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2화
“그렇다면 폐하, 품계를 먼저 내리시지요.”
“좋소. 황후가 대신 생각 좀 해 보시오.”
밤이고 낮이고 이 수녀들만을 생각하던 정선제 마음속에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 수녀 중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인을 채녀采女에 봉한다.”
뒤이어 몇 명을 더 부르다가 드디어 한 사람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
“이 여인을… 보림寶林에 봉한다.”
정 황후는 흠칫했다. 입궁 후 승은을 입은 수녀들은 대개 채녀, 정팔품 품계를 받는다. 하지만 보림은 정육품이다. 처음 입궁한 수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것이다.
명부를 보니, 그 미인이 바로 소자금이었다. 정 황후는 속으로 태자의 혜안에 감탄했다.
“알겠습니다. 신첩이 즉시 내명부에 책봉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합시다.”
정선제는 현숙한 정 황후의 모습에 크게 흡족해하며 몇 마디 더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이튿날 아침, 내명부는 준비를 마쳤다.
정 황후는 사 마마를 시켜, 사람들을 데리고 수레 가득 예물을 싣고 수녀들이 잠시 기거하는 숙소에서 수녀들을 책봉했다.
소자금이 정육품 보림에 책봉되자 수녀들 모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부러워하는 이도 질투하는 이도 있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웃으며 다가와 인사했다.
“정말 축하해요.”
“축하해요, 소 언니.”
“누가 당신 언니죠?”
그러나 소자금은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녀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고, 그중엔 대놓고 욕을 하는 이도 있었다.
“잘난 척하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야.”
소자금이 방에 돌아오자 며칠 전 배정된 궁녀 홍앵이 서둘러 문을 닫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마, 마마께서 아무리… 높은 품계를 책봉받았다고 해도, 미움을 사서는 안 돼요!”
소자금은 탁자 앞에 앉아 비웃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홍앵이 쿵 소리를 내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너와 관계없다. 피곤하니 물이나 가져와라.”
소자금이 쏘아붙였지만, 홍앵은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인도 압니다. 이번 수녀 간택이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된 바람에, 마마처럼 나이가 맞는 규수들이 아무 준비도 없이 뽑혀 왔다는 사실을요. 수녀들 대부분은 이미 정혼을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마마께서도 옛 정혼자를 그리워하시는 건가요?”
소자금의 낯빛이 변하더니 잠시 슬픔이 어렸다.
“내 이야기를 해 봤자…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나가라!”
소자금의 눈 속에서 일렁이는 비애를 홍앵은 정확히 포착했다.
“말씀 않으셔도 소인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입궁하셨으니 과거는 잊으셔야 합니다.”
소자금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며 탁자 위의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러나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몸을 떨어 대고 있었다.
“됐다, 그만해라…….”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였다.
“마마…….”
홍앵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가라! 나가!”
감정이 격해진 소자금이 소리를 치자 홍앵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서 나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탁자에 엎드린 소자금이 보였다.
홍앵은 봉의궁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사 마마가 평상에 기대어 쉬고 있는 정 황후에게 아뢰었다.
“황후 마마, 홍앵이 왔습니다.”
정 황후는 퍼뜩 바로 앉았다.
“들라 하라.”
홍앵이 바로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황후 마마를 뵈옵습니다.”
“소자금은 어떤가?”
“소인이 요 며칠 계속 지켜보는데 매일 우울해합니다. 다른 수녀들과 함께 법도를 배우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소인이 오늘 정혼자 이야기를 꺼내니 몹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별말 없이 저를 쫓아냈습니다.”
“좋아. 계속 지켜보거라.”
태자가 이미 다 알아보고 소자금을 이용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였지만,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어야 했다. 명을 받은 홍앵이 다시 예를 행하고 물러났다.
홍앵이 정혼자 이야기를 꺼낸 후 한층 더 침울해진 소자금은 마치 산송장 같았다. 법도를 가르치는 마마가 벌써 몇 차례 야단쳤지만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탄 마마가 황후에게도 보고했지만 황후는 되레 희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여인들의 성격은 각자 다르기 마련이네. 그 아이는 폐하께서 간택하실 때도 그렇게 차갑고 도도했지. 폐하께서는 그 아이의 그 점이 마음에 들어 보림에 봉하신 것이다.”
황후까지도 소자금을 두둔하니 마마가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마마는 감히 소자금을 혼내기는커녕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렇듯 마마까지 그녀를 살뜰히 챙겼지만 소자금은 음식을 거의 입에도 대지 않아 날로 수척해졌다.
보다 못한 홍앵이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마마, 더 드셔야 해요.”
“하……. 살아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니…….”
차갑게 내뱉는 소자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의미가 없어요. 저도 마마의 마음을 알아요. 그제… 마마가 걱정되어 궁 내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마마의 일을 알게 됐어요. 정혼자가 돌아가셨다고…….”
“입 다물어라!”
