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3화
소자금은 멍해진 채 서 있다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그녀가 머릿속을 정리하며 탁자 위의 손을 꼭 쥐었다 폈다 하는 동안, 홍앵은 창틈으로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다 잠시 후 문으로 돌아 들어갔다.
“마마.”
소자금은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왔구나.”
“안색이 어찌 이리 안 좋으신가요?”
“별일 아니다.”
소자금은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입을 뗐다.
“도성에는 황자가 몇 분이나 계시느냐?”
“어찌 그런 것을 궁금해하세요. 태자 전하를 제하고 도성에 계신 황자님은 세 분이지만… 양왕은 이미 도성을 떠나셨습니다.”
“왜 도성을 떠나셨지?”
홍앵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는 정말 바깥일은 관심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그도 그렇겠네요. 마마께선 칭주에 사셨으니 모르실 만도 합니다. 또 입궁 후에는 법도를 배우느라 바쁘셨고요.
양왕 전하는… 독을 써서 태자 전하를 해하려 했습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셔서 찾고 계시고요. 도성을 탈출하신 후엔, 쯧쯧… 지금은 어디에 숨어 계시는지도 몰라요. 폐하와 태자 전하를 미워하시니 두 분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계실지도 모르죠.”
“양왕께서 황제 폐하를 미워하신다고?”
소자금은 놀랐는지 눈썹이 위로 치솟았지만, 곧 담담하게 말했다.
“먹을 것을 좀 준비해 다오.”
“드디어 뭘 좀 드시려고요? 네, 소인이 금방 준비할게요.”
홍앵은 반색하며 방을 나섰다. 그녀는 주방에 들러 음식을 준비시키고 몰래 봉의궁으로 향했다.
봉의궁에 들어가니 정 황후가 평상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다름 아닌 태자였다. 항탁 위에는 실제 사람 얼굴 같은, 정교한 가면이 놓여져 있었다. 가면 속 얼굴은 방금 소자금이 만난, 바로 그 남자의 것이었다.
“황후 마마, 태자 전하를 뵈옵습니다.”
홍앵이 몸을 굽혀 절했고, 태자는 항탁 위 백옥 잔을 살살 돌리면서 물었다.
“본궁이 떠난 후 반응이 어떤가?”
“정신이 없는지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소인이 밖에서 잠시 지켜보다 들어갔더니, 도성에 황자님이 몇 분 계시느냐고 물어봤습니다.”
태자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뭐라 대답했느냐?”
“황자님은 모두 세 분인데, 그중 양왕 전하는 도성을 탈출했다고 하니 의아해하면서 왜 도망쳤는지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독살 사건을 얘기했고 양왕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가장 미워한다고도 알려 주었습니다.”
“잘했다.”
태자는 홍앵이 제대로 일을 처리했음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툭 던진 ‘본왕’이라는 말은 결코 말실수가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갑자기 등장한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신원을 알아낼 수 없다면 소자금도 겁이 나서 막상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즉 태자가 ‘남자’를 양왕으로 오해하게 한 것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하지 않던가. 만약 일이 틀어지면 모든 책임을 양왕에게 돌릴 수 있는 안전장치를 확보한 셈이기도 했다.
태자는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어마마마, 소자가 요즘 봉의궁에 너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정 황후를 뒤로하고 태자부로 돌아간 태자는 즉시 서재로 향했다.
태자가 송초 일행을 불러 상황을 알리자 이계가 가장 먼저 입을 뗐다.
“아직 망설이고 있군요.”
“망설이는 게 당연합니다. 증오가 아무리 깊어도 인명이 걸린 일입니다. 누가 망설이지 않겠습니까? 듣자마자 응했다면 오히려 그편이 더 이상하지요. 다만…….”
“다만 뭔가?”
송초의 말에 태자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암살을 시키면 분명 하겠지만 말입니다. 소자금은 보름 동안 더 궁중 법도를 배워야만 시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분위기는 사람을 바꿔 놓을 수 있지요. 주변 수녀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제는 입궁했으니 시침하고 총애를 받아야 한다는 현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소자금이 그 영향을 받아 동화될까 봐 걱정입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태자는 놀라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송초는 되레 웃으며 말을 더했다.
“그러니 전하와 황후 마마께서는 소자금이 더더욱 증오를 불태울 수 있게, 더 고통스러울 수 있게 분위기를 잘 조성하셔야 합니다.”
태자는 그제야 안심하고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쉽지 않은 일이군. 하나 여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여인이지!”
* * *
날이 점점 따스해졌다. 엽연채는 얇은 홑옷 두 겹만 걸치고 정원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혜연과 청유가 함께 먹으며 수다를 떨어 대고 있는데, 소월이 들어왔다.
“마님, 태자부의 첩자입니다.”
“가져오너라.”
엽연채는 들고 있던 꼬치를 내려놓고 첩자를 펼쳐 들었다. 주묘서가 보낸 것으로, 내일 아침 함께 입궁하여 정 황후께 문안을 드리자는 첩자이었다.
청유와 혜연은 쓰인 글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님, 가지 마셔요. 벌써 임신 6개월이라 몸이 무거우니 집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잖아요.”
“아냐, 아주 편안한걸. 궁에 한번 들어가 보자꾸나!”
청유가 말렸으나 엽연채는 이미 그러기로 마음을 먹은 후였다. 안 그래도 궁 안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몹시 궁금하던 차였으니, 이참에 조금이라도 직접 보면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질 것 같았다.
