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1화
방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배와 주영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주운환에게 달려들기 전, 주 선생이 침착하게 소리쳤다.
“잠깐!”
두 사람은 동작을 멈췄고, 그들 뒤에서 양왕을 발견하자 주운환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양왕이 입을 뗐다.
“드디어 왔군.”
주운환은 미소를 짓더니 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소장이 늦었습니다.”
“아니다. 딱 맞게 왔어. 한데 운환, 키가 더 자랐군.”
양왕이 환하게 웃으며 주운환을 끌어당겼다.
주운환이 입을 옴짝거렸다. 반갑기는 저도 매한가지라지만, 이 이상한 인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자신의 키는 작년과 마찬가지였다.
“앉아, 앉아. 아침은 먹었나?”
“아직입니다.”
“함께 먹지.”
“네.”
양왕과 주운환은 자리에 앉아 함께 아침을 먹었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하배와 주영은 입술만 달싹거리다 곧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한편인 건가? 진서후가… 양왕의 사람이라고!?
놀란 후에는 감격이 몰려왔다. 영준하고 용맹한 주운환을 다시 보니, 역시 출중한 젊은이였다!
이렇게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진서후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선제가 얼마나 그를 중용하고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경위영을 맡고 있지만, 응성의 장군들도 모두 그가 선발한 사람들이었다. 그가 역심을 품었다면 직접 경위영을 이끌고 공격할 수 있고, 그 뒤에 응성의 백만 대군이 그 뒤를 지키니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양왕이 처음부터 도성에 이미 손을 써 두었다고는 했지만, 이들은 못내 걱정하고 있었다. 양왕의 패가 진서후를 이길 수 없다면, 도성에 돌아가 봤자 적에게 고이 목을 내놓는 일에 불과할 터이니.
하나 실은 진서후가 그 비장의 패였던 것이다. 하배는 자신들은 이제 막 양왕을 따르기 시작한 데다 초면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도 있었으니 양왕이 가장 중요한 패를 알리지 않은 것도 그럴 만하다, 싶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숨길 것은 없지 않았나! 하배는 감격이 가라앉자 화가 났다.
“전하, 소인들에게 패를 보여 주시기로 마음먹으셨다면 왜 어제 진작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양왕은 하배를 돌아보고 살짝 웃었다.
“어제 귀한 손님이 올 거라 말하지 않았나. 본왕이 자네들에게 놀라운 선물을 줬다고 하지.”
하배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또 할 말이 없어 입만 달싹였다. 놀라운 선물이라는 건 틀림없으니까.
주영도 심정이 복잡해 속에 웬 바윗덩어리가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활짝 웃으며 하배를 가로막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기쁜 선물입니다.”
“주 선생은 본왕이 돌아왔다는 걸 도성이 알도록 일부러 알린 것이네. 여기 머물면서 주 공자와 함께 지원할 것이다.”
양왕은 냉랭한 미소를 머금었고, 고혹적인 두 눈 역시 서늘해졌다.
“운환, 도성 사람들 모두 알고 있겠지?”
“네.”
고개를 끄덕이는 주운환의 눈이 반짝였다.
“도성에서의 계획도 진행 중입니다. 한 달 후에 시작하도록 준비해 두었으니 때가 되면 전하께서는 당당하게 입궁하실 수 있습니다.”
“하하, 좋아!”
양왕의 눈 속, 일순 광기가 스쳤다.
두 사람은 낮은 소리로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이각이 흐른 후 상의를 마친 주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저녁에 관아로 오셔서 몸을 숨기십시오.”
포졸과 도성 병사들은 아직도 수색 중이었다. 양왕이 밖에서 은신하는 것보다는 관아 서원에 머무는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다.
하배 내외는 변장하면 되지만 주 선생과 언서는 얼굴이 알려져 양왕과 집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 양왕비 마마께서는 어디 계시는가요?”
주운환이 조앵기를 찾았으나 양왕은 한마디만 했다.
“안에.”
“마마께서는 요 며칠 병이 나는 바람에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주 선생이 말을 보탰다.
주운환이 얕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자 여양이 다가와 작은 음식 상자를 건넸다. 주운환이 상자를 열며 말했다.
“연채가 마마께 드리는 것입니다. 궁중의 맛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상자에 든 토자포 두 개를 보자 양왕은 눈썹을 찌푸렸다.
“버려라!”
그때 안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 모두 돌아보니 창백한 얼굴의 조앵기가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연채……. 토자포…….”
양왕의 준미한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반 백성이 사는 집이다 보니 벽이 얇아 조앵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것이다.
양왕은 픽 비웃더니 상자를 가지고 다가섰다. 조앵기는 그 안의 만두를 보고 눈물까지 흘렸다.
“토자포…….”
“상했는데도 먹고 싶나?”
양왕이 들고 있는 상자를 흔들자마자 조앵기는 고개를 주억였다.
“네.”
한시도 잊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 토자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것 같았다. 더구나 연채가 보낸 것이다.
그러나 양왕은 콧방귀를 뀌며 상자를 창밖에 던졌다.
“이제 없다.”
조앵기의 머릿속이 굉음과 함께 하얘졌다.
“아악, 내 거야!”
양왕은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그녀의 머리를 그러잡았다.
