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3화
이튿날 아침, 주운환은 여느 때처럼 조정에 들어갔다.
진시辰時(오전 일곱 시에서 아홉 시 사이)가 되어서 일어난 엽연채는 장명쇄를 이어 그렸다. 그때 여종이 그녀에게 서신을 가져다줬다. 엽균의 혼인 날짜가 유월 초사흘로 정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오시午時(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한 시 사이)가 되자 주운환이 퇴청해 집에 돌아왔다. 엽연채는 주운환을 방으로 끌어와 지난밤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쏟아 냈다.
“어젯밤 태자와 어떻게 됐어요?”
“어떻기는요.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주운환이 엽연채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어제 운을 띄워 놨으니 지금쯤이면 분명 수녀들 사이에 자객을 섞어 넣었을 겁니다. 남소제의 일처럼 꾸미려고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요?”
“우리 사람도 들여보내야지요.”
엽연채는 어리둥절해져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얘기예요?”
주운환의 눈에 냉소가 어렸다.
“태자 쪽 사람들을 다 쓸어버릴 겁니다. 그리고 내 사람을 뽑게 만들어야죠.”
주운환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엽연채를 향해 다감하게 웃어 보였다.
“부인은 집에서 태교에만 힘쓰십시오.”
주운환이 이편의 머리를 어루만져 오자 엽연채는 그가 더는 얘기하지 않으려는 줄 깨닫고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주운환이 유모는 어찌 됐냐고 물어오자 이내 눈을 반짝였다.
“아직요! 지난번에 봤을 때는 그냥 그래서 뽑지 않았어요. 참, 부군도 오랜만에 집에 있으니 저하고 같이 골라요!”
“좋아요.”
“청유, 청유야.”
엽연채가 밖을 향해 외치자마자 ‘끼익’ 문이 열리더니 청유가 뛰어 들어왔다.
“마님.”
요 며칠 무슨 일이 있는지 주인 부부는 둘이서만 방문을 꼭 닫고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렸다. 하지만 청유는 여종으로서 맡은 일에만 충실할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서 동씨더러 오라고 해 주렴. 식사를 하고 사람을 좀 뽑아야겠다.”
“네.”
청유가 나간 후 엽연채와 주운환이 반청에서 밥을 먹고 쉬고 있는데 혜연이 들어왔다.
“마님, 동씨가 왔습니다.”
“들여보내거라.”
엽연채가 대답하더니 주운환을 돌아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부군은 일단 나오지 말고, 이따 내가 몇 명 골라 이름을 물어볼 때 나와요.”
장난기 넘치는 그 모습에 주운환도 따라 크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혜연이 나가더니 곧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엽연채는 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가 계단에 섰다. 내려다보니 마흔 좀 넘은 듯한 둥근 얼굴의 여인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제일 앞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여종과 어멈들이 세 줄로 서 있었다.
여종과 어멈들은 엽연채를 보자마자 숨을 멈췄다. 눈앞에 선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진서후 부인이 도성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 보니 어떤 미사여구도 그녀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성싶었다.
“부인을 뵙습니다.”
동씨가 인사를 올리자 뒤에 선 이들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췄다.
“일어나게.”
“부인, 오늘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제가 세심하게 고른 이들이니 부인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동씨의 말에 엽연채는 가볍게 미소 지을 뿐, 그녀의 체면을 살려 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선 좀 보지.”
살짝 민망해하는 동씨를 두고 엽연채가 여종들을 살펴보니 모두들 이제 막 성인이 된 것 같았다. 지금 자신 곁에는 혜연과 청유 두 명의 일등 여종이 있고, 이등 여종은 백수와 소월 둘뿐이라 이등 여종이 두 명 더 필요했다. 또 앞으로 아기를 보살펴 줄 어멈과 유모도 이참에 같이 뽑아 두는 게 좋았다.
여종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엽연채는 마음에 드는 네 명을 골라 앞으로 불러 세웠다.
