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4화
“어마마마.”
주묘서가 한껏 애교를 부리며 정 황후의 팔을 안았다.
“어마마마, 요즘 계속 새언니를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래서 오늘 특별히 같이 어마마마께 문안 올리러 왔어요.”
정 황후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너도 참……. 내가 진서후 부인을 보고 싶어 한 것은 맞지만, 부인의 몸이 무거워 부르지 않았는데. 어찌… 이 아이가 문안하러 입궁한다 하더니 자네까지 불러왔구나.”
황후가 미안하단 듯 웃으며 엽연채를 바라보자, 엽연채도 웃으며 말했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마마. 소인의 몸이 전보다 무겁긴 하지만, 지금이 제일 안정적인 시기인걸요. 마마께서 제 생각을 하고 계신 줄 알았다면 벌써 마마를 찾아뵈었을 텐데요.”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군. 어서, 이리 와 앉게. 이쪽으로 앉아!”
“네.”
정 황후가 곁에 있는 수돈을 가리키자 엽연채도 활짝 웃으며 주묘서 가까이에 앉았다.
“진서후가 떠나 있어 부인이 고생이 많아. 진서후가 서신은 보내왔는가?”
“네, 마마.”
엽연채는 가볍게 웃으며, 매일 한 통씩 온다고 대답했다.
“진서후 부부는 정말 정이 넘치는구나.”
감탄하던 정 황후는 엽연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묘서는 자신과 가까워야 할 시어머니 정 황후가 엽연채를 더 반기는 것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 주운환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속으로는 못내 불편했다. 주묘서는 더 참지 못하고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참, 어마마마. 지난번 궁에서 대대적으로 수녀들을 간택했는데, 저희는 못 봐서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하하, 수녀 간택은 너희가 참여할 수 없지.”
정 황후의 눈이 빛났다.
“물론 저도 알지만, 지금까지 수녀 간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더라고요. 참, 수녀들 모두 절세미녀라면서요?”
“물론이지. 간택받은 아이들 모두 꽃처럼 아름답단다.”
“어마마마, 저희도 수녀들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주묘서가 콧소리까지 곁들여 한껏 아양을 떨자 정 황후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게 뭐 어렵겠니. 사 마마, 수녀들을 불러오게. 법도를 얼마나 배웠는지 내가 한번 봐야겠어.”
정 황후는 담황색 추향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고, 사 마마는 대답하며 바로 밖으로 나갔다.
“소인이 복이 있네요. 덕분에 황실 비빈들의 용모를 구경할 수 있겠어요.”
엽연채가 미소 지으며 이리 말을 건네자 정 황후도 미소로 화답했다. 하나 그러기 무섭게 모깃소리로 중얼거렸다. ‘천한 것들.’이라고.
곧 밖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향기가 물씬 풍겨 오며 아름답게 단장한 소녀들이 하늘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이미 품계를 받고 예물과 옷감도 받았지만, 아직 옷을 짓는 중이라서 아직까지도 간택 때 입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모두들 수홍색의 상의와 치마를 입고 있었고, 금잠과 꽃장식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 이렇게 똑같이 치장해 놓으면 이들의 자태를 관찰하기도, 법도를 가르치기도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수녀들은 동일한 옷차림과 장신구를 하고 있음에도 각자 분위기가 달랐다. 또 하나같이 미인이지만 그중에서도 한 명이 특히 아름다웠는데, 자색도 자색이지만 총명하고 청신한 분위기가 돋보여 눈에 띄었다.
이렇게 많은 미녀를 보자 주묘서는 자기도 모르게 위축돼 헛기침을 하고는 볼 주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이래서야 내가 저 수녀들하고 비슷해 보이겠는걸. 아니, 아니야. 그저 저 아이가 너무 아름다울 뿐이야!’
어쩌면……. 잠시 생각하던 주묘서는 퍼뜩 엽연채를 바라보았다.
불려 온 수녀들도 황후 곁의 여인을 보고 놀라서 숨을 참았다. 수녀들은 모두 자신의 외모가 출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기가 죽어 버렸다.
‘세상에 이렇게 그림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마, 채녀들과 보림이 왔습니다.”
넓적한 얼굴의 곽 마마가 채녀들을 데리고 왔다. 곽 마마는 정 황후의 또 다른 심복으로 수녀들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녀들이 함께 인사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정 황후는 백옥 찻잔을 들어 한 입 마시고 다시 내려놓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보니 지난 칙선 때보다 많이 나아졌구나.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수녀들은 그제야 일어나 가지런하게 줄지어 섰다.
그들 옆에 있던 사 마마가 엽연채와 주묘서를 보고 소개했다.
“이분은 진서후 부인이시고, 이분은 태자 측비 마마이시다.”
“진서후 부인과 측비 마마를 뵈옵니다.”
주묘서는 손을 들어 인사하려다 사 마마가 엽연채의 이름을 먼저 말하자 먼저 인사를 하기 민망해져 표정이 굳었다. 반면 엽연채는 미소를 띠며 우아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리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인사가 오간 후 정 황후가 수녀들한테 앉으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마마.”
수녀들은 다시 질서 정연하게 양쪽으로 나누어 여섯 명씩 앉았다.
주묘서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어마마마, 수녀들이 정말 꽃처럼 아름답네요.”
“그렇지?”
정 황후도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들은 주묘서의 칭찬을 듣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소자금만이 담담하다 못해 차가운 표정이었다.
“용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두들 재능도 아주 뛰어나단다.”