“이 천한 것.”
“아악, 악! 엉엉, 아…….”
조앵기는 밖으로 뛰쳐나가려 애썼지만 양왕은 그녀를 꽉 잡고 방으로 끌고 갔다. 정신을 반쯤 놓은 조앵기가 양왕의 가슴팍을 물어뜯었으나 양왕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들어가라, 이 천한 것! 감히 본왕을 물다니!”
주운환은 두 사람이 문 뒤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울음소리가 들려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들 부부의 일이니 끼어들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요즘 날씨가 워낙 따뜻하여 토자포는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정말 먹으라고 준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한 것이었다.
양왕은 조앵기를 침상에 내던졌다. 조앵기는 침상에 파묻히다시피 한 상태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섧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양왕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바로 방을 나왔고, 그러자 이미 일어서 있던 주운환이 그에게 다시금 인사를 했다.
“전하,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저녁에 조용히 오시면 여양이 관아로 모시고 들어올 겁니다.”
“알았다. 가거라.”
주운환은 공수하고 여양과 집을 나섰다.
“어서 물건을 정리하고, 모든 흔적을 지우시게.”
주 선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하배 내외에게 이리 일렀다. 하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고, 주영은 조앵기의 방으로 갔다.
조앵기는 침상 구석에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정 황후가 밀어 넣은 이 여인이 싫었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번 여정에 여자 호위병은 자신 하나였기 때문에, 조앵기를 보살피는 것은 거의 자기 몫이었다. 물론 조앵기는 양왕의 품에 안겨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양왕이 없을 때도 있기 마련이었다.
“울지 마세요. 다 상해서 못 먹는 만두입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도성에 돌아가면 많지 않습니까.”
주영이 다가가 위로하자 조앵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 나를 버릴 거야, 나를 죽일 거라고…….”
주영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양왕에게 조앵기는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이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긴 하지만, 양왕이 이미 단호하게 거절한 후 아닌가. 더욱이 함께 다니다 보니 자신 역시 조앵기는 미련해서 살려 둔다 해도 밥이나 축낼 뿐 문제 될 것은 하나 없다고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괜한 생각입니다. 양왕 전하께서 얼마나 왕비 마마를 아끼시는데요. 도망 오면서도 데리고 오셨잖아요.”
조앵기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주운환은 그 집에서 나와 도성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그러고는 날이 저물 때까지 다른 집들을 수색하고 관아로 돌아갔다.
여양은 날이 더욱 어두워지길 기다렸다가 보초를 서는 도성 병사를 후문으로 보내고, 직접 양왕 일행을 관아 서원으로 모셨다. 양왕은 주 선생, 언서 형제와 함께 서쪽 곁채에 머물렀다. 수풍과 하배 부부는 옷을 갈아입고 주운환의 친위군으로 변장했다.
밤이 더욱 깊어 양왕 일행이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각. 등불 하나가 서원의 본채를 밝히고 있었다.
주운환은 책상에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주운환은 선지를 펼쳐 옥으로 된 문진으로 한쪽을 눌러 놓고 붓을 들었다. 자기도 몰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마음이 무거울 때라도, 부인에게 서신을 쓰면 늘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주운환은 세 장을 빼곡히 채웠다. 물론 양왕 이야기는 쓸 수 없기에, 능주의 풍경이 어떤지로 시작해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지, 그녀가 힘들까 봐 얼마나 걱정되는지 따위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말미에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향한 찬미와 애정 표현도 잊지 않고 또 한번 써 넣었다.
종이가 마르자 주운환은 전서구 다리에 서신통을 묶어 날렸다.
이튿날, 엽연채는 주운환의 편지를 받았다. 평상에 걸터앉아 편지를 읽는 내내 웃음이 새어 나와 도무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 * *
황궁, 봉의궁.
정선제와 황후가 평상에 좌우로 앉아 있었고, 그 옆의 항탁에는 수녀의 이름이 적힌 명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폐하, 이건…….”
명부를 본 정 황후가 놀란 얼굴로 묻자 정선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짐이 저들에게 어떤 칭호를 내려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아 황후와 상의를 하고 싶소.”
정 황후의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졌다. 수녀들은 시침한 후에야 품계를 받았고, 이것은 대대로 내려온 대제의 후궁 법도였다.
정 황후가 눈을 돌리니 정선제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갑자기 십수 년은 젊어진 듯, 태양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정 황후는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나같이 용모가 빼어납니다. 게다가 십수 년 만에 새사람을 궁에 들였으니 법도도 바꾸는 것이 맞겠지요. 지금 바로 품계를 내리시지요! 한데 폐하께서 아이들을 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선제가 기다린 것이 바로 이 말이었다!
“짐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 기억을 못 할 리가.”
드디어 후궁에 행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선제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기다려야 했다! 나 의정이 꼭 보름은 더 참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잠깐의 즐거움을 탐하다가 여생을 송두리째 망쳐서야 안 될 노릇. 하니 참는 수밖에 없지만 달아오른 마음을 어쩌지 못하여 이렇게나마 그 흥분을 가라앉혀 보려는 것이었다.
정 황후는 짧게 웃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정선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 순간 태자의 원대한 계획이 떠올라 눈이 차갑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