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0화
능주.
요즘 능주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양왕이 하필이면 능주로 도망 온 탓이었다.
능주의 탕 지부는 놀라는 한편 반가웠다. 양왕이 태자의 눈엣가시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니던가. 만약 자신이 양왕을 잡아 바치면, 몇 년 뒤 황제가 된 태자가 지금의 공로를 잊지 않고 도성으로 불러 줄 것이었다.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난 탕 지부는 포졸을 시켜 성문을 앞뒤로 굳게 걸어 닫고 양왕을 수색하는 한편 조정에도 보고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성문이 열렸다. 그간 사람이든 물건이든 성 안팎을 오가지 못하는 통에 고생했던 상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환호했다.
하나 그들이 성문을 나가기도 전에 포졸들이 가로막았다. 상인들은 그제야 알았다. 문을 연 까닭이 자신들을 내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도성에서 온 군사를 들이기 위함이라는 것을!
탕 지부가 포졸들을 이끌고 성문에 나가 삼각 정도 기다렸을까. 지친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대인, 아직 오지 않으니 시원한 곳에서 쉬고 계십시오!”
땅딸막한 참모가 말하자 탕 지부는 정색을 하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본관이 쉬고 있을 때 군사가 도착하면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지겠는가?”
“성문 밖에 사람을 보내 누가 오면 보고하게 하시지요.”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나!”
“허허, 다들 금방 올 줄 알았지 않습니까.”
참모는 탕 지부가 저를 흘겨보자 웃음으로 무마하며 포졸을 성문으로 보냈다.
탕 지부는 마음이 급해졌다. 양왕을 직접 잡을 수 있다면 혼자 큰 공을 세우는 셈이지만, 그런 능력은 없으니 도성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막 자리를 옮겨 쉬려는 찰나, 성 밖으로 나간 포졸이 소리치며 뛰어왔다.
“옵니다!”
탕 지부가 벌떡 일어나자 포졸들도 가지런히 도열했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탕 지부가 목을 길게 빼고 내다보니 멀리서 두 줄로 선 군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선두에선 화려한 갑옷을 입고 준마를 탄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위풍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탕 지부는 그를 보자마자 흥분하여 다가갔다.
“후야를 뵈옵니다!”
뒤따른 포졸들도 우르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고, 주운환은 말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시오.”
탕 지부는 실실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후야,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후야의 환영 연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소. 그럼 가지.”
포졸이 끌고 온 말에 낑낑대며 올라탄 탕 지부는 한 걸음 뒤에서 주운환을 따라 성으로 향했다. 주운환의 군대가 모두 들어서자 성문은 다시 닫혔다.
“단서는 찾았소?”
주운환이 묻자 탕 지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왕 이 역적 놈이 꼭꼭 숨었습니다. 능주가 도성만은 못해도 성 내에 백성이 많아 색출해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후야가 오셨으니 소관은 이제 안심입니다. 하하하. 이제 열심히 후야를 도와 역적을 꼭 잡겠습니다.”
주운환은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지부가 수고해 주시오. 그리고 지부가 양왕을 잡는다면 내 반드시 조정에 그렇게 보고할 테니 걱정 마시구려.”
“…네!”
탕 지부는 조금 놀라더니 금세 신이 나 대답했다. 대제의 영웅은 다르긴 다르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보통 위에서 내려와 죄인을 잡으면, 아랫사람이 잡더라도 위에서 공을 모두 채 간다. 모두들 냉가슴만 앓고 있을 뿐인데, 이 이야기를 주운환이 먼저 꺼낼 줄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이는 곧 주운환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진서후는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더니, 과연 소문이 맞았다!
탕 지부는 매우 흥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부하들을 더 독촉해 더 열심히 수색하게 하는 일뿐이다!
한편, 앞서가는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수묵단청처럼 맑은 눈동자가 빛났다. 이제 탕 지부는 매일 자신을 쫓아다니며 잘 보이려 애쓰지 않고 그 대신 수색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일행은 곧 성부 관아에 도착했다.
관아는 보통 세 구역으로 나뉜다. 공무를 보는 곳이 앞쪽에 있고, 뒤쪽은 동원과 서원으로 나뉘는데 동원은 지부가, 서원은 위에서 내려오는 귀빈이 거주하는 처소로 사용한다.
탕 지부는 서원으로 주운환을 인도한 다음, 미리 대청에 마련해 둔 자리에 앉혔다.
주운환의 호쾌한 됨됨이에 마음을 푹 놓은 탕 지부는 계속해서 주운환과 술잔을 나누었다. 옆에서는 악사가 음악을 계속해서 연주했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자자, 어서 후야의 시중을 들어라!”
탕 지부가 손뼉을 치자 곧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들어와 수줍게 인사했다.
“후야를 뵈옵니다.”
눈빛이 어두워진 주운환이 차갑게 웃었다.
“탕 지부, 나는 일을 하러 온 것이니 이런 방탕한 짓은 필요 없소이다.”
탕 지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자리에서 미인이 시중을 들어 주면 하나같이 기뻐했는데! 진서후가 이토록 올곧은 사람일 줄이야.
탕 지부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한층 더 진서후에게 탄복하며 두 손 모아 사죄했다.
“소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모두 물러가라.”
두 여인은 크게 실망하면서 주운환을 힐끗 보고 나갔다.
“지부는 맡은 일만 잘하면 되오. 늦었으니 나는 이만 쉬고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수색에 나서겠소.”
말을 마친 주운환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탕 지부도 급히 일어나 뒷모습에 대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여양은 주운환을 따라가지 않고 탕 지부에게 다가갔다.
