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35화 (735/858)

제735화

“임 귀비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추궁하는 태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소인이 알아보니 그것이…….”

이계는 창백하게 질린 채로 말을 힘겹게 이었다.

“처음에 총 246명이 1차 간택을 통과해 내무부에서 그들의 숙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수녀들이 환관을 따라 숙소로 가던 중 가마 한 대가 다가왔는데 바로 임 귀비의 가마였습니다. 임 귀비가 지나가니 수녀들은 법도대로 예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수녀들이 수원秀園(수녀들이 지내는 곳)으로 들어간 후 임 귀비의 일등 궁녀 사천이 뛰어와서 수녀를 담당하는 환관에게 귀비 마마가 이곳을 지나가고 난 후에 머리에 꽂았던 삼색 보석이 박힌 잠簪이 사라졌는데 여기에 본 사람이 있느냐 물었다 합니다.

환관들이 본 적이 없다 했지만 사천은 피식 웃고는 ‘당신은 못 봤다 해도 이 곳의 수녀들은?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 중 누군가가 주웠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환관들이 서둘러 수녀들을 모두 불러내 귀비의 잠을 본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수녀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지만 사천은 고집을 꺾지 않더랍니다. 그길로 궁녀 네댓 명을 데리고 들어가 방마다 뒤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방에서 그 잠을 찾아냈다고요.”

태자와 송초는 굳은 얼굴이었다.

“제길, 네 말은 우리 사람이 임 귀비의 잠을 줍고도 이를 속였다는 말이냐?”

“전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하의 명령을 받드는 결사대입니다! 목숨도 버릴 자들인데 그까짓 잠을 탐해 일을 망쳤겠습니까?”

변명하는 송초의 얼굴은 납빛이었다. 한데 이계의 안색은 그보다도 더 안 좋았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이계의 말에 태자는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 돼 버렸다.

“아니면 뭐란 말이냐? 이 덜떨어진 놈, 어서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이계는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얼얼했다. 자신이 누군가! 태자가 가장 신임하는 심복 아닌가. 그런데 남 앞에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다니, 정말 난감해 죽을 지경이었다.

“사천이 방에서 잠을 찾아내고는 잠을 들고 누가 주운 것인지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수녀들은 전부 정색을 하고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천이 비웃으면서 ‘모른다 이거지! 저 방을 쓰는 사람들 모두 일어나라!’라고 했답니다.

수녀들 중 넷이 일어섰는데 거기에 저희 쪽 사람이 있었습니다. 잠은 그 방 창가 침상의 베개 밑에서 찾은 것이라 사천이 누구의 침상인지 물었지만 네 명 모두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태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침상 중 하나에서 찾았다면 그 창가 침상에서 자는 사람이 누군지 증명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단 말이냐? 누구의 짐인지 왜 알 수 없단 말이냐?”

이계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안전 때문에 수녀들은 개인 짐을 가져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막 방을 배정한 후라 수녀들이 아직 자기 자리를 정하기도 전이었습니다. 막 둘러앉아 그 이야기를 하려는데 사천이 불러낸 거라고요.

아무튼지 네 수녀 중 누구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버티니 사천은 몹시 화가 난 채로 임 귀비에게로 돌아갔고, 보고를 들은 임 귀비가 네 명을 전부 쫓아낸 겁니다.”

듣고 있던 송초의 눈꺼풀이 떨렸다. 태자는 우두커니 서서 몸에서 얼음장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본궁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계획이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구나……!”

송초는 이를 악물더니 순간 눈을 반짝였다.

“전하, 좀 더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지금 쫓겨난 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잘된 일?”

태자가 매섭게 쏘아보자 송초는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소신이 공들여 고른 세 사람이 하루 만에 모두 떨어진 것이 너무도 공교롭지 않습니까?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더니 참새가 뒤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격입니다!”

태자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

“무슨 소리냐? 네 말은 누군가 계획을 누설했다는 말이냐? 너냐? 아니면 너?”

