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7화
태자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심란해, 주묘서를 찾아갔다. 지난번 태자의 마음이 뒤숭숭할 때 주묘서가 그를 응원해 주었기에 중대한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무슨 일만 생기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묘언헌에 도착하니 주묘서가 마침 정원에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주묘서는 태자를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왔다.
“오셨군요, 전하. 녹지가 전하는 바쁘셔서 식사하러 오지 못하실 거라 했는데 말이에요.”
태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아무리 바빠도 애비愛妃와 함께 보낼 시간은 있소.”
“전하.”
주묘서가 태자의 팔을 끌어안고 기댔다.
“전하, 중요한 일은 다 끝내셨나요?”
언제 노황제를 죽여 태자가 황제에 오르고 자신이 황후가 되냐는 이야기다. 주묘서는 ‘조만간’이란 대답을 들을 줄 알았으나 막상 마주한 것은 어두워진 태자의 얼굴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당신이 수녀라면 간택되어 나중에 시침할 때 기분이 좋을까?”
“네?”
얼굴을 굳히고 있던 주묘서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하! 신첩이 사랑하는 것은 전하인데 어떻게 수녀 간택에 나가겠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야.”
“만약?”
주묘서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신첩은 싫습니다. 아바마마는 늙은 데다 얼굴도 추하고…….”
“하지만 황제이지.”
태자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강조했으나 주묘서는 입술을 실쭉거렸다.
“그래도 싫어요. 얼굴에 주름살만 가득하고 몸은 삐쩍 마른 나무껍질 같아서 생각만 해도 불쾌한걸요. 제가 만약 수녀라면 곧장 우물에 빠져 죽어 버릴 거예요.”
“하하하.”
태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 * *
쉰 명의 수녀가 3차 심사를 통과했다. 그들은 닷새 후 정선제의 선택만을 앞두고 있었다.
수원 옆 높은 누각. 태자와 송초, 이계가 서서 쉰 명의 수녀들이 궁중 마마들에게 기본예절 법도를 배우고 있는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녀들 모두 양민이라 예절 법도는 당연히 귀족들에게 비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 간택을 받아도 한 달간 궁의 법도를 익힌 후에 시침할 수 있습니다.”
이계가 이리 고해 오자 태자는 조롱하듯 웃었다. 시침? 그 늙은이가 할 수나 있을까? 차가운 태자의 시선이 수원에서 예를 올리는 수녀들에게 멈췄다.
그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두꺼운 책자를 든 전지신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전하, 모두 여기 있습니다.”
전지신이 건넨 책자는 수녀들의 명부였다.
태자는 두꺼운 명부를 받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명부에는 수녀들의 초상화와 본적 등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입궁하여 황제의 시침을 들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집안 식구는 어떻게 되는지, 정혼한 적이 있는지 모든 것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종이를 넘기던 태자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쉰 중에 서른이 넘는 이들이 정혼을 했었군.”
“당연한 일입니다. 황제 폐하의 춘추가… 흠흠, 입궁 후 수녀가 자라기까지 기다리시지는 못할 테니 수녀 나이를 열넷에서 열일곱까지로 정했습니다. 전하도 아시다시피 뽑혀 올라온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절세미인입니다. 열네 살이 넘고 외모도 그렇게 아름다우니 당연히 남자 집에서 마음에 들어 해 일찍이 정혼한 것이지요.
하지만 칙선勅選(황제가 직접 뽑음)은 큰일 아닙니까. 딸을 진상하고 싶어 하는 부모도 있고, 지역에서 미인을 내보내려 지부가 혼약을 깨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지신이 말했다.
“아바마마가 젊고 잘 생겼으면 또 모르지만 고희가 다 되셨다. 게다가 몇 년 전 중병을 앓고 나신 후로 팔순은 되어 보이시지. 하하하. 소녀들은 아름답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기 마련인데, 그 속이 어떨지 모르겠군.”
태자가 차갑게 내뱉으며 어젯밤 치를 떨던 주묘서의 언동을 떠올렸다. 수녀 간택에 들어오기 싫었을, 정선제에게 한이 맺혔을 수녀가 얼마나 될까 생각했다.
태자는 앞쪽의 주홍색 난간을 움켜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녀들은 앞에 선 마마를 따라 반복해서 인사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어떤 수녀들은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정선제가 아무리 늙었어도 황제이니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 몇몇 수녀들은 잔뜩 굳어 있거나 차가운 얼굴이었다.
태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수녀들을 살펴보다 셋째 줄 다섯 번째 수녀에게 눈이 멈췄다.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청순하고 단아한 미인으로 단연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녀는 잔뜩 굳은 얼굴에 두 눈은 초점 잃은 멍한 표정이었고, 몸도 마비된 것처럼 뻣뻣했다.
태자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가리켰다.
“저 여자는 누구냐?”
이계가 황급히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고 명부를 한동안 뒤적이다 대답했다.
“이름은 소자금, 방년 열여섯, 칭주 거상의 장녀입니다. 생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정혼했지만 아비가 간택을 신청하는 바람에 혼약이 파기되었습니다.”
태자의 눈이 빛났다.
“이 여자에 대해 알아봐라. 그리고 저 사람들도… 함께 조사해 봐라.”
