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6화
주묘서가 묘언헌으로 걸음을 옮기자 벌써부터 이곳에서 주묘서를 기다리고 있던 태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묘서.”
“전하.”
주묘서는 배를 받치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태자도 진작 소식은 들은 차였지만, 주묘서의 입으로 들으니 감회가 또 달랐다. 그는 감격해하며 그녀를 품에 안고 크게 웃었다.
“묘서는 정말 총명하구나.”
“당연하죠. 신첩이 누굽니까. 전하의 현모양처 아닌가요.”
주묘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지난밤 태자가 어떻게 해야 수녀들이 정선제를 싫어하게 될지 고민하는 것을 듣고 주묘서가 ‘비교’라는 묘수를 생각해 낸 것이다.
비교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것을 이용하면 수녀들의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과연 적중했다. 물론 이 효과가 유지되는 시간은 잠시겠지만, 지금 태자에게는 그 잠시면 충분했다.
한편, 엽연채의 마차는 태자부를 떠나 흔들거리며 대로를 지나고 있었다.
“오늘 황후 마마와 주 측비 모두 이상해 보였습니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의 눈꼬리가 반짝였다.
“무슨 일인지 알겠니?”
“마님도 참. 제가 뭘 알겠어요.”
엽연채는 웃으며 혜연에게 일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혜연은 양왕과 주운환 사이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심복이니 말 못 해 줄 게 없었다.
“꿍꿍이가 있어서 그래. 그 수녀를 끌어들이려는 거야. 하지만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그들도 판에 끼었다는 뜻이다. 그 수녀를 상당히 믿고 있는 눈치니 곧 움직이겠지.”
엽연채의 말에 혜연은 걱정과 함께 기대도 됐다. 순탄히만 풀리면 이렇게 전전긍긍 두려워하는 날들이 곧 끝날 것이다.
* * *
봉의궁.
엽연채와 주묘서가 떠난 후,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보니 정선제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정선제가 전각 안을 살펴보니 황후만 평상에 앉아 있을 뿐, 수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정선제는 얼른 실망한 기색을 감추었다. 그는 남쪽 지방에서 도는 역병 때문에 어서방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 황후가 수녀들을 봉의궁으로 불러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붓을 던져 버리고 여기까지 뛰어온 참이었다.
당연히 머릿속에는 열예닐곱의 아름다운 수녀들로 가득했는데, 이렇듯 그림자도 없을 줄이야.
“하하하. 식사는 하였소, 황후?”
하나 정 황후가 있으니 그러한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정선제는 손을 비비며 웃었고 정 황후도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요 며칠 역병으로 바쁘시니 신첩도 폐하를 방해할 수 없어 주 측비와 진서후 부인을 궁에 들여 함께 식사했습니다.”
“하하하하하. 잘했구려. 시간이 되면 종종 불러 왕래하시오.”
정선제는 평상에 앉으며 알고 싶은 바를 꺼냈다.
“참, 황후가 수녀들을 모두 불러들였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수녀들이 법도를 잘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서 신첩이 불렀습니다. 하루빨리 폐하를 모셔야 하니까요.”
‘모신다’라는 말을 듣자 정선제는 몸속의 모든 피가 힘차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수원으로 가 그녀들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위신을 잃으니 참아야지.’
정선제는 인내심을 짜내느라 저도 모르게 또 손을 비비며 정 황후와 몇 마디 더 나누고 떠났다.
침궁에 돌아오니 마침 나 의정이 침과 약을 가져오고 있었다. 정선제는 침상 가에 앉아 조바심을 냈다.
“짐이 복약을 시작하고는 온몸의 피가 불타는 듯 끓어오르는 것 같아, 언제 끝낼지 몹시 기다려진다! 하하하, 이런 느낌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니, 이렇게 강력한 느낌은 예전에도 없었다!”
나 의정도 크게 웃으며 하례를 올렸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회복 속도가 예상보다도 훨씬 좋습니다.”