“너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소옥, 취란, 소방, 영아가 각자 이름을 대는데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고귀하면서도 위엄 있는 분위기의 미남자가 걸어 나왔다. 여종들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헉 소리를 내더니 주운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엽연채가 헛기침을 하며 여종들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떠보는 수법은 뻔하지만 효과적이었다!
앞으로 불러 세운 여종 중 셋은 주운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딱 한 명은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뒷줄의 여종 중에서도 최소한 당장 보기에는 자제력이 있을 성싶은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엽연채는 앞줄에서 고개를 숙인 여종을 가리키며 불렀다.
“너.”
그리고 조금 전에는 고르지 않았던, 뒷줄에 선 각진 얼굴의 여종도 가리켰다.
“너.”
동씨가 멋쩍게 웃었다.
“쓸 만한 사람이 둘은 되니 소인도 체면은 차렸습니다.”
한평생 노비를 사고판 그녀도 사람들이 어떻게 여종을 고르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여종들에게는 알려 줄 수 없다. 모두 이 방법을 알게 되면 사고자 하는 이가 사람을 분별할 수 없게 되니, 자신이 능력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이 장사도 못 해 먹을 것이었다.
주운환이 앞으로 나와 엽연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우선 신변 여종 두 명만 먼저 뽑고 유모는 좀 더 기다려 봐요. 아이 보는 것은 교 마마에게 맡겨도 되잖아요. 그 경우엔 교 마마 대신 주방을 볼 어멈을 다시 뽑으면 되고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몇 명을 더 골랐다. 그러고는 방금 뽑은 신변 여종들 둘은 이등 여종으로 정하고 약정과 염정이라는 이름을 내려 혜연과 청유에게 교육을 맡겼다.
* * *
정선제의 수녀 간택 소집문이 각 주부의 관아에 도착하기 무섭게, 그곳의 우두머리들은 저마다 미녀를 뽑아 도성으로 보냈다. 수녀 간택은 먼저 호부, 예부, 내무부 세 부서가 함께 심사해서 3차에 걸쳐 쉰 명을 뽑고, 그 후 정선제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었다.
삼월 초아흐레. 각 주부에서 선발한, 5백 명이 넘는 미인들이 도성에 도착했다. 간택은 그 이튿날인 삼월 초열흘에 시작될 것이기에 미인들은 처소를 배정받았다.
이와 동시에 주운환도 양왕의 서신을 받았다. 양왕은 벌써 칭주에 도착해 보름 내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거의 비슷한 시각, 회색 전서구 한 마리가 나 의정 집의 뒤채로 날아들었다. 나 의정은 황급히 녀석을 안아 서신을 확인하더니 즉시 환복하여 입궁했다.
봉의궁.
정선제는 정 황후와 식사 중이었다. 내일이면 수녀 간택이 시작되니 예상대로 바깥의 백성들은 황제가 노익장을 과시한다며 입을 모아 떠들었고, 조정 대신들도 자신을 더 존경하는 것 같았다. 정선제는 기분이 한껏 고조돼 식사 내내 호방하게 웃어 댔다.
정 황후 역시 시종일관 웃는 표정이었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그러나 정선제는 들뜬 탓에 그 부조화를 알아보지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 침궁으로 돌아가 책을 읽었다. 황제를 향한 백성들의 시선이 변했으니 더 이상 매일같이 어서방에서 밤을 새울 필요가 없었다.
“나 의정이 왔습니다.”
이때,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들라 해라.”
정선제가 서책을 내려놓는데, 나 의정이 몸을 굽히고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하. 갑자기 무슨 일인가, 의정?”
정선제는 요즘 나 의정만 보면 절로 웃음부터 나왔다.
“폐하께서 지난번에 어떻게 요양하실지 묻지 않으셨습니까? 소신이 연구를 거듭하여 드디어 가장 효과적인 비방을 알아냈습니다. 시험해 보니 효과가 아주 뛰어납니다.”
