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8화
회미천하.
태자는 서둘러 2층의 난화 귀빈실로 들어갔다. 서서 기다리던 주운환이 태자에게 인사하며 예를 갖췄다.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나라.”
태자가 바로 그를 잡아 일으켰다.
“전하, 무슨 일로 소신을 찾으셨는지요?”
태자의 두 눈이 반짝였다.
“진서후. 지난번 자네가 어서 황제가 물러나면 좋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주운환은 결연한 표정으로 태자를 보고 있었다.
“자네는 병사를 이끌고 능주에 도착하면 언제든 궁에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도록.”
주운환의 차가운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행동에 옮기시는 겁니까, 전하?”
“맞다. 능주는 도성과 가깝다. 양왕의 일은… 우선 신경 쓰지 말아라. 기회가 되면 죽이되 급하지 않은 일이다. 최대한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병마를 준비해 두고 때가 되면 내 명령에 따라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운환은 공수하고 자리에서 나갔다.
태자는 주운환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수녀 쪽에서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하나씩 하나씩 곧 행동에 옮길 것이다.
태자부로 돌아온 태자는 송초를 불러들였다.
“수녀 쪽 상황은 어떤가?”
송초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 오후였다. 그 수녀들은 오늘 아침에서야 골랐는데, 어떻게 그리 빨리 소식을 알아 오겠나.
“전하께 아뢰옵니다. 소신들이 각 주부의 관아에 서신을 보내 두었으니 곧 원하시는 수녀들의 자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는 각 주부 관아에 정보원을 심어 두었다. 뭔가 조사하고 싶을 때는 정보원들에게 서신을 보내면 그들이 조사한 후 전서구를 날려 도성에 결과를 알렸다.
“진서후가 황명을 받아 양왕을 잡으러 도성을 떠났다, 하하.”
태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았고, 송초도 크게 기뻐했다.
“정말로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입니다! 소신은 진서후가 계속 도성에 남아 있는 것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만에 하나의 일이 생기면… 어휴, 도성을 빠져나가느라 시간이 또 지체될 것입니다. 이제 진서후가 병마를 이끌고 도성을 떠났으니 큰 그물을 펼친 셈입니다. 전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진서후가 도성으로 공격해 들어올 겁니다.”
태자는 확신에 차 한마디를 툭 뱉었다.
“하늘까지 본궁을 돕고 있다.”
* * *
주운환은 회미천하에서 엽연채에게 줄 간식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평상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다가 하인이 나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깥의 주렴이 촤르륵 열리더니 정말로 주운환이 고급스러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부인.”
엽연채가 활짝 웃었다.
“회미천하의 간식이네요.”
요즘 엽연채는 회미천하의 간식에 빠져 있어 상자만 보고도 알아봤다.
주운환은 항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열어서 엽연채 앞에 내밀었다.
엽연채는 입가를 움직이며 내려다보다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상자 속에는 노릇노릇한 오리 다섯 마리가 놓여 있었다.
“회미천하에서 언제부터 이런 걸 만들었어요?”
“내가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압자고는 북쪽의 진귀루에서만 만드는데 거기는 너무 멀어서 회미천하에 만들어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어요.”
엽연채는 얼굴을 굳힌 채였으나 주운환은 환히 웃으며 말을 보탰다.
“압자고 먹은 지 오래됐잖아요.”
엽연채는 잠깐 입을 씰쭉이다가 결심을 내렸다.
“부군,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해 봐요.”
주운환은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넸고, 엽연채는 턱을 치켜들고는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압자고를 가리켰다.
“난 사실 이거 안 좋아해요.”
“난 좋아해요.”
“그럼 당신이 먹어요.”
“부인이 먹는 게 보고 싶은걸요.”
살짝 짜증이 난 엽연채가 그를 쏘아보는데도 주운환은 하나 집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먹어 봐요. 자, 아 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가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엽연채는 마음이 흔들려 곧 꿀꺽 받아먹었다. 주운환은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맛있어요?”
“네.”
엽연채는 오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상 해 주는 빈말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정말로 맛있었다.
한편, 차를 가져오던 혜연은 이 모습을 보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압자고를 먹으면서도 세상 제일가는 진미를 맛보는 표정이라니, 마님이 나리에게 흠뻑 빠진 게 틀림없었다!
오리 다섯 마리를 하나씩 엽연채의 입에 넣어 주고 나서야 주운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차를 먹이고 손수건을 건넸다.
“참, 폐하는 갑자기 왜 부군을 부르신 거예요?”
엽연채가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주운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
“폐하께서 능주로 가서 양왕을 잡아 오라 하셨습니다.”
“네?”
엽연채는 하마터면 벌떡 일어설 뻔했다.
“양왕 전하가 능주로 돌아오셨어요?”
“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찌푸렸던 미간을 다시 폈다. 반면, 엽연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왔다! 드디어 돌아왔다! 양왕의 복귀는 곧 큰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곧.”
주운환이 입을 떼며 살포시 그녀를 안았다.
“태자도 행동을 시작했어요. 양왕 전하도 움직이고 계시고, 한 달이면 모든 일이 마무리될 겁니다.”
엽연채도 그에게 기댔다. 지난 일 년 동안 어마어마한 일들을 수없이 보고 겪었지만, 그 와중에도 양왕과 주운환의 대사가 걱정되어 언제나 마음을 졸였다.
