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9화
“계획이 있으십니까?”
여한이 묻자 엽연채의 붉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바깥에 양왕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더냐?”
혜연이 고개를 저었다.
“많지는 않아요. 그냥 욕하는 거죠. 성문을 단단히 감시하는 이유를 물으니까 누군가 양왕 때문이라고 대답했대요. 그래서 다들 양왕이 불효자라느니 태자를 독살하려 했다느니 나오는 대로 욕을 하고 있어요. 마님의 간식을 사러 회미천하에 갔다가 조금 들었어요. 다들 임자라도 만난 것처럼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더라고요.”
엽연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사람을 몇 명 써서 부채질을 좀 하자. 사람들을 시켜서 더 심한 욕을 하게 해. 양왕이 불효자라든지 태자에게 독을 써서 형제를 해하려 했다든지……. 음,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퍼뜨려 봐.”
혜연과 여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여한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마님이 이때다 싶어서 사사로운 원한을 푸시려는 거야?
“마님… 양왕 전하는 앞으로 황제가 되실 분이니 명성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래도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면 민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아니야. 분명 네 말대로 민심은 얻지 못할 거다. 하지만 정점을 찍으면 상황은 변하는 법이지…….”
엽연채는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고 여한과 혜연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라 눈이 반짝였다. 여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마님!”
지금은 모두들 양왕을 불효자라고 욕하고 있지만 태자가 반란을 일으키면 백성들은 누가 진짜 불효자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양왕이 특별히 뭔가를 안 해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동정표를 보내고 끝내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래, 가 보렴.”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여한이 뛰어나갔다.
오후가 되니 양왕을 향한 갖가지 나쁜 말이 도성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궁 안까지 소문이 들려와 정 황후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절로 소 황후를 떠올렸다. 그 옛날 누구나 우러러보던 소씨 가문과 그 집안에 더 큰 영예를 가져다준 딸. 그러나 지금은 집안이 패가망신한 지 오래고 그 딸 역시 죽고 나서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사 마마, 지금 소 언니가 하늘에서 보고 있을까?”
“분명 보고 있을 겁니다! 자기 아들인데 어찌 지켜보지 않겠습니까?”
사 마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 황후는 마음이 더없이 좋아져 자랑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맞는 말이야.”
달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자신이 가루가 되고도 모자라 자식들마저 모두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정말 연극보다도 더 재밌구나. 양왕도 악을 쓰고 있으니.”
정 황후의 이 말에 사 마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예,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양왕이 황후 마마께서 붙여 준 왕비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해 도망가면서도 데려갔단 사실이요.”
정 황후는 그를 비웃더니 하품을 했다.
“하지만 볼 만큼 봤으니 막을 내릴 때도 됐지.”
그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푸른 옷을 입은 궁녀가 들어왔다.
“황후 마마, 내일이 황제 폐하의 칙선입니다. 폐하께서 황후 마마도 칙선에 초대하셨습니다.”
“알았다.”
정 황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푸른 옷을 입은 궁녀가 나가자마자 정 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노인네… 그 나이에 아직도 여색이나 탐하다니, 어찌 죽을지도 모르고!”
* * *
삼월 중순.
정선제가 손꼽아 기다린, 본인이 직접 뽑는 수녀 간택이 드디어 시작됐다.
정선제는 흐뭇하기도 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저를 지지해 준 정 황후가 고맙기도 해서, 그녀를 향한 존중과 총애의 의미로 그 자리에 황후를 초대했다.
그날 아침 일찍 정선제는 아침 회의를 진작 끝내고 어화원으로 행차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봄기운이 완연했다. 어화원에도 수많은 꽃이 화려하게 피어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선한 꽃과 미인이 한자리에 있다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정선제는 어화원에 자리를 마련해 미인을 간택하기로 했다.
정선제가 어화원에 들어서자 정 황후도 마침 도착해 인사를 나눴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하하. 어서 일어나시오, 황후.”
정선제가 황후를 일으켜 세우고 부부는 자리에 앉았다.
싱글벙글하는 정선제를 보며 정 황후도 따라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냉랭했다. 질투에는 나이가 없다.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내 아들이 이미 자신의 힘으로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데 왜 내가 계속 참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정 황후의 뇌리를 뒤덮다시피 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채결이 술과 음식을 내오게 했다. 옆에 있던 악사들은 청아하고 섬세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채결이 술을 따르면서 정선제에게 뭔가 묻자 정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결이 곧 허리를 세우고 외쳤다.
“수녀들은 입장하라!”
황제의 어전까지 남은 수녀는 쉰 명이었다. 정선제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수녀들은 다섯 명씩, 총 열 개의 조로 나뉘어 있었다.
채결의 목소리에 따라 수녀들이 천천히 들어와서 하나씩 정선제 앞에 섰다.
정선제는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자기 눈앞에 줄지어 서 있자 점점 더 흥분되고 설레기 시작했다. 수녀들을 보자 열 살은 더 젊어진 기분이었다.
정선제의 몸 여기저기는 벌써 십수 년이나 제구실을 못 해 왔다. 그는 두 눈이 흐려져 수녀들을 또렷하게 볼 수 없다는 것과 그녀들을 전부 남겨 둘 수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다섯 명의 수녀가 한 줄로 서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드는 그 순간. 멀리 어좌에 앉은 황제가 보였다. 샛노란 용포를 입은 위엄 있는 모습. 하지만 새하얀 머리카락과 흐릿한 두 눈, 주름이 가득한 얼굴. 못해도 여든을 훨씬 넘긴 노인 같았다.
