나무로 조각한 패가 열두 개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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