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2화
“본궁은 갈란이 주씨 집안에 시집가겠다는 것을 말렸었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기어이 채결에게 스님을 하나 붙여 오씨 집안으로 보냈지. 그 아이의 거짓말은 알아채지도 못하고 도리어 힘만 실어 주신 게다.”
쾅! 주운환이 큰 소리를 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림 같은 그의 얼굴에 냉소가 가득하고 눈빛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신은 황제 폐하께… 많이 실망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태자가 반색하자 주운환은 차갑게 웃었다.
“폐하는 한 번도 진정으로 소신을 신뢰하신 적이 없습니다. 연초 비적 사건 때도 폐하는 그 비적 놈들의 말을 믿을지언정 소신을 믿지는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믿어 주신 분은 태자 전하뿐이었습니다!”
태자는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기쁨을 어쩌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주운환의 마음이 자신에게 많이 기운 것은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그가 정선제를 어찌 평가하고 있는지 듣기는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태자는 체면을 생각해 낮게 탄식했다.
“아바마마도 참……. 에이!”
“갈란군주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갈란군주를 시집보내려고 폐하께서 모르는 척하신 걸 알고 있습니다. 하하, 제 적형嫡兄에게 시집을 오다니…….”
주운환은 말 속에 조소를 담았다.
“그것참…….”
태자는 한숨을 쉬고는 있지만 눈에는 웃음이 어렸다. 적서의 싸움! 지금 주씨 집안에서 제일 잘나가고 있는 주운환이, 황실의 군주를 아내로 들인 적형이 그 세력을 이용해 차근차근 올라서는 꼴을 어떻게 두고 보겠나.
태자가 적절한 대꾸를 고르는 사이, 주운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저희 집안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제 부인까지 누명을 썼습니다! 모든 증거가 갈란군주를 가리키고 있어 당장 처벌해야 하는데도 폐하께서는 한사코 벌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평왕비와 갈란군주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으셨는지 폐하께서는 제 뒷조사까지 하셨더군요.”
태자는 뒷말은 정말 금시초문이라 깜짝 놀랐다. 그런 일까지 있었다니!
“아바마마가 뭘 조사하셨더냐?”
“모릅니다.”
주운환은 단답하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로 뭐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태자는 얼떨떨했다. 의심이 많아 뭐든 걸리면 반드시 조사해야 직성이 풀리는 정선제의 성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선제가 계속해서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주운환이 정선제에게 크게 실망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렇게 관직에 있는 것보다 아무도 저를 모르던 서자 시절이 더 자유로웠습니다.”
“그 무슨 말인가, 진서후!”
태자는 급히 주운환의 잔에 술을 따르며 그를 도닥였다.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니 이런 눈부신 업적을 이룬 거 아닌가. 자네는 그저 뜻을 펼치고 싶어 할 뿐이라는 걸 내 잘 아네. 자네처럼 이렇게 출중한 사람을 세상이 어떻게 몰라보겠나.”
“전하, 저는 늘 전하께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저희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주운환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태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하, 지금 혹시…….”
태자는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태자는 굳은 얼굴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본궁도 어쩔 수가 없다! 운환 자네 말처럼 아바마마는 이것저것 의심만 하시면서 조정에 혼란을 일으키시고 있다! 남쪽 지방에 역병이 도는데도 아바마마는 수녀 간택에 온 정신이 팔려 신경도 쓰지 않아! 이대로는 머잖아 이 땅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자네에 대한 것도 이제 시작일 뿐이지! 앞으로 의심은 더 커질 것이고 그러면 다음에 자네가 빼앗기는 것은 지위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 목숨일 것이야!”
“그래서…….”
주운환은 말을 아꼈으나 태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본궁은 언제나 못 믿는 사람은 쓰질 않았고, 내 사람으로 삼으면 의심하지 않았다. 지난번 비적 사건 때도 본궁은 언제나 진서후를 믿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태자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궁이 황위에 오르면 아랫사람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소신은 전하를 믿습니다.”
주운환이 담담하게 말하자 태자는 크게 기뻐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제 묘서와 자네 부인이 같이 장명쇄를 그렸다던데, 우리 아이들은 고작 몇 달 차이이니 태어나면 그것을 하나씩 나눠 갖도록 하지. 본궁의 아이는 훗날의 황태자가 될 것이고 그 태자비는 반드시 주씨 집안에서 데려올 것이야!”
“아이들이 태어나면 전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주운환은 기쁜 표정을 지었으나 기다란 속눈썹 아래엔 남몰래 비웃음이 스쳐 갔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때에서나 다시 얘기해 보자고. 물론 주묘서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이리라.
“좋아!”
태자는 호탕하게 웃었으나 눈매는 서리처럼 차가웠다.
“본궁이 당장 즉위하지 못해 한이군! 앞으로 아이들이 태어나면 두 집안의 혼사를 결정하자!”
주운환의 눈도 차갑게 내려앉았다.
“소신도 혼군昏君이 당장 보위에서 내려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하하하!”
흥분한 태자는 가슴을 활짝 폈다.
‘송초의 말이 맞다. 지금 나를 위한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한데 모였다.’