정선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잘됐구나. 짐의 회복 속도가 이렇게 좋으니, 조금 더 빨리…….”
나 의정은 마음속으로 침을 뱉었지만 겉으론 환히 웃었다.
“되기야 됩니다만, 지금 폐하의 신체 기능이 아직 그만큼 안정되지는 않았습니다. 폐하, 멀리 보시고 며칠 더 요양하시지요.”
정선제의 굳은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하나 곧, 기왕 오랜 시간 참은 것을 성급하게 굴어 망칠 필요 없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 시각, 수원.
봉의궁에서 돌아온 이후 수녀들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곽 마마가 웃으며 운을 뗐다.
“황제 폐하를 더 잘 모시기 위해 모두 재주를 한 가지씩 연습하십시오.”
“재주 연습이요?”
수녀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래요. 어서요.”
곽 마마가 큰 소리로 다그쳐 대니 수녀들은 내키지 않아도 한 시진간 연습을 해야 했다. 다 마치고 나서야 이날의 일과가 끝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홍앵은 줄곧 소자금을 주의 깊게 살폈는데, 소자금의 얼굴은 예상대로 점점 더 음랭해졌다.
* * *
아름답고 편안한 계절, 삼월. 엽연채는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아침을 일찍이 맞이했다. 화장대에 앉은 그녀 뒤에서 청유가 머리를 빗겨 주고 있는데, 소월이 헐떡이며 들어왔다.
“마님……!”
엽연채는 소월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뛰어온 것을 보고 살짝 웃었다.
“무슨 일이니?”
“진씨 집안에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대부인이 출산을 하셨다 합니다!”
소월은 고하며 눈이 보이지 않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 고모가 출산을?”
“네, 어제 술시戌時(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에 진통이 시작되어 자시子時(밤 11시에서 오전 1시 사이) 이각에 따님을 출산하셨다고 합니다.”
“응? 자시에 출산하셨다고? 왜 이제서야 알려 주셨을까? 청유야, 서둘러라. 대충 아무 머리꽂이나 꽂으렴. 바로 진씨 집안에 가야겠다.”
엽연채는 몹시 기뻐하며 청유를 독촉했고, 그 마음이 급해진 모습에 혜연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오늘 아침에 소식을 알린 것은 이러실까 봐겠죠. 깊은 밤에 허둥지둥 달려오실 것을 염려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백수야, 가서 선물을 준비해 오렴.”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온 집안이 바삐 움직였다. 청유는 머리를 마저 치장하고 혜연은 옷을, 백수는 선물을, 소백은 아침을 마련했다. 새로 온 여종 두 명은 소식을 알리러 온 진씨 집안 할멈을 불렀다.
단장을 마친 엽연채는 아침을 대충 먹고 마차에 올랐다. 혜연은 엽연채가 얼마 먹지 않은 것을 보고 서둘러 간식을 싸서 마차에 올랐다.
이각이 흐른 후, 엽연채 일행은 성 북쪽 진씨 집안에 도착했다.
대대로 작위를 물려받은 진씨 집안은 크고 우아했다. 하나 엽연채는 지금 건물과 풍경 등을 구경할 정신이 아닌지라 엽영교의 방으로 걸음을 계속 재촉했다.
들어가자마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묘씨, 나씨, 손씨, 엽미채, 그리고 엽영교의 두 이복 자매도 모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꽉 들어찬 방에 엽연채가 들어서자 묘씨가 웃으며 가장 먼저 반겼다.
“연채 왔구나.”
두 이복 고모도 엽연채를 무척이나 반가워했고, 인사를 나누며 창가로 갔다.
엽영교는 꼭꼭 싼 보자기를 안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고모.”
엽연채가 다가가자 엽영교가 고개를 들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봐.”