“무엇이냐?”
정선제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수녀 간택은 솔직히 말하자면 허장성세에 불과했고, 감히 수녀들을 품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나 의정이 정말로 남자의 자존심을 세워 주겠다고 할 줄이야!
정선제는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손까지 떨렸다.
“나 의정……! 그대는 정말 화타의 재림이구나! 정말 짐의…….”
‘자네는 환생한 짐의 부모야!’
그러나 일국의 제왕이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으니 정선제는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이리 그를 추켜세웠다.
“좋아, 좋다! 언제부터 약을 먹을 수 있느냐?”
“언제든 좋습니다. 단지 보름은 잡수셔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좋아.”
보름이 아니라 반년이라도 정선제로서는 감지덕지였다.
“하하하, 좋구나.”
정선제는 눈썹마저 웃고 있었다. 더는 서책을 들여다볼 기분도 아닌 데다 나 의정이 너무나 기특하고 마음에 들어 그는 자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의정, 이리 와서 짐과 바둑 한 판 두지.”
“네.”
나 의정이 흑을 잡고 웃었다.
“내일이면 수녀 간택입니다. 새 수녀들이 입궁하면 폐하의 건강도 회복될 것이니 시기가 딱 들어맞습니다!”
“하하하.”
정선제는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다.
“다만 수녀들이 여러 단계를 거쳐 도성에 왔다 하지만, 양민의 자식들이니 사정이 조금 복잡할 것입니다. 사람을 고르실 때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 의정이 조심스레 충언을 올리자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다. 하나 짐도 벌써 분부를 내렸으니 걱정 말게나.”
나 의정은 다시 바둑알을 집어 들며 한마디 보탰다.
“예, 폐하. 비적 떼의 두목이 잡혀 사건도 해결되고 도당도 해체되었습니다만, 일부 잔당들이 아직 남아 여기저기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합니다. 비적들이 앙심을 품고 수녀 간택에 섞여 든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정선제는 깜짝 놀라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과연……. 짐이 호부, 예부와 내무부에 잘 고르라 다시 한번 일러두겠다.”
“하나 다들 문관이라서 정말 이상한 자가 섞여 있다 해도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수녀 간택 때는 무관이 간택장을 감시했다 들었습니다. 무관은 의심되는 자가 있으면 알아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멈칫하던 정선제가 이내 손뼉을 짝 쳤다.
“좋은 생각이네, 의정.”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 무관 두 명을 시켜 지켜보게 하면 자신도 청심환을 먹은 것처럼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정선제는 잠시 맡길 사람을 생각하다 채결을 불렀다.
“채결, 가서 진서후와 상관수를 불러와라.”
“네.”
채결은 대답과 함께 즉시 밖으로 향했고, 정선제와 나 의정이 두 판쯤 두었을 무렵 주운환과 상관수가 함께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정선제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며 웃었다.
“두 사람 다 일어나라! 내일 정식으로 수녀를 간택하는데, 짐은 너희 둘이 간택장에 가서 지켜보았으면 한다.”
“지켜보라니요?”
상관수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폐, 폐하……. 소신, 소신은 정말 미인을 볼 줄 모릅니다!”
상관수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투박한 사람에게 황제의 후궁을 고르라니!
“예끼, 몹쓸 사람아!”
정선제는 장난삼아 욕을 했다.
“짐이 언제 심사를 도우라더냐! 그건 호부, 예부, 그리고 내무부의 일이다. 너와 진서후는 그 곁에 앉아 수녀들을 지켜보다 이상한 자가 있으면 바로 보고해라.”
상관수는 자신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네, 폐하!”
“알겠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여 못 본 체해 주었으나 입매에 웃음기를 걸고 있었다.
“하하하.”
정선제는 껄껄 웃으며 그들에게 몇 마디를 더 건넨 다음, 돌려보냈다. 옛날에는 무관 한 명이 간택장을 감시했다는데 자신은 두 명이나 불렀으니 아무 일도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