태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송초와 이계를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뜻밖의 추궁에 송초와 이계의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이번 계획은 주운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너희들, 오로, 그리고 강일심뿐이다. 설마하니 너희 중 하나가 본궁을 팔아넘겼다는 말이냐?”

태자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들을 응시하니 송초와 이계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가다듬은 쪽은 이계였다.

“소인 생각에는… 그저 우연히 들어맞은 것입니다. 정말로 참새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해도 단 하루에 우리 쪽 사람을 세 명이나 떨어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인의 정체를 다 티를 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송초 역시 미심쩍었지만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이 공공의 말대롭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계획해야 합니다.”

“제길!”

태자는 세차게 책상을 내리쳤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구나! 하나도! 며칠만 지나면 그 노인네를 없애고 황제가 될 수 있었는데 공든 탑이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나가거라들!”

태자가 소리치자 송초와 이계는 더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 * *

그 시각, 진서후부.

엽연채는 책상에 엎드려 장명쇄 도안을 마저 그리고 있었고 주운환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궁에서 수녀들을 보고 온 걸로도 모자라서 집에서도 쳐다보고 있어요?”

엽연채의 말에 주운환이 미소 지었다.

“수녀들이 어디 부인만큼 예쁜가요.”

엽연채는 까만 눈썹을 살짝 올리나 싶더니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다행히 부군이 제대로 볼 줄 아네요.”

“물론입니다. 내 눈은 언제나 잘 보이는걸요.”

주운환은 손을 뻗어 엽연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살이 좀 올랐군요, 우리 부인.”

엽연채는 얼굴을 약간 굳히며 짜증을 냈다.

“부군이야말로 살쪘어요.”

주운환은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살찌니까 훨씬 귀여운걸요.”

이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주운환은 여양이 온 것을 알아채고 바로 물었다.

“어떻게 됐나.”

여양은 주렴을 걷고 들어와 대답했다.

“모두 잘되어 갑니다. 남은 사람도 쫓아냈습니다.”

주운환의 맑은 눈에 강렬한 냉소가 스쳤다.

“잘했다. 가 봐라.”

여양이 나가고 엽연채가 물었다.

“세 번째 사람을 벌써 쫓아냈어요? 어떻게요?”

“임 귀비 곁의 사천이라는 궁녀가 실은 양왕 전하의 사람입니다. 양왕 전하께서 도성을 떠나기 전 사천 같은 비밀 정보원들에게 지시를 남기셨어요. 특정한 부호가 그려진 서신을 받으면 쓰인 대로 행동하라고요. 그래서 궁 안의 정보원들은 모두 내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 명을 모두 떨어뜨렸으니 태자 쪽에서 의심하지 않겠어요?”

엽연채가 고개를 기울이고 주운환을 쳐다봤다.

“실즉허, 허즉실. 진짜가 허구 같고, 허구가 진짜 같죠. 우리의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니 도리어 의심하기 어려울 겁니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자, 침상으로 가 쉽시다.”

“네?”

엽연채는 그림 그리던 붓을 들고 뚫어져라 주운환을 쳐다봤다.

“지금요?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데 뭘 쉬어요?”

“잘 쉬어야죠. 먹고 싶은 건 침상에서 드십시오, 자.”

말을 마친 주운환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오랜만에 안아 보니 우리 철단이가 많이 큰 걸 알겠습니다.”

들고 있던 붓을 땅에 떨어뜨린 엽연채는 손가락으로 주운환을 쿡쿡 찌르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운환은 엽연채를 침상에 누이고 바깥쪽에 기대어 여전히 싱글댈 뿐이었다.

“요즘도 입덧이 심해요?”

엽연채가 가슴을 쓸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낮에 내가 없는 동안 다리에 쥐가 나지는 않습니까?”

저녁에 엽연채 다리에 쥐가 날 때면 주운환이 밤새 주물러 줬다.

“네, 괜찮아요.”