“하긴요. 주 측비 성정에 마님이 거절하신다고 순순히 물러나겠어요. 황후 마마께서 직접 첩자를 보내게 할 수도 있어요.”
혜연이 담담하게 말했고 엽연채는 하품을 하더니 매화고를 하나 더 먹었다. 탁자에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청유야, 소월이에게도 갖다 주거라. 상하게 두지 말고.”
“네.”
청유가 접시를 챙기고 혜연이 엽연채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 * *
이튿날 아침, 단정하게 치장한 엽연채는 마차를 타고 태자부로 향했다. 태자부 문 앞에 마차를 세우자 주묘서가 배를 받치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이제 4개월이니 이리 돌아다녀도 별 위험이 없었다.
“작은새언니.”
주묘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는 마차에 그대로 있었다. 엽연채는 이제 6개월이니 몸이 무거워져 오르내리기 불편한 것은 주묘서도 알고 있지만 마음은 불쾌했다.
‘황후에 오르기만 해 봐라. 6개월은 고사하고 출산할 때가 다 되어서도 내 발밑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참자!’
엽연채 앞에서 인내하기는 전과 마찬가지였지만 동시에 전혀 달랐다.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했다! 태자가 이미 행동을 개시한 후였으니까.
‘전하께서 앞으로 한 달이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주묘서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엽연채가 지금 자신을 무시할수록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주묘서의 눈에 엽연채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마음껏 까불어 봐라. 더 발광할수록 더 아프게 떨어질 테니. 주묘서는 이렇게 생각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네, 늦었으니 어서 타세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묘서는 발판을 딛고 마차에 올라 엽연채 맞은편에 앉았다. 춘산도 혜연처럼 자기 주인 곁에 앉았다.
주묘서가 웃는 것을 본 엽연채가 따라 웃으며 말을 붙였다.
“어떻게 갑자기 황후 마마를 뵈러 갈 생각을 했어요?”
“하하, 새언니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주묘서는 눈썹을 찡그렸다.
“며칠 전에 이 측비의 어마마마께서 셋째 오라버니가 또 출병하는 바람에 새언니 혼자 외롭게 있다고 걱정하셨어요. 또 새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말씀하시면서 보고 싶다고도 하셨고요. 그런데 이 측비의 어마마마께서는 새언니 몸이 무거워서 불편하니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끝내 부르지 않으시더라고요.”
‘이 측비의 어마마마’. 혜연과 엽연채는 주묘서가 말끝마다 이 말을 반복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황후 마마’ 아니면 ‘어마마마’ 이렇게만 불러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을 꼭 ‘이 측비의 어마마마’라고 말하고 있으니…….
누가 모르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는 것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는 걸까? 아니면 존엄한 일국의 국모를 본인은 어마마마라고 부를 수 있다는 얘기일까?
엽연채는 더 듣기도 싫어 대충 대답했다.
“아아, 그랬군요.”
그러나 주묘서는 혼자 신이 나 있었다.
“일국의 국모이신 이 측비의 어마마마께서 이렇게 새언니를 보고 싶어 하시니, 아무리 새언니가 몸이 무겁다고는 해도 더 힘들어지기 전에, 이 측비의 어마마마를 한번 뵈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측비의 어마마마! 이 측비의 어마마마! 그녀의 가식적인 오만이 정말 가소로웠다! 엽연채와 혜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주묘서의 눈썹이 뒤틀렸다.
“왜들 웃죠?”
푸훗, 엽연채가 또 한 번 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재미있어서요. 하하하!”
주묘서는 엽연채의 행동이 묘하게 느껴져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나쁜 년, 또 잡아떼는구나! 무슨 일이든 사람을 비웃거나 깔보는 표정을 짓지! 뭐든 거만하게 내려다보더니 이제는 이 측비까지 무시한다는 말이지? 하나 건방을 떠는 것도 앞으로 한 달 남짓이었다.
‘마음껏 날뛰어라! 엎드려 울게 해 줄 테니!’
분을 가라앉힌 주묘서는 턱을 치켜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엽연채를 천둥벌거숭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엽연채도 자신을 그리 여기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한 채로.
마차는 정륭가를 지나 곧 궁에 들어섰다.
엽연채와 주묘서가 동화문에서 내리자 가마 두 대가 이들을 맞이해 봉의궁에 안내했다. 두 사람은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측비 마마, 진서후 부인을 뵈옵니다.”
문 앞의 궁녀들이 인사를 올렸으나 주묘서는 그녀들을 본 척도 않고 ‘흥’ 콧소리만 냈다. 그렇게 턱을 치켜든 채 한 손은 춘산의 손을 잡고, 한 손은 배를 받치고 기우뚱기우뚱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와 혜연은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것처럼 거만하게 구는 주묘서가 역겨워서 봐 줄 수 없었다.
봉의궁에 들어가 커다란 날개를 펼친 봉황 병풍을 지나니, 용봉 문양의 평상에 앉아 있는 정 황후가 보였다.
“어마마마를 뵈옵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아이고. 묘서가 오늘 온다더니, 진서후 부인도 함께 올 줄이야.”
두 사람이 인사를 올리자 정 황후가 반갑게 일어나며 부축하는 척을 했고, 사 마마가 얼른 내려와 엽연채와 주묘서를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