정 황후는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맞습니다. 채녀들 모두 각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요. 재능과 용모를 두루 갖췄답니다.”
곽 마마가 웃으며 화답하자 양쪽에 앉아 있는 수녀들은 난처하단 듯 웃었다. 무슨 재능을 말하는 것인가? 간택에 참가할 때 장기를 하나씩 쓰라길래 조금이나마 할 줄 아는 것을 적어 냈을 뿐이다. 이번 간택의 결정적인 기준은 외모였다! 얼굴이 예뻐서, 몸매가 고와서 눈에 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정말 재능 있는 여인이 있는 건가?’
“와, 대단한데요?”
주묘서가 놀라는 소리를 내며 엽연채에게 기댔다.
“새언니, 새언니는 우리 대제에서 제일가는 재원이니 저 사람들도 좀 가르쳐 주는 게 어때요?”
“그저 바둑을 조금 둘 뿐이에요.”
엽연채는 눈을 반짝이며 사양했다. 하지만 바둑 경기에 나서던 날, 대제 제일의 재원이라는 말을 스스로 인정했으니 이제 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주묘서도 생각해 둔 게 있으니 물러나지 않았다.
“못 믿겠는데요. 새언니는 음악, 바둑, 서예와 그림까지 모두 다 잘하잖아요.”
“모두 조금씩 할 줄만 알죠. 잘하는 건 바둑밖에 없어요.”
“설마요, 새언니가 겸손한 거죠.”
“부인은 정말 겸손하군.”
정 황후도 엽연채를 치켜 올리는데 주묘서가 ‘참’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어마마마, 얼마 전 태자 전하께 초상화를 그려 드리려 했었어요.”
“응? 갑자기 웬 초상화?”
“전하께서 갑자기 오랫동안 그림을 안 그렸다며 저더러 꼭 그리라고 하시지 뭐예요. 그래서 몇 점 그려 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오늘은 새언니도 있고, 그리고… 수녀들도 모두 재능이 출중하니, 이참에 오늘 우리 함께 그림을 그려 보면 어떨까요?”
주묘서의 말을 듣고 정 황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구나. 본궁이 저 아이들을 어떻게 시험해 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좋은 생각이야.”
곽 마마도 맞장구를 쳤다.
“채녀들 모두 재능이 뛰어나니 분명 측비 마마와 서로 많이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주묘서가 크게 웃으며 엽연채를 끌어당겼다.
“새언니, 새언니는 제일가는 재원이니 우리 같이 해요.”
엽연채는 고부가 이렇게 죽이 척척 맞고 수녀들까지 끌어들이는 것을 보니, 수녀들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그저 구색을 맞춰 줄 사람이었다. 지금 이편의 신분과 가치를 보면, 저들 고부도 감히 자신을 음해하지는 못할 것이니까. 그리고 저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기도 해 엽연채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같이 하죠. 어떻게 할까요?”
주묘서는 잠시 생각했다.
“요 며칠 태자 전하께 그림을 그려 드렸더니 머리가 아파 다른 건 그리기 싫군요. 저는 태자 전하를 그릴래요!”
“측비 마마는 태자 전하를 그리셔도 되지만 채녀들은 안 됩니다! 진서후 부인도 그러실 수 없고요.”
곽 마마의 말이었다. 여자도 물론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초상화, 특히 남자를 그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여자는 보통 남자를 그리지 않았다.
주묘서는 태자의 여인이니 태자를 그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가했다. 하다못해 시집가기 전의 어린 소저라면 또 모를까, 엽연채는 남편이 있고, 채녀들은 황제의 여인이다.
“그래, 안 될 말이지.”
정 황후도 동조했으나 주묘서는 입을 삐죽대며 고집을 부렸다.
“저는 꼭 태자 전하를 그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걸 그리면 되잖아요. 맞다. 하하, 저는 제 부군을 그리고, 새언니는 새언니의 부군을 그리면 어때요? 셋째 오라버니를 그리세요. 그리고 채녀들은… 그러네요. 황제 폐하를 그리는 거예요!”
채녀들은 크게 놀랐다. 황제를 그려도 되나? 황제의 용안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아닌데!
하나 뜻밖에도 정 황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측비 말대로 하자!”
수녀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허락이 떨어졌대도 애초에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그릴 것 아닌가! 수녀들은 모두 손사래를 쳤다.
“마마, 농담이시겠지요. 신첩들 모두 평민 출신인데 어찌 그림을 그릴 줄 알겠습니까. 글도 잘 모르는걸요.”
곽 마마가 수녀들을 노려봤다.
“못하다니요? 분명히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참, 가 채녀가 서화에 능통하고, 그림 실력이 출중합니다. 간택 때 그림 한 점을 내놓았습니다.”
이 말을 하며 오른쪽 두 번째 권의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 열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랑스럽게 생긴 여인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아뢰었다.
“신첩의 그림은… 내세울 것이 못 됩니다.”
그녀의 그림은 정말 평범했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게, 그저 비슷하게 흉내나 내는 정도였다. 그녀는 간택 때 연화 그림을 한 폭 바쳤는데, 당시 호부시랑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간택된 것은 다만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겸손한 아이로구나. 나도 채녀들의 재능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곽 마마가 가 채녀를 추천하였으니 분명 특출난 그림 실력과 개성이 있겠지.”
정 황후의 칭찬에 가 채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신첩… 신첩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정 황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가 채녀는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고, 정 황후의 얼굴빛은 더욱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