수녀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두 명은 아예 창백해졌고 나머지 셋도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채결은 명부를 들고 읽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정선제는 고개를 숙이고 붓을 들어 눈앞에 놓인 명부 중 한 사람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정 황후는 정선제가 수녀들 중 제일 예쁜 사람을 고르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비웃었다.
다시 세 줄이 지나고 다섯 번째 조의 수녀들이 들어왔다.
정선제의 흐릿한 눈에 놀라는 기색이 스쳤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자리, 그곳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청아하고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다. 맑은 샘물처럼 보기 드물게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 정선제는 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선제가 고개를 숙여 명부를 확인하니 이 미인의 이름은 소자금이었다. 이름마저도 아름답구나! 정선제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후 정선제는 여섯 명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렇게 이번 간택에서 총 열두 명이 뽑혔다. 정 황후는 즉시 환관을 시켜 궁 밖의 태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 * *
태자부. 태자의 서재.
태자는 송초, 노인 한 명과 함께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환관이 가져온 서신을 보았다. 서신에는 명부가 적혀 있었다.
태자는 명부를 책상에 펼쳐 놓고 훑어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염치도 없는 늙은이. 열두 명이나 간택하다니, 소화나 할 수 있나?”
푸흡, 이계와 노인이 참지 못하고 조소했다.
태자는 손가락으로 명부의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번 내가 알아보라고 한 사람들 중 네 명이 간택됐다.”
태자가 송초를 쳐다보았다.
“알아보았나?”
“네.”
송초가 작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마침 전하께 보여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태자는 책자를 뒤적거리다 소자금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 여자다!”
송초와 노인이 즉각 반응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전하.”
“소신이 보기에도 모든 수녀들 중 소씨가 제일 어울립니다.”
책자에는 그녀의 신상과 평소 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칭주 거상의 적장녀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생모가 죽고 계모 아래서, 동복의 친형제나 자매도 없이 외롭게 살아왔다.
그나마 그녀의 생모가 죽기 전 그녀를 일찍이 정혼시켜 주었는데, 정혼자 또한 상인 집안으로 소씨 집안만큼 크지는 않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는 집이었다. 그리고 소자금은 이 정혼자와 정이 두터워 서로 다정하게 지내 왔다.
하나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수녀를 간택하겠다고 공표했고, 각 주부에서는 앞다투어 미녀를 진상했다. 소자금은 칭주에서 이름난 미인이라 칭주 지부도 소씨 집에 가서 수녀 간택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소자금의 미모라면 반드시 간택될 거라고 장담도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소자금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문에서 황비가 나오기를 간절히 꿈꾸게 됐고, 여태 밥이나 축내던 쓸모없는 딸을 이용할 곳을 드디어 찾은 기분이었다. 그는 당장에 혼사를 무르고 소자금을 수녀 간택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정혼자는 소씨 집으로 가 한바탕 난리를 쳤지만 오히려 흠씬 두들겨 맞아 크게 다치고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렸다고 한다. 지부는 사람을 시켜 이 일을 감추고 그녀의 정혼자는 병으로 죽은 것이라 했다.
참다못한 정혼자의 부모가 가서 따졌지만, 지부는 오히려 이들 부부에게 매질을 가했을뿐더러 장사도 못 하게 해 아예 칭주 성부에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자금은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다.
태자는 소자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은 수녀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고 가지고 있는 분위기도 좋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수녀들이 정식으로 시침을 들면 그 늙은이는 분명 소자금을 빼놓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기회다!
“이 여자를 봐라!”
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절망한 모습을. 하하, 어쩌면 지금도 정혼자의 부모 때문에 죽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계, 어마마마께 서신을 보내 소자금에게 홍앵을 붙여 놓으라 말씀드려라.”
“알겠습니다.”
이계는 대답을 하자마자 서재를 나갔다.
수녀들은 모두 양민 출신이라 궁중 법도를 한 달 꼬박 배워야 겨우 시침에 들 수 있었다. 그런 후에야 정식으로 책봉을 받지만, 그녀들의 시중을 들어 줄 어린 궁녀는 먼저 붙여 놓았다.
* * *
진서후부.
엽연채는 마음이 허해 조용히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러나 흥이 나지 않아 놓는 둥 마는 둥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주운환이 매일 자기를 붙들고 성가시게 해 그림이나 자수도 못 하겠다고 불만을 토하기도 했는데, 막상 그가 떠나고 없으니 자수도 그림도 생각이 없었다.
“부군은 능주에 도착했겠지?”
“도착하셨을 거예요.”
혜연이 자수 실을 꿰면서 대답했다. 그때 밖에서 청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여한이 왔습니다.”
“들어와라.”
여한이 주렴을 거두며 들어와 인사했다.
“마님을 뵈옵니다. 방금 답신을 받았는데 나리께서 벌써 능주에 도착하셨다 합니다.”
엽연채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양왕 전하의 소식은?”
“나리 일행이 능주로 가는 길에 능주 포졸이 찾아와, 양왕 전하와 능주 지부가 여러 차례 교전하였지만 전하가 도망치셨다고 보고했답니다. 그에 지부는 앞뒤로 성문을 굳게 걸어 닫고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있답니다. 나리가 오셔서 독 안에 든 쥐를 잡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여한의 말에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정말 독 안에 든 쥐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