엽연채가 고개를 흔들자 주운환은 입을 맞추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이가 더 똑똑해지면 좋겠어요?”

“그럼요.”

엽연채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후, 알겠습니다. 내일 나 의정에게 가서 몸에 좋은 약선 죽을 해 달라고 할게요.”

“좋아요.”

부부는 서로를 다정히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었다.

* * *

이튿날 아침, 2차 수녀 간택이 시작되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운환과 상관수가 감독을 맡았다.

정오까지 백여 명을 뽑았다. 내일 다시 여지, 전지신과 내무부 총령이 쉰 명을 선발하면 정선제가 그중에서 직접 뽑을 것이다.

수녀 간택이 끝난 후 주운환은 상관수와 함께 동지원을 나갔다.

주운환은 상관수와 헤어진 다음, 태의원을 찾았다. 그는 나 의정에게 아이와 임산부에게 좋은 약선 처방을 물어보고 귀가했고, 나 의정은 정교한 함을 들고 정선제의 침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하.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의정.”

수녀 간택 때문에 정선제는 요 며칠 구름 위에 뜬 듯 신이 나 있었다. 게다가 나 의정이 지어 준 약까지 먹으니 혈색도 좋아지고 기운도 넘쳤다. 정선제는 나 의정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반갑고 흐뭇했다.

“폐하, 탕약을 보름간 쓰셔서 이제 용체는 벌써 안정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매일 한 알씩 환약을 드시면 됩니다.”

나 의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정선제는 나 의정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세심하다 생각했다. 탕약이 아무리 몸에 좋더라도 써서 마시기에는 불편한 법이었다. 환약으로 바뀐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의정, 이리 와 짐과 한 판 두지. 한데 오늘은 좀 늦었군?”

정선제는 갈수록 나 의정이 가깝게 느껴졌다. 지난번 바둑을 둔 후로는 매일 점심 식사 후 나 의정과 한 판씩 두었다.

나 의정은 가져온 함을 채결에게 건네고 한 발 다가섰다.

“진서후가 찾아와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진서후?”

정선제는 바둑통을 앞으로 끌어오더니 흰 돌을 몇 개 집어 바둑판 위에 놓았다.

“진서후가 무슨 일로?”

나 의정은 검은 돌 두 개를 집어 바둑판에 올려놓았다.

“진서후 부인의 임신증이 심한지 후야가 보양 음식을 알려 달라고 일부러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 임신증이란 것이 큰 병도 아니고 특별히 임신증에 좋은 약도 없어서 저도 별말씀을 못 드렸, 오……! 아닙니다. 막북한련漠北寒蓮이라고 임신증에 잘 듣는 약이 하나 있지만 구하기가 몹시 어려운 것입니다.”

막북한련. 아는 이름이 나오자 정선제는 새하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물었다.

“짐의 약방에 몇 뿌리 남아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나 다섯 뿌리뿐입니다.”

“그게 짐의 약에 필요한가?”

나 의정은 소리 내어 웃더니 아니라고 했다.

“귀한 약재이지만 부인들에게만 사용합니다.”

정선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이내 웃으며 채결에게 말했다.

“약방에 가서 두 뿌리를 꺼내 진서후부에 가져다주거라.”

“네.”

채결이 물러나고 정선제는 싱글벙글하며 검은 돌을 쥐었다.

“허허, 오늘은 짐이 검은 돌로 하지.”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주운환을 떠올리고 있었다.

주묘서가 태자부로 시집간 후로 주운환도 태자와 가까워졌다. 자신은 늘 태자에게 마음을 쏟아 왔고 언제나 그를 후계자로 키우는 데 심혈을 쏟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주운환이 태자와 잘 지내는 것은 상관없지만, 충성은 자신에게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자신은 얼마 전부터 계속 주운환을 의심해 왔다. 비적부터 갈란군주까지 여러 일을 겪었으니, 주운환도 당연히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지난번 엽연채 생일에 선물을 내리고, 이번에 약도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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