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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745화 (745/858)

제745화

“무슨 일인가? 본궁이 그렇게 무서운가? 칭찬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채녀는 어서 일어나시오! 마마께서 그려 보라시는데 이 무슨 추탭니까?”

굳은 얼굴의 곽 마마가 다가와 가 채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식은땀을 흘리는 가 채녀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해 봤자 성은을 입을 기회가 없어지는 것뿐이고,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잘것없는 재주이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 마마와 부인께서 흉잡지 아니하시면 좋겠습니다.”

정 황후는 웃으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 문방사우를 준비해라.”

사 마마가 나가 문방사우를 준비했고, 곽 마마와 함께 직접 탁자 세 개를 들여와 중앙에 놓았다. 보통 때라면 낮은 탁자를 썼겠지만 엽연채와 주묘서 모두 임신 중이기에 높은 탁자를 준비했다.

엽연채는 정 황후의 두 심복이 직접 묵직한 물건을 옮기는 것을 지켜보며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떴다.

“새언니, 시작하죠.”

주묘서가 싱긋 웃었다.

엽연채와 주묘서의 탁자는 반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앞줄에 나란히, 가 채녀의 탁자는 그 뒷줄에 놓였다. 세 사람은 각자 탁자에 자리 잡고 화지를 펼쳤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주묘서도 붓을 들었다. 주묘서는 몇 번 붓질을 하다 슬쩍 엽연채를 살폈지만, 열심히 그림 그리는 모습만 보였다.

일각 정도를 더 그리니 엽연채와 주묘서의 그림은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탁자에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 서로 상대방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사 마마와 곽 마마는 그림을 보는 척하며 주묘서의 좌우에 서서 양쪽 채녀들의 시선을 가렸다. 주묘서는 재빨리 미리 그려 가장 아래 숨겨 둔 그림을 꺼내 위에 놓았고, 사 마마는 바꿔치기한 그림을 챙겨 갔다.

곽 마마는 자연스럽게 뒷줄 가 채녀 자리로 갔다. 곽 마마가 다가오는 것을 본 가 채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계속 땀을 흘렸다. 그저 연꽃이나 그려본 그녀가 사람을 어떻게 그리겠나. 가 채녀는 겨우겨우 얼굴 윤곽만 그려놓고 더 이상은 그릴 수 없었다…….

조급해진 가 채녀는 울고만 싶었다. 분명 황후 마마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다. 곽 마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자기를 노려보기까지 하자 가 채녀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흠!”

곽 마마가 헛기침 소리와 함께 슬쩍 가 채녀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다. 놀란 가 채녀가 황급히 풀어 보니 그것은 정선제의 초상화였다. 가 채녀는 감격한 얼굴로 곽 마마를 바라보았다.

“마마…….”

곽 마마는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가 채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 곽 마마가 이쪽의 재주를 칭찬한 것을 후회한 것이리라! 같이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 도와준 것이겠지만, 어찌 됐든 한숨 돌린 셈이었다.

가 채녀가 주위를 빠르게 살피니 다행히 상석의 정 황후는 다른 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수녀들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다시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정 황후가 백옥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 그렸는가?”

엽연채는 이미 붓을 내려놓은 후였다.

“예. 마마, 다 그렸습니다.”

“아, 그럼 어서 올라와 앉거라. 몸도 무거운데 오래 서 있지 말고.”

“네.”

정 황후는 오늘따라 무척 자상했고, 엽연채는 그녀가 권한 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마마마, 저도 다 그렸습니다.”

주묘서도 붓을 내려놓더니 엽연채 곁에 앉았다.

“황후 마마께 아뢰옵니다. 신첩도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가 채녀도 황급히 말하고 몸을 굽혀 인사했다.

“하하, 잘했다. 돌아가 앉으렴. 그럼 함께 묘서와 채녀들의 재능을 감상해 보자꾸나. 사 마마!”

“네.”

사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가가 먼저 주묘서 탁자의 그림을 들어 보였다.

“황후 마마, 보십시오!”

엽연채도 고개를 기울여 주묘서의 그림을 봤다. 준수하고 우아한 태자를 생생하게 그려 그의 존귀함과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엽연채는 방금 주묘서와 가까이 있어 그림을 바꿔치기하는 장면을 모두 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미세하게 실룩였다.

“와, 정말 비슷하군. 묘서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줄 몰랐구나.”

정 황후가 주묘서를 칭찬하자 주묘서가 웃으며 화답했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어마마마. 그래도 어마마마께서 이리 칭찬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나중에 혹시 전하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마마마께서 혼내 주세요.”

“물론이지.”

고부가 정말 미리 짜 놓은 대사를 읊듯 죽이 잘도 맞았다.

“자자, 이 자매들에게 묘서의 그림을 보여 주거라.”

정 황후의 말에 사 마마가 그녀 곁에 서서 그림을 들어 아래쪽의 채녀들에게 보여 주었다.

열두 명의 채녀들은 태자를 보지 못했기에, 이 자리에서 기대 이상으로 영민하고 준수한 용모를 보게 되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런 미남자인데, 거기다 세상 가장 존귀한 태자 전하 아닌가? 그리고 수줍어하는 주묘서를 보니, 못내 속이 쓰려 왔다. 누구는 저렇게 시집을 갔는데…….