태자의 손가락이 어두운 표정의 수녀 몇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송초가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태자는 다시 한번 내려다보다 뒷짐을 지고 자리를 떠났다.
태자가 누각에서 나와 봉의궁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저 멀리서 시위 하나가 어서방 쪽으로 급히 뛰어가는 것이었다.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그를 따라갔다.
정선제가 어서방에서 장계를 읽고 있는데 채결이 뛰어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냐?”
“능주 지부가 양왕의 종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라?”
정선제의 눈매가 매서워지더니 얼굴이 잔뜩 굳어 버렸다. 양왕을 생각하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양왕은 자신의 아들이다! 자신과 그녀의 아들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 어찌 마음 아프지 않을까.
다만… 이 나라는 양왕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태자만이 정통 후계자였다.
양왕에게도 이미 기회를 줬었지만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자신의 가르침과 사랑을 저버렸다. 도성을 떠난 것은 결국 역심을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하나 양왕을 떠올리면 늘 마음이 약해졌다. 차마……. 양왕 역시 자신이 아끼는 아들이었다.
“폐하?”
채결이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부르자 정선제는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미간을 문지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서후를 불러라.”
“알겠습니다.”
채결이 황급하게 나가다 문가에서 들어오던 태자와 마주치고 인사했다.
“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시위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가던데 무슨 일이냐?”
“그게…….”
채결이 머뭇거렸다. 정선제가 태자에게 감추지도 않겠지만 감히 법도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안에 계시니 들어가셔서 물어보십시오.”
“그래.”
태자는 어서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정선제가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이 몹시 언짢아 보였다.
“아바마마.”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불렀다.
정선제가 살짝 놀라면서 고개를 드니 위풍당당한 모습의 태자가 아래에서 근심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효성스러운 아들의 모습이지. 마음이 한결 편해진 정선제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왔느냐.”
“네. 한데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바마마.”
태자가 앞으로 다가와 염려를 토하자 정선제는 낮게 한숨 쉬었다.
“능주에서 양왕의 종적을 찾았다. 도성에서도 사나흘이면 닿는 거리다.”
태자는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예전에는 양왕이 두렵고 양왕을 살려 두는 정선제가 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양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은 바로 저 죽지도 않는 늙은이 정선제였다!
더군다나 이미 궁지에 몰린 양왕은 상갓집의 개처럼 의지할 곳 없이 대제를 떠돌 따름이었다.
지난번 북쪽에서 양왕에 맞선 것은 자신의 외가였다. 정씨 집안사람이 보고해 온 바에 따르면 양왕의 호위 무사는 열 명도 남지 않고 다 죽었다 했으니 양왕 따위는 이제 견제할 상대도 되지 못했다.
‘하! 양왕은 이제 그저 천한 목숨일 뿐이다. 지금 제일 시급한 일은…….’
칠흑 같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바로 저 노인이다!
한편, 태자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정선제는 잔뜩 구겨진 그의 미간을 보며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태자, 안심하거라. 훗날 네게 근심거리가 없도록 모두 짐이 책임질 것이야.”
“하하, 아바마마를 믿습니다.”
태자는 선한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훗날의 근심거리를 없애고 싶으면 당신이나 어서 죽어 주시지!’ 하는 마음이었다.
“진서후가 도착했습니다.”
그때,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주운환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나라.”
정선제가 손을 들었다.
“능주에서 양왕의 종적을 발견했다. 진서후 자네가 지금 즉시 사람을 데리고 가서 잡아 오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포하라! 다쳐도 상관없다! 생포할 수 없으면… 죽여라!”
수묵화 같은 주운환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지만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운환이 나가자 정선제는 호리호리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운하를 닮은 주운환은 어쩌면 정말 그녀의 환생일지도 모른다. 그런 주운환에게 양왕을 없애라 했다……. 하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이미 정해 놓은 길인지도…….
‘그래. 이것이야말로 운하의 뜻일지도, 소 황후의 뜻일지도 모른다. 불효를 저지른 양왕은… 아무리 핏줄이라도 대의를 위해 처리해야 한다!’
주운환이 사라진 방향을 보던 태자의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자신은 암살과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역에는 늘 위험이 따르는 법이라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달랐다. 천군만마 같은 주운환이 그 위험을 맡아 주고 있으니까.
‘만약 암살에 실패하면 주운환이 직접 병사를 끌고 들어올 것이다. 물론 암살이 실패해서도 안 되겠지만, 유비무환이다.’
장수가 전쟁터에 나서 적을 죽이려면 갑옷을 입어야 했고, 태자 자신의 갑옷이 바로 주운환이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이만 어마마마를 뵈러 가겠습니다.”
“그래, 가 봐라.”
정선제가 조용히 한숨을 지으며 그를 내보냈다.
태자는 공수해 인사하고 어서방을 나오면서 이계에게 일렀다.
“너는 진서후를 쫓아가 회미천하에서 본궁을 기다리라 해라.”
이계가 흠칫 놀랐다.
“그게…….”
“어서!”
태자가 소리치자 머뭇거리던 이계는 조용히 주운환을 따라갔다.
태자는 봉의궁에 잠시 앉아 있다 서둘러 궁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