엽연채는 침상에 앉아 엽영교가 안고 있는 포대기 안을 들여다봤다. 분홍 바탕에 은실로 ‘만복’을 수놓은 두툼한 비단 포대기 속, 보들보들한 갓난아기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엽연채는 아기를 보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아……! 정말 귀여워요.”
한번 안아 보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렇지?”
엽영교의 얼굴에도 한가득 따스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묘씨와 나씨가 다가왔다. 그들을 따라 침상으로 온 손씨는 웃으면서, 딸은 낳아 봐야 밑지는 장사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는 찰나, 밖에서 여종이 알렸다.
“장 대부인 오십니다.”
이어 발소리가 들리더니 엽이채가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벌써 돌이 된 아이는 한창 사람을 따라 귀여울 때였다.
“이채 왔구나. 어서 아이를 데려와 당고모를 보여 주렴. 아이 참, 당숙부일 줄 알았더니 당고모 아니겠니, 글쎄.”
손씨가 웃으며 말하자 묘씨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엽영교가 딸을 낳아 묘씨도 실망했지만 손씨가 이렇게 자꾸만 찬물을 뿌려 대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게다가 엽이채가 일부러 아들을 안고 나타난 것을 보니 더 속이 시끄러웠다.
엽이채는 아들을 안고 다가왔다.
“고모 배가 뾰족하고 신 것을 좋아하시길래 아들일 줄 알았더니 제가 옷을 잘못 준비했네요.”
“아이, 이채 너도 정말. 사람들이 모두 아들 복이 있는 건 아니란다.”
이 모녀가 하는 꼴을 지켜보던 엽연채의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이채 너는 복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남지 않았잖니. 잘 지키렴. 고모야 진 부인과 고모부 모두 기뻐하시는데 딸이면 어떠니! 아침 일찍부터 진씨 집안에서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 축하 달걀을 돌리며 소식을 알렸잖아. 부부가 한마음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안 그러니?”
의기양양하던 엽이채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엽이채와 장박원의 사이는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장박원의 애첩은 이미 임신 5개월이었다.
“모두들 왔네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어오는 진 부인 뒤로 여종이 쟁반을 들고 따라왔다. 진지항도 꽁무니에 서 있었다.
엽연채가 황급히 일어나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진 부인은 잠든 손녀를 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었고, 엽영교를 살갑게 챙겼다.
“보니 아침을 너무 적게 먹더라. 잉어탕을 가져 왔으니 식기 전에 마시렴.”
“네.”
“우리 딸.”
진지항이 다가와 포대기를 안아 들었다.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희희낙락하는 그가 아이에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이자 엽영교가 살짝 흘겨보았다.
“조심해요.”
“알았어요, 허허.”
진지항은 조심스레 아기의 얼굴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묘씨는 진 부인이 엽영교를 세심히 챙겨 주고 진지항도 아이를 소중히 아끼는 것을 보고 남몰래 안도했다.
하지만 손씨와 엽이채는 이를 보고 수심에 잠겼다. 엽연채는 이미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나마 엽영교가 딸을 낳은 것을 보고 이 기회에 자근자근 밟아 주러 왔는데 이게 다 뭐란 말인가. 도리어 부부가 저렇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불쾌하기만 했다.
결국 엽이채 모녀는 바깥방에 나가 앉았다.
진지항은 한동안 딸을 데리고 놀았으나 주변이 모두 여자 친척들이어서 계속 앉아 있기 민망했다. 결국 아쉬워하며 다시 한번 딸에게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
“고모, 이름을 뭐로 지었어요?”
침상 곁의 엽연채가 묻자 엽영교가 아이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진시용, 아명은 염염이야. 어때?”
엽연채는 웃으며 엽영교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고 작게 속삭였다.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을 때 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한 달 후 만월연에 오셔서 한잔하세요.”
묘씨는 진 부인의 말에 크게 기뻐했지만 엽이채와 손씨는 마음이 상했다. 보통 딸은 만월연을 열어 주지 않으니, 정말 기뻐서 여는 연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