“하하. 자, 이제 진서후 부인의 것을 보자.”

“네.”

정 황후의 말에 곽 마마가 엽연채 탁자 위의 그림을 들고 황후에게 다가갔다. 정 황후는 그림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칭찬했다.

“혼과 몸이 모두 담긴 그림이구나. 과연 대제 최고의 재원이야.”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마마. 소인은 제가 생각하는 부군의 모습을 생각해 그린 것뿐인데요.”

“그게 제일 좋은 거지. 곽 마마, 채녀들에게도 보여 주게.”

정 황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곽 마마는 돌아서서 그림을 높이 들었다.

채녀들은 아까보다도 더 깜짝 놀랐다. 그림 속의 남자는 칠흑 같은 머리를 높이 묶고 선홍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눈은 종이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니, 그야말로 더없이 야성적이며 위풍당당한 영웅의 풍모였다.

채녀들 모두 흠모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진서후로구나! 과연 듣던 대로 견줄 자 없이 준수하고 매력적이었다!

“부부의 정이 정말 깊구나. 주묘서와 진서후 부인 모두 생생하게 잘 그려 주었다. 그럼 이제 가 채녀의 그림을 보자.”

정 황후가 웃으며 곽 마마를 흘깃하자 곽 마마는 바삐 내려가 그림을 들고 황후에게 돌아왔다.

“보십시오, 황후 마마.”

정 황후는 그림 속 사람을 보고는 웃었다.

“응, 닮았네! 정말 닮았어. 부인도 보시게.”

“네.”

다가가서 그림을 확인하자 엽연채의 얼굴이 굳었다. 정말 닮았다!

“정말 꼭 닮았네요.”

“맞아요!”

주묘서도 조소가 섞인 눈빛을 보내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가 채녀는 긴장이 풀려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도 보거라.”

정 황후가 크게 웃자 곽 마마는 그림을 높이 들었다. 방금 본 태자의 준수함과 우아함, 주운환의 힘찬 기개에 빠져 있던 채녀들은 곽 마마 손에 들린 그림을 보자 굳어 버렸다.

그림 속에는 주름 가득한 노인이 있었다. 쭈글쭈글한 눈꺼풀까지 빼다 박았다. 심지어 흐릿하고 엉큼한 눈빛까지 완전히 똑같아, 웃고 있는 그 모습이 역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열두 명의 수녀들 중 몇몇은 입궁을 원하지 않았다. 정선제의 나이를 듣고는 간택 전에 그가 퇴위하기를 기대해 보기도 했다. 나이도 적지 않고 노환으로 몇 년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도 바람결에 전해 들었으니까. 하지만 한 단계씩 거쳐 끝내 궁 안에 남고 나니 도망갈 수 없음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정선제는 지고지상의 황제였다. 이 점을 계속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연습을 하다 보니 얼마간은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그저 나이가 좀 많고, 얼굴이 좀 못생긴 것뿐 아닌가. 어쨌든 황제니까! 결코 나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젊고 잘생기고, 마찬가지로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를 가진 태자가 바로 저기 있다. 그리고 대제의 영웅, 수려한 절세미남 진서후도 저기 있다. 두 미남자를 보고 정선제의 그 늙은 얼굴을 보려니 누구를 막론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똑같은 여인인데 누구는 절세미남 소년 장군에게 시집을 갔고, 자기는 음흉한 늙은이에게 시집왔다니. 이렇게 비교를 하자니 수녀들은 마음속에서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고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수녀들이 어렵게 쌓아 온 정선제를 향한, 손톱만큼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두들 마음속 생각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정 황후는 수녀들의 미묘한 표정을 보았고, 특히나 새파랗게 질려 있는 소자금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태자가 어제 찾아와 소자금이 수녀들에게 영향을 받아 일을 해내지 못할까 걱정된다 했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수녀들은 이제 막 어렵게 정선제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법도를 배우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렇게 타인과 비교를 하면 순식간에 정선제에 대한 거부감이 다시 커질 것이고, 분위기는 반드시 침울해질 것이었다.

더구나 소자금은 본디 정혼자를 잊지 못했고 사실상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선제를 증오하고 있었다. 비교를 하고 나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수녀들 사이의 분위기가 침울하면 소자금은 황제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의 일은 새어 나갈 리도 없을 터였다. 수녀들은 지금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정선제가 이번 달을 넘기게 할 계획이 없으니, 훗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정 황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구나. 수녀들 모두 재색을 겸비했고, 법도도 잘 배웠구나. 아주 좋아. 그만 돌아가거라!”

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정 황후에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황후 마마, 벌써 오시입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군.”

사 마마의 말에 정 황후는 웃으며 엽연채에게 식사를 권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시간을 잊었네. 임산부가 둘인데 배를 곯게 해서는 안 되지! 사 마마, 어서 식사를 준비하게.”

“네.”

사 마마가 자리를 떠났다.

곧 음식이 차려지고 엽연채와 주묘서는 정 황후와 식사를 한 후 궁을 떠났다. 두 여인을 태운 마차는 먼저 태자부에 주묘서를 내려 주고 진서후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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