유일한 장애물은 금위군 하나인데, 주운환의 경위영이 있으니 금위군과 싸워도 승산이 충분했다. 아니, 승리를 확신했다. 경위영뿐만 아니라 오성병마사 역시 자신의 사람이니, 무력으로 왕좌를 차지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살짝 한숨을 지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퇴위를 강요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허허, 여기 백화주 맛이 좋군. 자네도 좀 맛보게.”
그러곤 주운환에게 술을 따라 주며 말머리를 돌렸다.
태자는 정선제가 당장, 그러면서도 ‘제명을 다하고 평온하게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갈란군주 때문에 정선제는 먹는 것과 일상용품 모두 극도로 조심하고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주운환은 책사가 아닌 무장이다. 앞으로 중용할 신하이니, 자신이 생부를 독살한 사실을 알아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주운환은 자기편에 서서 자신의 명령에 따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태자가 말을 아꼈다지만 주운환은 태자의 생각을 간파하고 다른 운을 띄웠다.
“황제 폐하의 수녀 간택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이미 각 주 관아에 이등 간택 소집 문서를 보냈다.”
태자가 코웃음을 치자 주운환도 비아냥거리듯 웃었다.
“다행히 일등 간택은 아니군요.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신하들이 놀라겠습니까.”
태자는 일순 얼떨떨했다. 신하들이 놀라 자빠지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노인네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는지 귀족의 딸을 간택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백성들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처자들이 근심하고 원망할지 모를 일입니다. 옛날 남소제가 순행할 때 어느 가난한 집 처녀가 마음에 들어 궁에 데려왔더니, 그 처녀는 끝까지 황제를 거역하다 결국 남소제에게 중상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말을 마친 주운환은 술을 마셨다. 달콤하고 독한 맛에 살짝 웃었다.
“좋은 술입니다.”
하지만 주운환의 감상은 태자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궁에 함부로 여인을 들였다가 그녀에게 중상을 입은 황제의 이야기에 팔려 있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좋은 술이지! 더 마시게나!”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마시다가 자시子時(밤 11시~오전 1시)가 가까워질 무렵에서야 배에서 내렸다.
태자부로 돌아온 태자는 바로 서재로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전하, 진서후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송초가 묻자 태자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본궁의 손안에 있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송초를 비롯한 수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운환의 마음이 태자에게 기운 것은 벌써 알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확인하고 나니 역시 안심이 되고 기뻤다.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어떻게 하면 아바마마가 ‘제명을 다하여 평온하게 가실’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나?”
태자의 질문에 부하들은 잔뜩 얼어붙었다.
“계획이라 할 것이……. 전하, 아예 궁으로 사람을 들여 암살하십시오! 난폭한 방법이긴 합니다만 폐하만 돌아가시면 전하께서 바로 즉위하실 수 있습니다.”
송초가 잠시 주저하다가 결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주변도 일제히 동조했다. 그러나 태자는 냉랭하게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흥! 송초 네 말이 맞다. 제일 단순하고 직접적인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궁에 사람을 들여 암살하는 것이 그리 쉽더냐? 지금 황제는 입는 것, 먹는 것, 잠자리까지 모두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데 자객을 어떻게 들여보낸단 말이냐?”
“하여 소신들도 기회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송초의 말에 태자가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필요 없다. 하하하하! 수녀 간택이 있지 않느냐!”
송초 등은 순간 멍멍해졌으나 곧 태자를 추켜세웠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황제는 벌써 반쯤은 땅에 묻힌 나무껍질 같은 노인이다.”
태자는 어젯밤 주묘서의 말을 떠올렸다. 가장 혐오하는 것을 이용해 보내 버린다라. 생각할수록 좋은 방법 같았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어린 여자들은 젊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법. 그러니 수녀로 간택되면 되레 황제에게 원한이나 미움을 품을 수도 있다.”
“대단하십니다, 전하! 확실히 궁으로 사람을 넣어 암살하면 누군가는 전하의 짓이라고 의심할 수 있으니 전하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 수녀 속에 섞여 들어 시침侍寢을 들 때 황제를 죽이면 깔끔할 겁니다.
수녀가 잡힌대도 억지로 궁에 끌려 들어와 앙심을 품고 황제를 죽였다고 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황제의 죽음에도 그럴듯한 구실이 생기고, 그 또한 자업자득이니 황제의 명예도 땅에 떨어질 겁니다.”
송초가 감탄을 연발했고, 태자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다 웃어 대기 시작했다.
“송초, 적당한 사람을 찾아 들여보내라.”
“알겠습니다.”
송초가 바로 대답했다. 그를 비롯한 태자의 수하들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훈련하고 있었다. 훈련을 받는 인원 중엔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물론 있었다.
* * *
그 시각, 진서후부.
측문이 천천히 열리고 주운환과 여양이 탄 말 두 필이 들어섰다. 아까부터 수화문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여한은 주운환이 말에서 내리자 고삐를 건네받으며 얼른 물었다.
“나리, 어떻게 됐습니까?”
“다들 잘 준비하라고 해라.”
대꾸하는 주운환의 맑은 눈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네.”
여한이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주운환이 성큼성큼 운연거로 돌아가니 엽연채는 벌써 잠든 후였다. 하지만 탁자 위에 놓인 탕은 아직 따끈해 그녀가 막 잠들었음을 짐작게 했다. 주운환은 탕을 마시고 엽연채를 껴안은 채 잠들었다.