소자금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이미 궁에 들어오셨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식구들을 생각해서라도 꿋꿋이 살아 총애를 받으셔야죠.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스스로를 포기하려 하세요.”
“그 사람들을 위해 총애를 받으라고? 하하하, 나더러 어찌 그 짐승들을 위해 총애를 받으라는 말이냐.”
홍앵의 말에 소자금이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냉랭하게 내뱉었다. 홍앵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그럼 어째서…….”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가라!”
소자금은 굳은 얼굴을 홱 돌렸고 홍앵은 입을 다물고 문을 나섰다.
홍앵이 나간 후, 소자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두 눈에는 핏발까지 섰고 탁자 위에 올린 손은 어찌나 꼭 쥐었는지, 손톱이 살에 깊이 묻혀 있었다.
“하하, 대단한 기세로군!”
갑자기 낮은 웃음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남자였다.
“누구죠?”
언제 들어왔는지, 검은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어 생김새를 확인할 수 없었다.
“누구시죠?”
소자금은 벌떡 일어서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차갑게 응시했다.
“이곳은 후궁입니다. 어찌 남자가…….”
“소 소저는 우선 본인 일이나 잘 챙기고 본… 내 이야기를 들으시오!”
남자는 웃으며 탁자 옆에 자리 잡고 직접 차를 따랐다.
“과연 꽃처럼 아름답군. 폐하께서 보림의 품계를 주실 만해. 소 소저는 분명 엄청난 총애를 받을 테니 이제부터는 탄탄대로요.”
남자가 눈을 돌려 소자금의 얼굴을 보니 이미 창백해져 있었는데, 특히 ‘총애’ 얘기에는 몸속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남자는 그녀의 반응에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당장 나가세요.”
소자금의 냉랭한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예요.”
“흠,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나 그 전에 한 가지 알아 두시지. 본왕이 돌아가면, 당신은 이 깊은 궁궐에 남아 황제의 총애를 받으려 마지막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야 할 거요. 증오해 마지않는 그 짐승들을 위해서.”
남자는 찻잔을 돌리며 여유롭게 대꾸한 반면 소자금은 기함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당신이 어떻게……!”
“알고말고. 당신과 협력하고 싶어 일부러 찾아왔으니 모를 리가.”
“협력?”
어리둥절한 소자금에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궁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오?”
“저는…….”
소자금은 이를 악문 채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었다.
“범 오라버니가 죽었어요……. 따라가려고 했는데… 범 오라버니 부모님도 언제나 제게 잘해 주셨어요……. 얌전히 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지부와 아버지가 그분들의 장사를 막아 못 살게 할 거라고 했어요. 이미 범 오라버니도 저 때문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떻게 그 부모님까지 괴롭힐 수 있겠어요.
전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그저 오라버니를 따라가지 못한 게 한입니다. 하지만…….”
역시! 남자는 속으로 웃었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면, 복수하면 되지. 복수는 무섭소?”
“무슨?! 내가 복수할 수 있다고요?”
“왜 못 하겠소! 짐승 같은 당신 아버지와 계모에게 한평생 이용당하느니 아주 물어뜯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남자의 두 눈에 어두운 광기가 스쳤다.
“어떻게 할 수 있죠?”
소자금이 격양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거야 간단하지. 그들은 당신의 미모로 권세를 얻고 싶어 하지 않소? 하니 당신의 그 미색으로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면 될 터!”
남자 역시 소자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소자금의 눈이 처음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남자는 음울하게 웃었다.
“하하, 그건 더 쉽소. 당신의 미모라면 분명 성은을 입을 기회가 있을 거요. 그때를 기다려 폐하께서 경계를 풀고 당신 곁에서 잠들었을 때 칼로 죽이면 될 것이오!”
“뭐라구요?”
남자는 냉정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왜? 못 하겠소? 그렇다면 여기서 사랑받는 보림으로 살면서 소씨 집안을 빛내면 되겠군. 당신의 정혼자는… 그저 재수가 없었던 걸로 하고.”
“당신은……! 내가 어떻게 오라버니를 원통하게… 어떻게……!”
눈에 핏발이 선 소자금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용하는 그 짐승들을 지옥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소. 황제를 죽이면 당신도 죽을 것이오! 또한 당신네 소씨 집안과 그리고 당신을 천거한 칭주 지부 또한 모두 참형을 받겠지! 당신 목숨 하나로 짐승만도 못한 그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 버릴 수 있소. 이만하면 훌륭한 거래 아니오?”
남자의 목소리는 몹시 음산했다.
아연실색했던 소자금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더니 눈에는 광기와 희열이 어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동조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이렇게 좋은 방법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남자가 떠나려 하자 놀란 소자금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소. 난 당신에게 방법을 알려 주러 온 것뿐이오. 당신을 이용하는 동시에 당신을 구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지. 잘 생각해 보시오. 과연 그렇게 할 것인지.”
남자는 이 말만 남기고 휙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