“그동안 부인을 너무 불안하게 했습니다.”
주운환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오자 엽연채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것보다는… 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더 많았어요.”
그를 만났기 때문에.
“나도 그래요. 대사가 끝나고 아기도 태어나면 우리 응성으로 갑시다. 얘기한 대로 말 타는 것도 가르쳐 주고 내가 싸워서 지켜 낸 곳도 데려가겠습니다.”
“좋아요.”
두 사람이 잠시 끌어안고 있는데 밖에서 여양이 재촉해 왔다.
“나리,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주운환은 바깥을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엽연채를 바라봤다.
“이제 가 봐야 해요. 도성의 일은 다 손을 써 놨지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정말로 부인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지만 부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또 없어요.”
“걱정 말아요, 부군. 도성은 제가 잘 지켜보고 있을게요.”
“여한이 남아서 당신의 지시를 따를 겁니다. 나에게 알릴 것이 있으면 여한에게 서신을 보내라고 해요.”
당부를 마친 후, 주운환은 엽연채를 꼭 안고 입을 맞췄다.
“부인, 가 볼게요. 돌아올 때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겁니다.”
그렇게 주운환은 집을 나섰다.
코를 훌쩍이는 엽연채는 너무나 아쉬워 수화문까지 나가 배웅하며 주운환이 말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참, 부군. 꼭 회미천하에 들러서 토자포 두 개를 사 가요. 거기 토자포가 궁에서 만드는 것과 제일 비슷하니 조앵기에게 전해 줘요.”
엽연채는 조앵기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진짜 벗이라고 부를 사람이 몇 없었다. 고모나 엽미채는 기본적으론 가족이고, 그나마 사이가 좋은 벗이 조앵기와 제민이었다. 조앵기와 자신은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건만 조앵기는 늘 이쪽과 잘 지내고 싶어 했다. 자신도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아 마음을 주었고.
“알겠습니다.”
주운환이 대답과 동시에 채찍을 내리치며 떠났다. 엽연채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돌아갔다.
* * *
진서후가 양왕을 잡으러 도성을 떠난 일은 사실 백성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양왕이 도성 근처에 있단 소식을 접한 후로 정선제는 성문 경비를 삼엄하게 강화하고, 들고나는 백성들을 샅샅이 조사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백성들도 당연히 연유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남쪽의 역병 때문인가?”
“아니야, 성 밖에도 피난민은 별로 보이지 않더라고. 하니 남쪽 역병은 잘 관리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신출귀몰한 도적 같은 게 아닐까?”
“쉿……. 능주에서 온 친척이 그러는데 양왕이 능주에 나타나서 진서후가 잡으러 갔대.”
“양왕? 태자를 독살하려다 들켜서 도성에서 쫓겨난 그 양왕?”
“그래!”
백성들은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양왕은 선황후의 적자이니 신분으로 따지면 제일 정당하고 명분 있는 적통 후계자인데… 황제는 어째서인지 지금의 태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태자가 장자라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했다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구실이었다! 순서를 따진다면 노왕이야말로 장자였다.
하나 노왕은 적자가 아니니, 아마도 적자 두 명 중 나이가 더 많은 황자를 태자로 책봉했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소 황후의 자식인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이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 황제가 안목이 있었는지는 후대가 판단할 내용이었다.
따지자면 태자는 나이를 먹으며 너그럽고 현명해져, 일국의 태자에게 필요한 기품을 갖추었다. 물론 여러 가지 사건으로 그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백성들도 태자가 그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양왕은 태자보다도 못했다. 태자는 그래도 스스로를 잘 포장하기라도 하지만 양왕은 정말 엉망진창, 아닌 척 꾸밀 줄도 몰랐다!
종래에는 황제에게 거역하고 태자에게 독까지 쓰자 백성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태자는 효자라도 되지, 양왕은 천하의 불효자였다!
* * *
진서후부.
운연거 뜰의 해당화 나무 아래. 엽연채가 돌의자에 기대어 앉아 반투명한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고 있었다.
“오늘 정말 덥네.”
“마님, 그래도 부채질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청유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이렇게 농을 쳤지만, 혜연은 같이 맞장구를 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청유야, 점심에 교자를 먹게 주방에 가서 교 마마와 예쁘게 생긴 걸 골라 둬.”
“네.”
청유가 가볍게 뛰어갔고 그 뒷모습이 사라지자 혜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을 뗐다.
“마님, 오늘 밖에 나갔더니 들리는 소리라고는 죄다 양왕이 얼마나 나쁜지 헐뜯는 이야기뿐이더라고요.”
혜연은 살짝 한숨 지었다. 그녀도 양왕이 뼛속까지 못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지지하는 사람이다.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양왕… 그래, 정말 나쁜 놈이지.”
조앵기를 어찌나 집요하게 괴롭혀 왔는지. 그녀를 울지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그만 바라보는 불쌍한 토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떠올라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엽연채의 검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여한을 불러오렴.”
혜연은 흠칫했으나 나가서 곧 여한을 데려왔다.
“마님.”
여한이 인사를 올렸다.
“한 달 정도 후면 대사를 거행할 거다.”
엽연채가 조용하게 말하며 손에 든 부채로 자기 앞의 탁자를 살짝 두드렸다.
“우리도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