“후야는 원래 원칙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낯선 이의 시중을 싫어하시니 이곳에서 기거하시는 동안 바깥 사람은 물론 대인이나 포졸도 출입을 삼가 주십시오. 보고할 일이 있으시면 처소 바깥을 지키는 사람을 통해 전해 주십시오.”
“알겠소.”
탕 지부는 흠칫 놀라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양은 탕 지부가 자리를 뜬 후 인마를 배치했다.
* * *
능주 성부의 어느 평범한 집.
스무 살 남짓한 젊은 남녀 한 쌍이 멜대를 메고 들어와, 멜대는 뜰에 던져 놓고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화려한 분위기의 미남자가 팔선상에 앉아 천천히 차를 따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의 하배가 그에게 다가갔다.
“진서후가 벌써 성에 도착했습니다! 성을 빠져나갈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스무 살 남짓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전하. 진서후는 몹시 간교한 자라고 합니다. 잇따른 위기도 연거푸 헤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또, 전 경위영 통령 오일의가 몇 년이나 쫓던 비적 떼도 얼마나 잘 숨어 다녔습니까? 그런데 진서후가 나서자마자 일망타진하였지요. 진서후의 정찰 능력은 정말 뛰어납니다.”
양왕은 살짝 웃으며 따라 놓은 차를 이들 앞에 내밀었다.
“그렇다. 진서후는 문무를 겸비한 데다 못하는 게 없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벌써 급제하고 후야에 오를 수 있었겠나. 대제 역사에 유일무이한 사내일 걸세.”
양왕이 주운환을 칭찬하자 두 남녀는 어쩔 줄 몰라 서로 바라보다가 하배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적에게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여기 더 계시다가는 그자 손에 죽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양왕은 오히려 조급해하는 하배에게 웃어 보였다.
“잘 쉬어 두게. 내일은 중요한 손님이 찾아올 테니.”
하배는 어두운 얼굴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공수한 후 여자와 함께 돌아 나왔다.
양왕이 백주에서 데려온 사람은 하배까지 총 서른 명이었다. 수는 적지만 각자의 능력이 출중해 위기를 잘 모면할 수 있었고, 사람이 적으니 숨기에도 좋았다. 그 결과, 양왕은 별반 피해를 입지 않고 능성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능성에 도착할 무렵, 주 선생이 의도적으로 소식을 흘렸고, 기대대로 미끼를 덥석 문 탕 지부가 성문을 굳게 닫아건 것이다. 그러나 하배 등은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하배 곁의 여자는 그의 부인, 주영이었다. 부부는 등짐장수로 꾸미고 양왕, 주 선생 등과 함께 이 집에 머물렀고 다른 사람들은 행상으로 가장해 외곽에 흩어져 있었다.
“이제 어쩌죠?”
“뭘 어쩌겠소. 이 ‘귀한 손님’을 어찌 대접할지 고민해 봐야죠!”
본채를 나서며 주영이 묻자, 하백이 고민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양왕이 말한 귀한 손님이 주운환임은 알아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전하께 분명 무슨 수가 있는 것 같아요. 설령 뾰족한 수가 없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먼저 상황을 지켜봐야 해요. 그런 다음에 숨든지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요.”
주영의 말에 하배가 낮게 신음하다 한숨을 쉬었다.
“잡시다!”
부부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하배와 주영은 장사를 나가지 않고 집을 지키고 있었다.
탁자에는 죽과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주 선생, 언서, 언동, 수풍이 한데 서 있고, 하배와 주영도 그 곁에 있었다.
양왕은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들고 있었으나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하배는 애간장이 타는 탓에 얼굴이 다 창백했다.
“전하.”
그때, 밖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무명옷을 입은 땅딸막한 사내가 들어왔다.
“포졸과 도성 병사들이 일찍부터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있습니다. 진서후가 도성 병사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는 중입니다!”
하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전하, 어서 몸을 피하시지요.”
“본왕은 주운환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양왕의 차가운 대답에 하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땅딸막한 남자 역시 창백해져 다시 뛰어나가더니, 이각이 흐른 후 다시 뛰어 들어왔다.
“벌써 이 앞 유씨 집까지 왔습니다. 어서 떠나야 합니다!”
“아니에요. 지하실로 숨으세요. 지하실은 숨으려고 파 놓은 것 아닌가요?”
주영이 다급히 지하실을 언급해도 양왕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러기 무섭게 밖에서 발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 울타리 주변에 언뜻언뜻 사람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 이미 집 전체가 포위된 상황이었다! 초조해진 주영이 다시금 양왕을 설득했다.
“어서요, 동굴로 숨으세요!”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쾅! 대문을 걷어차 열어젖혔다.
모두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젊은 미남 장군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장군의 칼날 같은 미간은 서리가 내린 듯 매서웠고, 타는 불꽃 같은 갑옷은 그를 더욱 강인해 보이게 했다. 무엇도 이 젊은 장군의 특별한 풍채와 분위기에 필적할 수 없을 듯했다.
주운환의 위엄 있는 모습에 하배 내외의 몸이 꼿꼿하게 굳었다.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외쳤다.
“진서후다!”
“이 개자식!”
하배는 검을 뽑아 들었다.
가슴에 포부와 이상을 품고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백전백승의 장군에 탄복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운환은 바로 그런 영웅이었다.
하배 일행은 감탄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운환이 자신들에게 다가오자 마음속에서는 원망이 무엇보다도 거세게 솟아올랐다. 지금 주운환은 망할 황제에게 충성하는 적이었기에, 속이 타고 노여운 나머지 하배는 반사적으로 욕을 쏟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